“그렇다니까.”
들이 야무지게 힘주어 말한다. 뫼가 쓸데없는 걱정에 매이는 것은 원치 않는다. 흔들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내가 니 팔을 꽉 잡고 있을 테니까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소리쳐! 행여 괜찮을 거라는 생각으로 무시하지 말고.”
“알았어. 그리고 나 하룻강아지 아니야. 한데 내가 뭘 믿고 위험을 무시해. 믿을 건 너밖에 없어. 그러니 마음 놓아.”
뫼가 걱정을 덜어낸다. 하지만 찜찜함을 다 내려놓지는 못한다. 마음이 썩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도 들이 밀어붙이니 어쩔 수가 없다. 들에게 마지못해 끌려간다.
“파일을 열어봐!”
“지금 해 보자고?”
뫼가 놀라서 묻는다.
“미룰 거 뭐 있어? 말이 나왔을 때 밀어붙여야지.”
들은 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말한다. 목소리가 시원시원하다. 하지만 뫼는 불안하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좀 더 시간을 갖고 싶다. 그 사이 들이 생각을 바꿔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한데 들의 밀어붙임이 보통이 아니다.
“왜? 나중에 하면 뭐가 달라져?”
들은 꾸물거릴 게 뭐 있냐는 투다.
“그건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후가 낫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
들의 자신만만함과는 달리 뫼는 한풀 꺾인 목소리다. 들이 너무 당당해서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진다.
“내 말 잊지 마! 무시하지도 말고.”
뫼는 안 된다는 말 대신 한 번 더 다짐을 받는다. 이미 힘을 잃은 자신감이다. 들의 고집 앞에선 버티는 것도 벅찬 일이다.
“알았다니까.”
뫼가 마지못해 마우스를 파일로 가져간다. 손이 굼뜨게 움직인다.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눌러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 손가락이 긴장을 했는지 뻣뻣하다.
“눌러!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들이 기다리다 한마디 한다. 뫼도 더는 뒤로 뺄 수가 없다. 손가락을 지그시 누른다. 파일이 깜박하더니 스르르 열린다.
몸이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간다. 뫼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본다. 문은 보이지도 않는다. 몸을 돌려 되돌아가려 해보지만 되돌려지지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포기하고 들의 팔을 힘주어 잡는다. 한데 이상하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뫼는 들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들의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그녀의 말대로 놈이 그녀에겐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라 생각한다.
방은 텅 비어있다. 이균은 보이지 않는다.
“생각대로야. 한데?”
들이 몸을 바로 하고 낮게 중얼거린다. 이균이 없다는 게 이상하다. 이유가 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일단은 마음이 놓인다.
“문이 없어. 달랑 컴퓨터 한 대뿐이잖아? 놈은 어디 간 거야?”
“뫼, 너 왜 따라온 거야?”
들이 뫼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나도 몰라. 파일이 모두 열리는 순간 나도 니 옆에 있더라고.”
“그럼 돌아갔어야지?”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
둘이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애들이 우리가 사라진 걸 알면 기겁할 텐데? 돌아가야 해!”
이든과 누리, 버들, 아미의 얼굴이 스쳐간다. 허둥대는 모습도 다가온다. 다른 건 생각이 모두 멈춘다.
“어떻게? 문이 없다니까?”
“찾아야 돼. 이대로 여기 갇혀 있을 수는 없어. 단추를 찾아보자!”
들이 올 때와는 달리 서두른다.
“컴퓨터 화면에 빼곡한 이것들은 뭐지?”
뫼는 어느 새 컴퓨터 화면 앞으로 가서 고개를 박고 있다.
“뫼, 그럴 시간 없어. 놈이 돌아오면 우린 꼼짝없이 잡히고 말아. 그럼 영영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들이 바짝 긴장해서 뫼를 재촉한다. 뫼가 혹시라도 잘못 될까 걱정이 앞선다.
“알아. 잠깐 문을 찾고 있어. 난 자료 좀 살펴볼게.”
뫼는 오히려 느긋하다. 컴퓨터 화면에서 이것저것 뒤져본다. 화면에 열어 놓은 것들이 죄 뜬다. 그는 처음 보았던 화면에서 시험 삼아 자판을 두드려본다. 갑자기 열어놓은 화면들이 요동을 친다.
“맙소사. 모든 게 유기적으로 연결이 돼 있어. 여기서 우릴 조종하고 있었어.”
“뭔 소리야?”
들이 문 찾는 걸 잠시 멈추고 묻는다.
“이리 와봐!”
