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한 거 아니야. 저쪽 컴퓨터 시스템 안에 만약을 위해 자료를 숨겨놨어. 그게 떴어.”
“컴퓨터를 손에 넣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
“원래 자료에 하나가 더 있어.”
“그게 뭔데?”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통로.”
애니가 뿌듯한 미소를 흘린다.
“걸려들면 바로 눈앞에서 뫼를 볼 수 있다는 거지?”
“문제는 놈들이 낌새를 챈 느낌이야. 세 개는 열어보고 마지막으로 그거 하나 남았는데, 열 생각을 안 해.”
둘이 조근조근 이야기를 잇는다.
“자극을 보내면 딱인데.”
애니가 팔을 괴고 턱을 받친다.
“자극은 보내고 있어.”
애니의 눈빛이 살아난다.
“어떻게?”
“달래듯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
“그럼? 뫼가 알아들어?”
“뫼가 아니라 뫼의 세포들이.”
애니의 입이 귀에 가 걸린다.
“그럼 해보자!”
“니 옆에서?”
“그럼 어때서?”
“오글거려. 남이 옆에 있으면 오글거려서 말소리가 목에 걸릴걸?”
“두 눈 딱 감아. 너 혼자서는 안 돼. 뫼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뫼가 아니라는 걸 마음에 새겨둬! 그럼 걸리지 않을 거야. 자, 자세부터 잡고, 어서 해봐!”
이균이 소파에 몸을 편하게 엎드린다. 그리고 손등에 턱을 괸다.
“이래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더라고.”
이균이 애니가 웃지는 않을까 하여 미리 선수를 친다. 애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균답지 않은 모습이야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는다.
“알았어. 그러니 어서 자극이나 보내!”
이균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열어봐! 어서. 그 안에 자유가 있을지 몰라. 그러니 열어보라고.”
소름이 돋는다. 이균의 말소리가 입안에서 매끄럽께 흘러나오고 있다. 오싹하다. 애니가 팔을 문지른다. 이균은 그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뫼는 움찔한다. 몸이 다시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꼭 주문을 외워대는 소리 같다. 소리가 들려오면 몸을 가만히 놔 둘 수가 없다. 서성거려도 가라앉질 않는다.
“왜? 왜 또 그래?”
일어나 서성이는 뫼를 보고 들이 묻는다.
“열어보라는 놈의 목소리가 자꾸 넘어와.”
“내 귀엔 안 들려. 이상해. 처음엔 내 귀에도 들렸었는데.”
“지금은 내 귀에도 안 들려. 들을 수 있는 건 내 몸의 세포들이야.”
“놈이 세포를 자극하고 있어. 귀로 듣는 건 판단할 수 있지만 세포들을 자극하면 몸이 반응해. 놈이 그걸 이용하는 거야. 절대 열면 안 돼!”
“알아. 한데 참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
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어.”
“그 맘도 알아. 그래도 참아줘! 내가 니 옆에 딱 달라붙어있을 거야. 날 꽉 잡아!”
뫼의 손이 들의 팔을 잡는다. 참아내기가 힘겨운지 손에 힘이 더해진다. 팔이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뫼의 일그러진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뫼, 니 옆에 내가 있어.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린 함께야.”
들이 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뫼가 서서히 돌아온다.
“이겨냈어. 몇 번만 더 이겨내면 놈들이 지쳐 나가떨어질지도 몰라. 놈도 지금쯤 널브러졌을 거야. 너만 힘든 건 아닐 거야.”
흐물흐물한 뫼를 들이 침대로 데려가 눕힌다.
“좀 자! 자고 나면 개운해질 거야.”
뫼가 눈을 감더니 이내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들은 잠든 뫼의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견뎌줘서 고마워.”
얼굴과 머리를 어루만진다.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들린다. 넷이 우르르 몰려온다. 왁자한 웃음소리도 섞여있다.
“뭐야? 둘이서 뭐하는 거야?”
아미가 들어오다 멈춰 서서 말한다. 아미의 말을 듣고 보니 어색하다. 얼른 침대에서 일어난다.
“뭔 일 있었어? 지난번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 거야?”
누리가 들의 표정을 살핀다. 들의 얼굴이 밝지가 않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줌마가 글을 쓰지 않고 창을 열어놔서 우리끼리 살아내고 있는데 무슨?”
“아참 그렇지?”
이든이 다가간다. 들은 이든의 시선을 피해 달아난다. 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고이고 있다. 들키고 싶지 않다. 눈물이 흐르려는 걸 꾹 참는다.
“우리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요즘 이상해. 지난번에도 이랬어. 그때도 입 딱 다물고 말을 안 했잖아. 편 가르기 하는 거 같아서 그때도 썩 좋지는 않았는데.”
아미가 지난번까지 들추며 말한다. 들도 기억이 난다. 그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무슨 일은 있지만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말을 해! 있다면서 말을 안 하니까 더 이상하잖아.”
“뫼가 깨어나면, 그때 들어.”
뫼는 두어 시간을 자고서 깨어난다. 아미와 이든, 버들과 누리가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다. 들은 아예 딴 곳으로 고개를 돌린 채다.
“왜?”
뫼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히죽 웃어 보인다. 모두들 뫼의 얼굴만 쳐다본다.
“말해! 니들만 알고 있는 거. 입을 다문다고 불안감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맞아. 오히려 불안감을 부추길 뿐이야.”
이든과 아미가 묶음으로 말한다.
이든이 쪼그리고 앉아 뫼의 눈을 들여다본다. 뫼의 눈빛이 흔들린다. 결국 그가 눈물 한줄기를 쏟아낸다. 그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힌다.
