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애니매이션 인간. 늙지도 않는다면 그야말로 금붙이에 꽃이 얹힌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되돌릴 필요도 재탕을 할 필요도 없다.
“왜? 이균이 미끼를 던져?”
“미끼는? 이미 실험까지 마친 거 같더라.”
애니가 소훈을 본다.
“노화 담당 유전자를 찾아낸 건 확실해. 동물을 가지고 실험도 해봤대. 애니민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그 일도 같이 했다더라.”
애니가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소훈이 말을 보탠다.
“그 놈 말을 100% 다 믿으면 안 되는 건 알아?”
애니는 이균을 떠올린다. 계산엔 머리가 빠삭하게 돌아가는 인간이다. 함부로 믿었다간 큰 코 다칠 게 빤하다.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마음으로 이균의 속을 꿰뚫어봐야 한다. 그래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다.
“혹시나 하고 떠보는 것일 수도 있어.”
애니가 시큰둥하게 거리를 둔다.
“그건 아냐. 사이트에 접속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야. 굳이 떠볼 필요가 뭐 있겠어?”
“그래도 덥석 물었다가 탈나는 수가 있어.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애니가 몸을 사린다. 소훈이 쓴 입맛을 다신다. 몸을 일으킨다.
“어디, 가려고?”
“그동안 못 본 볼 일 좀 보려고. 일주일 내내 변변한 외출 한 번 못했잖아.”
소훈의 말이 버석거린다. 못마땅한 눈치가 또렷하다.
“다녀와! 올 때 피자 사오는 것도 잊지 말고. 이왕이면 임실 치즈를 듬뿍 올린 피자로 사와!”
소훈이 쌩하니 밖으로 나간다. 애니는 손을 싹싹 닦아낸다. 손가락이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건 딱 질색이다.
만 년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얽힌 숨소리만 희미하게 잡힌다. 들과 뫼인 모양이다. 엿들으며 궁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도 내일을 벼른다. 내일은 직접 나서 보기로 한다.
뫼는 깊은 숨을 마시고 내뱉고 한다. 긴장을 했는지 몸이 바짝 오그라붙는 거 같다. 다들 그런 뫼를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얼굴빛이 어둡다.
“아무 탈 없이 돌아올 거지?”
버들은 눈물을 글썽인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뫼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주저앉기라도 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면서도 막상 가상 세게 앞에 서게 되면 두렵고 겁이 난다.
“맞서지 마! 그냥 마법에 걸린 채로 있어.”
당부를 하고 마우스에 올린 손가락을 지그시 누른다. 몸이 빨려 들어간다. 애니의 아바타들은 멀찍이 물러나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느껴진다. 애니다. 귀를 쫑긋 세운다. 움직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움직임과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이 잡히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어야 한다. 인터넷 속에서는 애니보다도 뫼 자신이 유리하다. 어찌됐든 자신의 세상이다.
하지만 애니도 만만치 않다. 뫼를 놓치지 않고 악착같이 따라붙는다. 생각이 한 곳으로만 흐른다. 몸에선 땀이 배어나온다. 땀을 닦으려 수건을 찾는다. 눈이 책상 위를 더듬는다. 수건을 쥐고 땀을 닦아낸다. 다시 눈길이 화면 속으로 돌아온다. 한데 없다.
“쥐새끼 같은 놈.”
욕이 나온다. 오늘은 졌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한눈 판 사이에 빠져나갔어?”
한눈? 팔았나? 분명 화면을 보고 있었다. 눈이라도 깜빡였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두 눈 멀쩡히 뜨고 당한 셈이다. 잡히기만 하면 짓이겨 주리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단단히 벼른다. 어쨌든 진 건 진 것이다.
“찾아 봐! 근처에 있겠지?”
소훈이 느긋하게 말한다. 애니의 실력이 애니민을 놓칠 만큼 만만하지 않다 믿기에 나오는 느긋함이다.
“한심한 소리 하지 마! 놈의 머리 몰라? 빠져나와야겠어.”
“그럴 거까지 있어?”
“그래서 넌 한심한 거야. 놈이 왜 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모르지?”
소훈이 멍하니 애니를 바라본다. 무슨 소리냐는 뜻이다.
“놈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인터넷을 누비고 다니는 것은? 우릴 노리고 있다는 뜻이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조작하지 않은 유전자는 변하지 않아. 두뇌가 꽉 차오르고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소훈은 이번에도 멍하다.
“점점 버거워진다는 소리야.”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 설마 하다가, 당하면, 그땐 어쩔 건데? 그때 백 번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어.”
“철저히 단속했어? 소리 통로는?”
소훈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내가 너인 줄 아냐? 이미 닫았어. 밥이나 먹고 오자!”
“그 사이 놈들이 일을 내면 어쩌려고?”
“놈들 잡겠다고 굶어죽을래? 잠시 풀어준다고 해서 도망가지 않아. 도망가 봤자 그 안이야. 아직은 내 머리를 따라올 수 없어. 그러니 빨리 나와! 나 배고파 죽겠어. 놈 잡겠다고 따라다니느라 힘도 죄 빠졌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따라 나서기나 해!”
애니가 신경질을 내며 닦달한다. 소훈이 겉옷을 걸치며 따라나선다.
애니가 화면을 떠났다. 뫼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다시 인터넷 속으로 잠수하듯 들어간다. 얼른 애니가 빠져나간 통로로 다가가 찬찬히 살핀다. 방화벽이 둘러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규모는 대충 짐작이 간다. 문제는 방화벽을 뚫는 것이다. 힘껏 밀어보지만 밀리지가 않는다.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힘으론 어려울 거 같다. 머리를 굴려야 한다. 힘을 많이 소모해서인지 머릿속도 몽롱해진다.
