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은 주문을 외워댈 힘이 없다. 뫼가 버텨내면서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애니가 던져준 권한이 쑥쑥 자라고 있다.
“이대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애니가 결단을 내린다.
“그럼? 방법이 있어?”
“찾아봐야지. 이건 감나무 아래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꼴이야. 떨어진다고 입으로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야.”
“그럼 어쩔 건데?”
“놈들의 컴퓨터에 자료가 남아있는 한 우리와 놈들 사이에 이어져 있는 끈은 절대 끊어지지 않아. 우리에게서 아주 달아날 수 없다고. 놈도 이미 그걸 알고 있을 거야. 이를 악물고 덤비겠지.”
애니가 허공을 노려보며 말한다.
“우릴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냐?”
“물러설 데가 없게 된다면 그럴 수도 있어.”
“니가 했어? 조물주에게 칼을 겨누게 한 것도 니 솜씨야?”
“아무리 눈이 멀었다고 해도 내가 그런 능력까지 줬겠냐?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렇다는 거지. 아무래도 이상해. 이렇게 빨리 진행되면 안 되는 거였어. 한데 너무 빨라. 머뭇거릴 틈도 보이지 않고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살기가 느껴지는데 그게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
애니가 사뭇 진지하다. 이균은 고개를 돌린다. 애니의 말이 자꾸 껄끄럽다. 빨리 접어줬으면 한다.
“본심은 아니야.”
“알아.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거야.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 외부 자극이 없다면 생길 수 없는 마음이야.”
애니가 쉬 생각을 돌리지 않는다.
“너무 많은 걸 욕심내다 얽혀 든 걸 모른 건 아니고?”
애니 탓을 해본다.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들이대지도 못하는 애니다.
“나 애니야. 니가 내 머리를 욕심내는 애니라고. 어찌됐든 잘 됐어. 들, 고것이 뫼 옆에 딱 들러붙어 있는 게 걸리적거렸는데. 고게 토닥거리면 제자리로 돌아가곤 해서 잔뜩 속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사그러드는 걸 겪어 내는 것도 비참한데. 이참에 떨어져나가 주면 딱인데.”
애니가 이균의 말을 거칠게 밀어내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별로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차라리 양심이 나아. 양심이 살아 있으니 그걸 믿어보자고.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살기를 잠재우겠지.”
“양심이란 거, 믿을 게 못 돼! 널 봐! 널 보면 알 수 있잖아.”
애니가 턱으로 이균을 가르킨다. 이균이 애니를 노려본다. 10여 년 전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한데 애니가 공연히 불을 질러놓고 만다.
“자식 왜 쓸데없이 10년 전 일은 들추고 그래? 그 덕에 여기까지 와 놓고. 공을 갚으라는 것도 아닌데 깎아내리기는? 손잡을 때 그런 걸 미안해하기라도 했냐?”
이균이 버럭 화를 낸다.
“성깔은? 말도 못하냐? 그러지 말고 내친김에 하나만 더 만들자!”
“뭘?”
이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묻는다.
“뭐는? 애니민이지. 내 생각엔 애니민밖에 없어. 애니민을 만들어 보내는 게 직방이야. 여기서 아무리 용을 써봐야 헛수고야. 그동안 이리저리 나댔지만 나아진 게 없잖아. 외려 뫼 그 놈 능력만 깨어나게 하는 꼴이 돼버렸어.”
애니가 머릿속에 담아둔 채 벼르고 있던 말을 꺼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속을 뒤집어 탈탈 털어 보이는 거 같아서 뜸을 들였다.
“새로 작업하자는 뜻이야?”
이균은 애니를 살짝 떠본다. 그러면서 애니의 표정을 살핀다. 꿍꿍이가 있다면 덥석 물을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한데 꿍꿍이가 보이지 않는다. 꼭꼭 여며 두면 거뜬히 속여 낼 수도 있는 애니다. 하지만 거기에 매여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새로 작업한다고 해결이 되겠냐? 뫼가 가만두지 않을 텐데. 딱 하나만 더 만들어서 애니민들에게 보내면 돼.”
“어떻게?”