“말해! 우린 다 같은 운명이야. 너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내 운명이기도 해. 아무도 그 운명을 피해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어서 말해.”
“그래. 뫼, 어서 말해!”
뫼가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심각한 거구나?”
“응.”
뫼가 말을 못하고 있자 들이 대신 말한다. 하지만 대답이 시원찮다.
“뭔데?”
묻는 이든의 목소리도 맥이 없다.
“뫼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달라.”
“우리도 그건 이미 알고 있어. 한데 또 이건 무슨 말이야?”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던 누리와 버들, 아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을 바라본다.
“말 그대로 다르다고.”
“그럼, 우리만 애니민인 거야?”
“그건 아냐. 우린 모두 애니민 맞아. 애니라는 놈이 만든 만 년의 사람 등장인물 캐릭터 그림에 사람의 유전자를 결합해서 만든 애니민.”
“그건 이미 알고 있잖아.”
“그리고 놈들은 유전자를 10번이나 속성 복제했어.”
들이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한데 뭐가 다르다는 거야?”
누리가 따지듯 묻는다.
“그 다음 과정이. 놈들은 뫼에게 모든 걸 걸었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짓거리를 다 했다는 뜻이야. 상상할 수 없는 것도. 놈들뿐만 아니라 공학자 놈도.”
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히 말을 잇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쉽게 말하면 안 돼?”
버들은 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뫼의 몸속에 모든 걸 다 집어넣었어. 사이버공간은 물론 현실세계까지 넘나들 수 있는 능력까지.”
“그럼 좋은 거 아냐?”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공학자 놈이 현실에서 뫼의 세포를 자극해대. 놈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해.”
“말도 안 돼!”
버들이 눈물을 글썽인다. 들에게서 뫼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뫼는 고개를 수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놈의 컴퓨터를 망가뜨렸다 해서 이젠 다 끝난 줄 알았어. 우리끼리 잘 살아내면 되는 줄 알았어. 한데 그게 아니었네. 뫼, 니가 온몸으로 막아주고 있었던 거네?”
버들이 뫼에게 다가가 손을 감싸 쥔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린 신이 나서 히죽거렸는데. 진작 말 좀 해주지.”
“그게, 며칠 안 됐어.”
뫼가 쓴웃음을 짓는다. 미안하기도 하다. 시선을 딴 데로 돌린다.
“그러지 마! 니 탓 아니야. 난 늘 니 편이야. 그거밖에 해줄 게 없어서 미안해.”
뫼가 시선을 되돌려 버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버들의 눈물에 아픔이 씻겨나간 듯 멀쩡하다.
“다시 힘이 불끈 솟네. 견딜게. 놈이 아무리 긁어대도 꾹 참고 견뎌낼게. 너 내 편이잖아. 들도, 아미도, 이든도, 누리도 모두 내 편이잖아. 나 혼자 감당하는 거 아니잖아. 그럼 견딜 수 있어. 됐어?”
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자리로 돌아가자!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찰거머리 같은 놈. 그 놈은 언제나 떨어져나간데?”
누리가 이를 간다.
“떨어져나갈 일은 없어. 우리가 떼어내야지.”
뫼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이전으로 돌아와 있다. 모두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르지만 꽁꽁 묶여서 떼어낼 수 없는 운명이다. 온몸의 힘이 죄 빠져나가도 쓰러질 수가 없다. 쓰러져도 벌떡 일어서야 한다.
“앞으론 혼자 끙끙 앓지 마! 우릴 더는 허수아비로 세워놓지 말라고! 우리가 뭐냐? 너 혼자 피 터지며 싸울 때 뒷짐 지고 있다가 다 평정되면 널 영웅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떨거지들?”
누리가 밖으로 나가다 돌아서서 말한다. 참고 있다 뱉어냈는지 표정도 약간 일그러져 있다.
속이 뜨끔하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누리의 말도 틀리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헤쳐 나갈 생각만 하느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건······.”
둘러대려 입을 떼지만 다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말하라고. 우리도 알 권리가 있어. 너도 나도 같은 애니민이잖아. 혼자 다 떠맡지 말고 우리 생각도 들어줘. 그거 하나 부탁하자.”
말을 마치고 누리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간다. 뫼는 멍하니 누리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머리가 띵하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애니민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동안 자조적으로 뱉어낸 그의 말들과는 뭔가 다르다. 그동안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토해낸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뱉어낸 것은 그걸 받아들이고 있는 말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든 현실의 사람들과는 탄생 과정도 다르고 겉모습도 다르다. 살고 있는 공간도 다르다. 그동안 그게 어째서 하고 밀어내기에 바빴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누리가 그걸 깨달은 걸까? 누리가 달라 보인다.
우린 숨도 쉬고, 생각도 하고, 배고픔도 느껴. 울기도 해.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그런 것들도 다 한다고. 한데 그 따위 것이 뭐가 중요한데, 하며 고래고래 악을 썼던 누리였다. 달라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놀자-파이면서도 예리한 구석이 있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
들도 누리의 말을 한 귀로 흘리지 못한다. 뫼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애니민이라는 게 싫은 건 아니지?”
들이 가만히 올려다보며 묻는다.
“싫다고 해서 운명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차라리 밀어낼 때보다 홀가분해.”
“맞아. 나도 그래. 그래도 이런 싸움은 싫다. 우리에게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이런 게 아닌 다른 걸로 부대끼고 싶어.”
들이 아픔을 드러낸다. 가슴 안쪽이 뭉근하게 아프다.
“우리가 주저앉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맞아. 우린 다시 벌떡 일어선 거야?”
들이 가녀린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아픔이 묻어있다. 뫼는 그 언젠가를 위해서 눈을 딱 감고 외면하기로 한다. 애니와 소훈, 이균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벼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