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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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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목숨을 건 맞섬24


BY 한이안 2015-12-24

뫼가 빠져나가고 애니도 게임 창을 닫는다.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 주먹은 불끈 쥔다. 부르르 떤다.

쥐새끼 같은 놈. 왜 하필 그때 거기에 나타난 거야? 그딴 뜬금없는 말만 안 했어도 대꾸 같은 건 안 했을 텐데. 게임 속으론 왜 들어왔던 거야? 올가미를 낚아채 당겼다 놓아? 엉덩방아 찐 곳이 꼭 욱신거리는 거 같네. 자외선 총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한데 자외선 총알을 싹싹 피했어. 어떻게? 한꺼번에 들입다 쏘아댔는데 어떻게? 빠져나갈 틈새가 없었을 텐데.’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자신이 한 짓임에도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뿌듯하지도 않다. 그래도 자신이 한 짓이다. 남을 탓할 주제가 못 된다. 고개가 힘없이 꺾인다. 후회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엎질러진 물이다. 주워 담을 방법이 없다.

너무 많은 걸 익혔어. 아 열 받아. 열이 뻗치네. 놈이 지금쯤은 다 알아챘을 텐데 이제 어쩌지? 내가 날 너무 드러냈어. 조금만 더 참는 건데. 느긋하게 구는 게 이미 뭔가 알아 낸 눈치였어. 한데 속을 열어 보여준 것도 모자라 능력을 꺼내도록 자극을 해댔으니 이를 어째. 소훈이나 이균이 알면 목을 틀어쥐겠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해. 더는 방심하면 안 돼.’

그는 얼른 작업창을 연다. 소훈이 와서 힐끗 들여다보고 간다.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림이 확확 바뀐다. 하지만 번번이 헛손질이다. 생각은 딴 데 있다. 수습할 방법을 찾지만 길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아득하다.

처음부터 애니민들에겐 모든 게 비밀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건 너무 밍밍하고 싱겁다. 그래 더디게 하나하나 알아내도록 짜 맞췄다. 그때마다 맞서도록 엮었다. 고개를 만나고 넘고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데 모든 게 비틀렸다. 여자가 끼어들고부터다. 알아낸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는 아니다. 팍팍해야 할 삶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여잔 허술한 겉모습과 달리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컴퓨터가 손에 들어와야 한다. 한데 여잔 모든 걸 눈치 챘다. 여자의 컴퓨터와 뫼의 컴퓨터를 끈으로 연결해 놓은 탓이다. 아니, 여자의 컴퓨터를 중심부에 놓은 것이 문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 고리를 끊어버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방법이 없다. 여자와 애니민들이 꽉 움켜쥐고 있어서 빼앗을 수도 없다. 속이 푹푹 썩는다. 걸핏하면 소훈은 넌 너무 느긋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속을 모르는 소리다. 속이 들끓는 열로 요동치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아는 게 없어서 하는 한심한 소리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치받는 열은 가라앉을 줄을 모른다. 뫼가 눈앞에서 얼쩡거린다. 잡아서 꼼짝 못하도록 목을 옥죄고 싶다. 간신히 눌러 참는다. 뫼를 포기할 수가 없다. 소훈이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 보물을 뫼에게 모두 쏟아 부었다. 뫼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아파도, 열이 치받아도 참아야 하는 이유다. . 죽이고 싶도록 마음이 가는 창조물이다.

뫼는 애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도톰한 얼굴이다. 살이 쪄서 얼굴이 전체적으로 둥글게 보인다. 눈은 작은 편이 아니다. 코끝은 뭉툭하다. 자신들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다. 드라마 속 인물들과도 거리가 느껴지는 얼굴이다. 생각도 눈동자도 멈춘다. 손은 느리지만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입안은 달콤함으로 가득하다.

생각을 딴 데 두고 먹어도 맛이 느껴지냐?”

보다 못한 누리가 한소리 한다.

먹으면서까지 그러지 않아도 돼.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여기저기서 ㅎㅎ 웃는 소리가 들린다. 다들 한소리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눈빛이다. 누리가 대신 나서주니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들도 열매로 손을 가져가며 웃고 있다.