들이 오자 뫼가 입력한 것을 지운다. 다시 화면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봤어?”
“응.”
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다. 놀란 모양이다.
“한데 놈이 왜 우릴 내버려 두고 있는 거지? 여기서 맘대로 우릴 가지고 놀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러게?”
뫼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거기에 매어있을 시간이 없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여길 빠져나가야 해.”
“여기야. 벽엔 없어. 여기서 찾아보자!”
뫼는 화면부터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런 다음 들어올 때 이용했던 것과 비슷한 파일을 찾는다. 손을 재빠르게 움직여 파일을 열고 닫고 한다. 너무도 복잡해서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확실해?”
“그럴 거야.”
뫼의 손이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옆에서 지켜보는 들의 마음은 바작바작 타들어간다. 하지만 더는 끼어 들 수가 없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뫼는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점점 커지는 걸 느낀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이상하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하다. 망설일 틈도 없다. 그의 생각이 가 닿기도 전에 손과 함께 커서가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뫼는 커서가 멈춘 곳에서 마우스 왼쪽을 눌러대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창이 뜬다. 몇 단계를 거쳤는지 알 수가 없다.
“찾았어! 한데 이상해.”
“뭐가?”
“빠져나간 다음에 말해줄게.”
“그럼 얼른 화면을 처음 상태로 만들어. 들키지 않아야 하잖아?”
“알았어! 지금 처음 화면으로 되돌리고 있어.”
“빠져나가기 파일은 어쩌지? 그것도 원래대로 해둬야 할 텐데?”
“그것도 생각 중이야.”
“방법이 있어?”
“그게 가능한지 찾아보고 있어. 안 될 거 같아.”
“그럼 어떡해? 놈에게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되면 어쩌지?”
들이 걱정스레 묻는다.
“잠깐만!”
“왜?”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
“어떻게?”
“누르기만 하면 될 거 같아.”
“그럼 얼른 파일을 열어!”
들이 다가와 뫼의 팔을 잡는다. 뫼가 파일을 누른다. 파일이 열리는 게 눈에 보인다. 뫼는 손가락을 누를 준비를 한다.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오자마자 뫼는 얼른 마우스를 다시 한 번 더 누른다.
“용케 빠져나왔어. 놈이 우리가 다녀온 걸 알아챌까?”
“글쎄?”
“나 혼자 갔더라면 큰 일 날 뻔 했어. 한데 어떻게 된 거야? 난, 넌 여기 있는 줄 알았어. 혹시 나 때문에 따라온 거 아냐?”
“그건 아냐. 여기 있으려 했어.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라고. 한데 파일을 여는 순간 내 몸이 빨려 들어가더라고.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빨려 들어갔다고?”
“왜?”
“난 아니었어.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
“이상하다? 난 전에 느꼈던 그 느낌이 분명히 느껴졌는데?”
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알았어. 너였어. 생각대로 니 몸에 있는 게 내 몸엔 없어. 니가 날 따라온 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밀려간 거야.”
“내 몸이 그 방안에 있던 컴퓨터랑 연결이 돼 있다는 거야?”
“맞아. 그거야. 또 다른 니가 그 안에 있어.”
“내가 있다면 니들도 있겠지?”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너는 따로 특별하게 관리되고 있을 거라는 거지. 애니처럼 놈도 너에게 매달리고 있어.”
“그 말은?”
“맞아. 애니만이 아니야. 놈도 널 우리와 다르게 만들어 놓았어. 그걸로 놈이 너를 길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놈이 보여준 짓거리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
“그래서?”
“그래서는? 우릴 맘대로 조종하고 싶은 거지. 너만 길들이면 우린 저절로 너한테 엮여서 고분고분할 테니까.”
뫼가 몸을 부르르 떤다.
“결국 우리 모두를 움켜쥐겠다는 심보네?”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럴 거야.”
들이 제법 자신 있게 말한다. 뫼도 왠지 그럴 거 같은 생각이 든다. 들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한데 놈은 왜 거기 없었을까?”
“나도 그게 이상해. 놈이 거기 있는 건 확실해. 한데 왜 그 자리에 없었지? 그곳이 핵심부인 건 틀림없는데.”
들이 말을 하는 동안 뫼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린다. 잡히지 않는 뭔가를 쫓는데 좁혀지지 않는다.
“우릴 놓친 건 확실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를 놓쳤어. 니가 없으면 놈은 아무 짓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널 잡으려 하고 있어.”
“한데 왜 그곳에 없었던 거지?”
