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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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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5

하루는 혜란이 집으로 가자마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몰라 큰방으로 들어가 보니 바닥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냐?”

아버지는 다짜고짜 말했다.

“이게 뭐냔 말이다!”

혜란이 편지를 집어 들려고 하자 아버지는 그걸 낚아채 패대기쳤다.

“봐야 알 거 아니에요?”

혜란도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건 만화 출판사에서 온 편지였다. 얼마 전 응모 요건은 못 갖추었지만 가능성만이라도 좀 봐 주십사 하고 그림을 부친 적은 있지만, 그렇게 빨리 답장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혜란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편지를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학생이 보내 준 그림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재능은 충분해 보입니다. 일차 상경하여 길을 모색해 보기 바랍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방이라 불리한 여건일 수도 있지만 모든 건 학생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원한다면 문하생 자리를 소개해 줄 수도 있습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기 바랍니다.’

기대 이상의 친절하고 희망적인 답장에 혜란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여태 뼈 빠지게 공부시켜 놨더니 이래 쓸데없는 궁리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서울이 네 눈에는 만만해 보이냐?” 가스나 혼자 겁도 없이.......“

“이것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부모님은 노발대발했다. 혜란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왜 남의 편지를 함부로 뜯어봐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이게 진짜로 돌았나보다!”

아버지는 혜란의 뺨을 때렸다. 혜란은 입을 앙다물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웬일인지 엄마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아이고 혜란이 아버지, 이게 때린다고 될 일이에요? 살살 말로 달래야지. 혜란아, 너, 인생이 뭐 별 거 있는 줄 아니? 여자의 행복이란 진짜로 단순하단다.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 너 지금 사는 게 구질구질하다고 실망할 거 없다. 조신하게 직장 잘 댕기다가 남자 하나 잘 만나면 그때부터 네 인생은 활짝 피어난다.......”

그래서 엄마 인생은 요 모양 요 꼴이냐고 묻고 싶은 걸 혜란은 꾹 참았다.

“이런 쓸데없는 짓 한 번만 더 했다가는 평생 다리병신으로 살 줄 알아라!”

아버지는 최종 결론을 내리며 편지를 발기발기 찢었다. 혜란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어떻게든 구슬려 보려던 게 먹히지 않자 혜란의 등에다 대고 다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순간 혜란은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보란 듯이 집을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혜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귀를 막고 참는 것뿐이었다.

설핏 잠이 든 혜란이 깨어났을 때는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이었다. 혜란은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곤 아버지가 찢어 버린 편지를 쓰레기통에서 찾아내 하나하나 다시 붙였다.

 

이래저래 기가 꺾인 혜란은 일단 취업부터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어디든 귀 수술비를 벌 만큼만 다니자, 그런 다음 가뿐하게 서울로 가자.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지금껏 눈앞을 가로막던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혜란은 부지런히 취업보도실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취업보도실 옆 게시판에는 주로 중소기업의 구인 광고가 빽빽이 붙어 있었다. 혜란은 어디든 자신을 받아 주기만 한다면 갈 생각이었다. 한시적으로 다닐 거니까 근무 조건 같은 걸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눈높이를 한껏 낮추었는데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한번은 최종 후보까지 갔다가 막판에 떨어졌다. 그때 취업과장선생이 말했다.

“넌, 취직하고 싶으면 일단 안경부터 콘택트렌즈로 바꿔!”

그러던 어느 날 천금 같은 기회가 왔다.

금융 기관은 대부분 전 학년 성적을 요구하는데, 가장 최근의 성적, 즉 3학년 1학기 성적만 보겠다는 N은행의 원서가 혜란의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후보자 세 명을 찬찬히 훑어보던 취업과장선생의 눈길이 혜란이한테서 딱 멈췄다.

“넌 아직도 안경 안 벗었냐? 머리 꼴은 그게 뭐고? 오늘 당장 머리부터 잘라. 알았어?”