알았어.”

뫼가 들의 웃음소리에 멋쩍어진다. 들을 흘끗 보고는 얼른 열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들이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알았어. 알았다고.”

뫼가 들에게 웃지 말라는 뜻으로 눈총을 쏘아 보낸다. 들이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다.

한데 놈이 어떤 거 같아?”

?”

뫼가 당황한다. 입으로 가던 손이 멈춘다. 사실대로 다 말을 하자니 그 다음이 걱정이다.

뭘 그렇게 당황해? 한 방 먹이고 싶은데 덩치가 큰 놈이면 궁리를 해봐야 할 거 아냐? 누가 책상머리파 아니랄까봐 것도 속으로 재고 따지고 있냐?”

누리가 엉뚱한 푸념을 한다. 뫼가 멋쩍게 씩 웃는다.

니 주먹에 넘어갈까? 덩치가 장난이 아니던데. 얼굴도 이따만 하더라.”

들이 손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맨주먹으론 안 되겠네. 작대기 하나 만들어 휘두르는 연습이라도 해둬야겠어.”
누리가 꼭 그렇게 할 거처럼 말한다. 다들 못 말려 하는 눈으로 누리를 본다. 누린 아무렇지 않게 나뭇가지를 꺾어 다듬는다. 사뭇 진지하다. 그 모습이 어이없어 다들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린 신경 쓰지 않는다. 진지함에 밀려 웃음소리가 그친다. 툭툭 뱉어내던 말소리도 잘려나간다. 언제까지 그럴지 지켜보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눈이 누리에게 쏠려있다. 누린 거기에도 관심이 없다. 손만 바쁘게 놀려댄다.

넌 힘쓰는 일을 했을 거야.”

누리의 분주한 손놀림을 지켜보다 버들이 불쑥 던진다.

내 생각도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가 대꾸한다. 버들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뫼의 머릿속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누리의 작대기를 가상공간으로 가져갈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다가온다. 가상공간에 있는 작대기보다 누리가 만든 게 더 단단해 보인다. 쓸 수 있을까? 내려치지는 못할 거 같다. 놈이 밉기는 하지만 휘두르는 건 망설여진다. 하지만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놈의 오금을 박을 수 있을 거 같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눈은 누리의 손놀림에 가서 멈춰있다. 하지만 머리는 애니에게 가 닿아 있다. 번번이 방화벽에서 놈을 놓치고 만다. 지난번 놈의 컴퓨터 속에 들어가 휘저어 놓은 게 문제였다.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던 흠이라 생각했는지 컴퓨터와 서버의 환경을 싹 바꿔 버렸다. 그런 후론 틈을 내주지 않고 있다. 틈을 노려보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더듬는다. 다른 건 모두 버린다. 오로지 애니의 서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만 주워든다. 인터넷에서 읽은 자료가 떠오른다. 헛수고는 아닌 모양이다.

나 먼저 들어간다.”

말을 남기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마음이 급해진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한다. 자료를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도구와 연장을 준비해놓는다.

프로그램을 압축하여 아주 작은 캡슐에 담는다. 너무 작아서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 인터넷을 뒤져 다시 도구 하나를 준비한다. 여전히 어설프다. 손이 번번이 엇나간다. 하지만 그도 포기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이다. 다른 길은 눈을 부릅뜨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물러설 수가 없다. 언제까지 애니와 티격태격하면서 시간을 보낼 순 없다. 처음과 달리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 주저앉기에는 목표가 너무 뚜렷하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다시 해 봐!’

스스로를 다그친다.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다. 우공이산이다.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힘을 잃고 머뭇거리던 손놀림이 다시 빨라진다.

그래. 잘하고 있어.’

다독이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들까지 멀리한 채 며칠을 매달린다. 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뻥 뚫린다.

해냈어!’

스스로가 대견하다. 뿌듯함에 두 손을 번쩍 든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다. 들이 옆에 있었다면 끌어안았을지도 모른다. 들을 번쩍 들고 한 바퀴 빙 돌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접는다. 지금은 그것조차도 사치라 여겨진다. 애니의 게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놈에게 다가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이미 게임은 시작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