“안심시키려는 거였겠지. 그래야 니가 방심할 테니까. 성급하게 굴다가 놓치면 끝일 테니까.”
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애니 꼴을 당할까봐? 애니도 날 놓치고 나서 아바타를 물렸어. 직접 키를 잡았지.”
“애닌 널 잡을 수도 있었는데, 왜 놓아준 거지? 매 번 널 놓아줬어. 그러다 너한테 된통 당한 거야. 한데 왜지? 아바타 군단을 물린 것도 영 찜찜해. 딱히 이유를 모르겠어. 넌 짚이는 게 있어?”
“날 놓아준 게 아냐.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한데 아냐. 놈은 날 번번이 놓쳤어. 그 때문인지 몰라도 놈은 날 겁내고 있어. 아바타를 물린 건 내가 아바타를 넘어섰기 때문이고. 풀어놔 봐야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거지.”
“어떻게?”
“그건 나도 기억이 안 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구석으로 몰리면 몸이 알아서 움직여. 그러다가 벗어나면 싹 사라져. 기억도 할 수 없게.”
“정말? 그럼, 그 때문인가?”
“그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은 남거든.”
“그게 뭔데?”
“그 상황을 더는 겁내지 않는다는 거. 놈이 그걸 두려워하는 거 같았어. 섣불리 잡으려 했다가 외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얼핏 놈의 얼굴에서 그런 걸 본 거 같았어. 놈이 틈을 노렸지만 매 번 내가 빠져나왔어. 아마도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거야. 그러던 차에 내가 놈의 컴퓨터를 망가뜨린 거야.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거지. 그래 공학자 놈을 찾아간 거고.”
“정말 그렇게 할 거야? 구석으로 몰리면 정말 놈을 죽일 거야? 솔직히 지난번 니 눈에서 그걸 느꼈을 때 정말 무서웠어. 꼭 놈들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거든.”
뫼가 겸연쩍게 웃는다.
“그러려고도 했어. 한데 내 본심이 아니더라고. 진짜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어.”
“니가 진짜 원하는 건 뭔데?”
“놈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말을 하다 만다. 쑥스럽다. 그런 한 편 웃음도 나온다.
“빠져나왔을 때, 뭐?”
들은 뫼를 빤히 쳐다본다. 뫼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하다. 한데 뫼가 뜸을 들인다.
“또 빠져나가려고?”
“그건 아니고. 말을 하기가 그래서.”
“그게 그거지? 내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거 아냐?”
“그건 아냐! 말이 안 나와서 그래.”
“그래서? 이번에도 이렇게 넘어가겠다고?”
뫼가 들을 말똥거리며 쳐다본다.
“난 니가 내 옆에 있기를 바라. 누리도 이든도 버들도 아미도.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어. 숨길 생각 같은 건 없었어.”
말이 한꺼번에 좔좔 나오지 않는다. 뜸을 들이며 띄엄띄엄 말한다.
“한데 너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고 있는 거 알아?”
뫼가 짓궂은 얼굴로 얼른 말을 바꾼다.
“내 유전자정보를 가진 여자가 똑똑했다고 하잖아. 그러니 내 머리가 나날이 좋아질 수밖에. 놈한테 감사할 일이지. 안 그래?”
들도 순순히 받아넘긴다.
“그렇긴 해.”
“무슨 대답이 그래?”
“무슨 대답은? 난 니가 물어서 그렇다고 했을 뿐인데.”
뫼는 정곡을 찔리자 머쓱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외려 시치미를 뚝 뗀다.
“뒷말을 싹둑 잘라냈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였는데?”
들도 만만치 않게 파고든다. 눈을 떼지 않고 뫼의 눈을 따라간다. 뫼가 머쓱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렇게 넘어가려고? 안 되지? 어서 말해 봐!”
뫼는 삐죽삐죽 웃을 뿐 입을 열지 않는다.
“혹시 샘이 나는 거야? 내가 똑똑해져서? 널 뛰어넘을까봐?”
들이 넘겨짚기를 한다.
“쬐끔.”
뫼는 더 내빼지 못한다. 쬐끔이라고 말은 했지만 느끼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도 바닥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정말?”
“응. 정말. 애들 오겠다. 나가자!”
뫼가 얼른 빠져나올 구실을 찾는다.
“그렇게 빠져나가려고? 웃겨?”
들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언제 내가 빠져 있었나? 난 니 앞에 있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니 옆에 있었다고?”
뫼도 장난기를 드러낸다. 그리고는 얼른 밖으로 뛰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