그럴싸하지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통로. 통로가 있다면서? 뫼를 유인할 통로를 이용해 보내면 되잖겠어?”
“그건 뫼를······.”
말을 하려는데 머리가 번쩍한다. 애니가 알아차리고 씩 웃는다.
“자식, 이럴 땐 머리가 제법 돌아가더라.”
이균이 애니를 추켜세운다.
“애니민 7호 몸속에 담고 싶은 것은?”
“이번엔 장난치지 마라!”
“너야말로 장난치지 마!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 아냐? 잔말 말고 어서 말이나 해!”
“뇌세포 파괴 바이러스, 입력장치 파괴 바이러스.”
“그게 다냐?”
이균이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컴퓨터 자료 복사 전송 관련 프로그램. 자료를 넘겨받아야 연결이 끊어지기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어.”
“무슨 재미로 그걸 보겠냐?”
이균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그건 별로다. 장기판에 졸병들만 죄 세워놓고 싸우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
“넌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또 있다는 뜻이냐?”
이균이 눈빛을 빛낸다.
“니 머리만 똑똑한 줄 아냐? 그런 다음 새로 입력하면 되잖아. 어차피 뫼를 통해 알고자 하는 건 다 알았어.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다고.”
“내 생각은 좀 달라. 뫼와 버금가는 놈을 만들어 보내는 거야. 둘이 맞붙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봐? 고대 로마 경기장에서 노예들이 상대편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는 오싹한 느낌이 들지 않아? 상상만 해도 이렇게 흥분이 되는데.”
이균은 애니의 방법이 썩 내키지 않는다. 이번엔 애니가 심드렁하다.
“니가 생명의 존엄성 그런 거 때문은 아닐 테고. 떨떠름한 이유가 뭐야?”
“7호가 뫼에게 당하면? 뫼가 점점 더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니 말을 더듬어 보면 뫼에게 신 버금가는 권한을 쥐어줬다는 거 아냐? 한데 생각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할 거 같아? 지금도 뜻대로 안 되는 거 아냐? 뫼가 당하고 가만히 있겠어?”
“그러니까 일단 권한부터 되돌려놓고. 그런 다음 입맛에 맞게 새로 양념을 하면 되잖아.”
한풀 꺾일 줄 알았던 애니의 기는 꺾이지 않는다. 물러나지 않고 외려 주저주저하는 이균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끈질기게 이균의 눈빛을 좇는다.
“그 프로그램들만 담아 보내면 문제가 해결되는 건 확실해?”
이균이 애니의 눈길을 끝까지 무시하지 못한다.
“거의. 꼭 그렇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애니민들이 전처럼 우리 손안에 들어오지. 난 놈들을 절대 포기 못 해. 그동안 고생한 게 얼만데.”
애니가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본다. 이균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에 바쁘다.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영 신통치가 않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고생한 걸로 치면 애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애니가 애니민을 손안에 넣는다면 당연히 그의 손에도 그들이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뒤가 개운하지 않다. 당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속에 꿍꿍이를 잔뜩 지니고 있을 놈이다.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섣불리 모든 걸 넘겨주면 안 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땐 제2, 제3 애니민 작품을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애니의 마음속에 제2, 제3의 애니민 작품은 없다. 제 입으로 직접 그걸 드러냈다. 딴 짓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다. 등골이 오싹하다.
아예 손을 뗄까 생각한다. 그러자니 애니 말대로 들인 공이 너무 아깝다. 제2의 애니민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제1 애니민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러기엔 애니만한 골수도 없다. 실력으로 따라갈 자가 없다. 뒤는 개운하지 않지만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그래, 해보자!”
“그럼 시작해! 10일 안에 끝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가 불리해져.”
어이가 없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꾸를 하든가 말든가. 10일 안에 사람 하나를 복제해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왜? 설마 못한다는 건 아니겠지?”
“엄마 뱃속에서도 10달이 걸려. 그렇게 해서 나와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한데 한 사람의 20년을 10일에 완성하라고? 그것도 달랑 세포 하나로?”
“얼뜨기라도 괜찮아. 바이러스만 전염시키면 되는데 뭐. 복사해서 전송하는 거야 머리가 없어도 돼. 그러니 완벽하게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애니가 끔찍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균의 몸이 오싹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자신도 만만치 않으면서 그건 생각지 않는다. 앞에 있는 애니의 허물만 큼지막하게 보인다.