‘일단은 빠져나가자!’
머릿속이 멍하다. 머리를 흔들어 깨운다.
“왜? 오늘은 아무 일 없었어?”
마법에서 풀린 들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별일은? 놈이 지난 번 일로 아바타들에게 화가 안 풀렸어. 아바타들은 물리고 직접 나섰더라고. 나를 놓치고는 빠져나가더라. 따라붙어서 놈의 컴퓨터 입구까지 갔었어.”
“그래서?”
탈 없이 돌아왔다는데 마음을 놓으면서 호기심을 드러낸다.
“방화벽에 틈새가 없어. 빈틈없이 막혀 있어. 프로그램들이 지원해 주고 있어서 뚫는 것도 어려워. 외출한 틈을 타 들어 가보려 했는데 안 돼. 놈들이 외출한 지금이 딱인데...”
뫼가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프로그램들?”
“응. 프로그램들. 아줌마도 우리 망을 프로그램들로 빈틈없이 감싸놨잖아. 놈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말이야.”
“손으로 더듬어보지 그랬어.”
“그렇게도 해봤어. 내 손이 닿으면 열리지 않을까 해서. 한데 꿈쩍도 안 하더라고. 손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느낌도 없었어. 내 몸에 가상세계를 누비는데 필요한 정보들이 저장돼 있어서 닿으면 어지간한 것들은 그냥 열리는데 말이야.”
“한 번에 되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쭉 그래왔잖아.”
“이건 지금까지와는 달라. 프로그램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내 안에 그걸 풀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야.”
“안타깝긴 하지만 그건 다행이야.”
“들 말이 맞아. 시간이 좀 걸리면 어때? 니 몸속에 그런 게 있는 것보단 나아.”
버들이 울먹울먹한다. 뫼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뫼는 아쉽기만 하다. 어차피 모두의 짐을 짊어지도록 태어났다면 프로그램이 몸에 박히는 것쯤이야 생각한다. 화면을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인터넷에 있지 않을까?”
들이 뫼의 얼굴빛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들의 물음이 기폭제가 된다. 머릿속이 사정없이 꿈틀거린다. 해킹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온통 떠다닌다.
“있어.”
말이 짧다. 머릿속이 온통 해킹 생각으로 다른 걸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럼 하면 되잖아?”
들이 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돈이 없어서 살 수가 없으니까 방화벽을 뚫어서 훔쳐내야 해. 다들 방화벽으로 컴퓨터를 에워싸 놓고 있어. 해킹 차단 프로그램도 겹겹이 설치해 놨고. 만만히 볼 게 아니야.”
뫼가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생각한다. 될지 안 될지는 부딪혀 봐야 안다. 아직은 생각뿐이다.
“만드는 건 더 어렵겠지?”
들이 자신 없이 말한다.
“글쎄? 쉽지는 않겠지. 우선 인터넷을 뒤져보자!”
뫼가 다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해킹 관련 프로그램들을 하나하나 살핀 후 방법이나 기능을 알아볼 생각이다.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들이 포기하지 못하고 다시 주워든다.
“거기까진 아직. 하지만 해킹은 가능할지 몰라. 들어가서 한 번 알아볼게.”
뫼가 다시 인터넷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머릿속이 꿈틀대며 정보를 빨아들인다. 머릿속이 빵빵하게 차오른다.
“해킹도구가 엄청 많아.”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없어. 점점 접근하기가 까다로워지고 있어. 방화벽만 쳐놓은 게 아니야. 다들 정보를 요구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방문을 허용하고 있어.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감시하는 프로그램들도 수두룩하게 깔려있어.”
“그럼 불가능한 거네?”
“아니? 그래도 해킹을 당해. 해킹으로 거대한 기관이 마비되기도 했어.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야.”
“그렇게 불안전한데 왜 사람들은 사이버세계에 빠져들지?”
“정보망이 엄청 촘촘해. 속도도 엄청나고. 현실의 속도는 저리 가라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상 그 이상이야.”
뫼가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혀를 내두른다.
“너도 벌써 빠져든 거야?”
들이 넌지시 뫼를 바라본다. 뫼가 완전히 사이버 세상에 빠져 들었을까봐 걱정이 된다. 아무리 사이버 세상에 갇혀 살고 있다고 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가 살아낼 공간은 아니다. 현실로 나가고 싶다. 2013년이 아니라도 좋다. 카메라에 잡혀 사는 삶이 아닌 치대고 부대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이버 세상은 너무 열려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다. 그게 싫어서 지금 몸부림치고 있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아니?”
뫼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정보망이 촘촘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리고 그게 아무리 부러워도, 거긴 가림막이 없어. 우린 웃음거리밖에 안 돼. 사람들의 노리개일 뿐이야. 그건 아니야.”
들이 막혔던 숨을 토해낸다. 다행이다. 뫼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 줘서 마음이 놓인다.
“왜? 내가 어떻게 됐을까봐 걱정했어?”
“조금. 아니 많이.”
“그럴 일은 없어. 니가 없는 곳에 나 홀로 남겨지는 것은 싫어. 손 이리 줘봐!”
들이 뫼의 눈치를 보며 손을 내민다. 뫼가 들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손바닥을 펴게 한 다음 자신의 손바닥으로 훑는다. 들이 뫼의 얼굴과 손바닥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뭐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뫼의 얼굴에도 답은 쓰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