콘택트렌즈는 비싸서 아예 엄두도 못 내고, 돈이 아까워 방치하기만 한 머리도 한창 지저분해질 때였으니, 혜란은 이래저래 취업과장선생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혜란이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취업과장선생은 양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성적이 되니까 주긴 한다만 아까운 원서 한 장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취업과장선생의 표정은 딱 그것이었다.

취업과장선생은 의자에 후보자 세 명을 앉힌 다음 필기시험과 면접에 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방법, 면접 때의 복장과 응대 요령 등을 꽤 오랜 시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합격시키려는 취업과장선생의 열의와 진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또 몇 명을 취업시켰느냐 하는 걸로 업무 성적이 매겨질 취업과장이란 직책의 중압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혜란은 선생이 자기한테 깐깐하고 퉁명스럽게 굴었던 것도 다 이해하기로 했다. 교육을 마치고 난 뒤 취업과장선생은 일일이 악수를 하며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엄마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돈을 구해 왔다.

공납금을 비롯하여 학교에 내야 할 돈이 밀려 있을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엄마는 옷가게 주인에게 우리 딸이 은행에 면접 갈 때 입을 옷이니 잘 좀 골라 달라고 뻐기듯이 말했다. 옷가게 주인이 아유, 좋으시겠어요. 축하해요, 라고 한 마디 해 주자 엄마는 벌써 합격이라도 된 듯 으스댔다. 거울 앞에서 몇 벌 입어 본 끝에 까만색 정장과 속에 받쳐 입을 하얀 블라우스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무난하다 못해 하품이 날 만큼 밋밋한 스타일이었다. 3센티 정도 굽이 있는 까만색 구두도 샀다. 엄마는 혜란이 원한다면 돈을 더 빌려서 콘택트렌즈도 장만해 주겠다고 했다. 혜란은 갑자기 안경을 벗으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 같다며 거절했다. 엄마는 합격만 하면 그깟 비용쯤은 한방에 해결될 걸로 믿는 모양이었지만, 혜란은 떨어진 뒤의 후폭풍을 더 겁내고 있었다.

마침내 필기시험을 치른 다음날 혜란은 면접을 보기 위해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처음 입어 보는 정장 치마에 처음 신어 보는 스타킹이며 구두까지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겨우겨우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려니 미장원에서 드라이한 머리가 헝클어질까 봐 목을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버스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아 혜란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서 있어야 했다.

시내에 있는 N은행 본관 복도에는 벌써 수십 명의 지원자들이 와 있었다. 다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곧 면접이 시작되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한 사람씩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여섯 개의 책상이 디귿자 형태로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들어가는 순서대로 자리를 옮겨 가며 여섯 명의 면접관들과 대면하는 식이었다. 시사, 상식, 문학,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질문이 던져졌다. 취업과장선생이 미리 내준 예상 질문지 덕택에 혜란은 별로 막히는 것 없이 술술 답변할 수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면접관 앞에 섰다. 그는 인상이 좋았던 앞의 다섯 명과 달리 차가운 표정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체중이 좀 나가나 봐요? 몇 킬로예요?”

그는 혜란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말했다. 어떻게 그 몸으로 은행에 취직할 생각을 다 했어요? 혜란의 귀에는 그 질문이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몇 킬로를 줄여서 말해야 할지 분주히 고민하면서도, 은근슬쩍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기가 눌려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도 많이 나쁜 것 같고. 근데, 공부는 좀 했나 보네?”

그는 어차피 혜란의 대답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서류를 뒤적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수치심과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혜란은 어쨌든 취업과장선생이 일러준 대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됐으니까 나가봐요.”

혜란은 벌써 다음 면접자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혜란이보다 먼저 면접을 보고 나온 같은 학교 애들 두 명이 휴게실 창가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취미가 뭐냐기에 탁구라고 했더니 입사하면 한판 붙자고 하는 거 있지?”

“난 커피 심부름 같은 거에 거부감이 없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어.”

둘의 얘기를 잠깐 듣고 있다가 혜란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와 버렸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온몸을 옥죄고 있는 옷이며 구두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며칠 후 결과가 왔다. 혜란은 떨어졌고 탁구가 취미라던 그 아이는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