“그 눈빛, 양심이 꿈틀대기라도 하는 거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아님, 동정심이라도? 이미 더렵혀진 손이야. 이미 때 묻은 양심이고. 닦아낸다고 해서 흔적이 지워져? 지운다고 쳐? 양심이 뭐야. 이미 저질러진 일에서 홀가분해질 수 없는 게 양심이야. 아무리 닦아내도 되돌려지지 않는 게 양심이라고. 새삼스럽게? 그냥 하던 대로 해. 그게 너다워.”
애니의 말에 이균이 움찔한다. 잠깐 딴 곳에 갔다 온 느낌이다.
“그래도 10일은 어림없어. 애니민들은 10번을 속성 복제했어.”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거잖아. 게다가, 10번 속성 복제를 했어야 뭐해. 결정적으로 두뇌가 너무 똑똑해서 탈이 난 걸.”
“그거야 니가 입력한 것들 때문이잖아. 몇 번이나 그걸 말해줘야 받아들일 건데?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수고를 다시 할 필요가 없잖아.”
둘이 뫼의 머리를 놓고 옥신각신한다. 애니는 이균을, 이균은 애니를 탓한다. 둘 다 서로를 믿을 수가 없다.
“뭐 하러 10번이나 속성 복제를 했는데? 그러느라 시간과 돈을 얼마나 들이부었는데? 그 돈이면 죽을 때까지 흥청망청 쓰고도 남아. 니 주머니에서 안 나오니까 아까운 줄도 몰랐지?”
애니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나 했으니까 이 정도 녀석들을 만들어냈어? 다들 똘망똘망하잖아? 어디 비실거리는 놈 하나 있어? 없잖아?”
애니가 빈정대자 욱하고 열이 치받는다. 큰소리로 내지른다.
“그뿐야? 유전자에 입력된 기억을 완전히 지우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어. 진짜 복제인간을 바랐던 게 아니잖아? 니 뜻대로 했을 때 겪을 대가는 생각이나 해봤어? 누구 한 사람 허락받은 적 있어? 의심받을 일은 싹부터 자르는 게 최선이야. 닮은꼴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잖아. 복제인간을 만들어냈다고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마!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
애니의 말에 이균이 제대로 열을 받는다.
“한데 효과가 없잖아. 다들 모체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잖아?”
애니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소훈이라면 몰라도 이균은 믿을 수 없는 놈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잘못을 뒤집어쓰는 것도 싫다. 잘못이 제게 있다 해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거기까진 나도 확실히 몰라. 머리만 10번 복제하고 몸통은 아니라서 그런 건지도. 어쨌건 너도 한 몫 했어. 빠져나가려 하지 마!”
“머리만 따로 10번을 복제했다고?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거야?”
애니가 믿기지 않는 투로 묻는다. 복제는 들어봤어도 몸 따로 머리 따로 복제한다는 말은 처음이다. 이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볼 거 없어. 꼬박 10년을 매달려서 이룬 성과야. 그게 다야.”
“그 정도면 지금 이건 식은 죽 먹기이겠네. 사설 그만 늘어놓고 가서 시작해!”
애니가 일어나더니 이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끌고 간다. 이균은 아아 소리를 내며 맥없이 끌려간다. 실험실 문을 열더니 내동댕이친다. 이균이 바닥에 나동그래진다.
“니 입으로 하자고 했으면 해내! 생떼 쓰는 거 볼썽사나워서 더는 못 봐주겠어. 잠자코 복제에나 매달려. 허튼짓 했다가는 알지? 딱 10일이다.”
애니가 문을 꽝 닫고 나간다. 이균이 일어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다. 스위치를 눌러 문을 벽으로 막아버린다.
“하. 하. 하. 으하하하······.”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자 이균이 웃기 시작한다. 끊긴 음으로 웃다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웃음소리가 낭자하다. 눈이 꿈틀한다. 돌아서 반대편 벽으로 간다. 벽을 밀고 들어간다. 안에서 단단한 걸쇠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