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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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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7

정우오빠는 정말 걷는 게 목적이었던 사람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혜란은 두세 걸음 뒤처져서 조용히 따라 걸었다. 큰 키에 어깨가 축 처진 정우오빠의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 혜란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우오빠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혜란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혜란과 눈이 마주칠 때면 다정하게 웃어 주기도 했다. 정우오빠의 몸짓과 눈짓 하나하나에 혜란의 마음은 녹아내리기도 했다가 터져 버리기도 했다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네? 우리 어디 가서 밥이나 먹고 헤어지자.”

혜란네 집이 가까워졌을 때 정우오빠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 아니에요.”

“가자. 내 배가 고파서 그래.”

정우오빠는 혜란의 손을 잡았다. 순간 혜란은 온몸이 감전된 듯 정신이 멍해졌다. 자퇴한 혜란을 위로하러 왔던 지난겨울에도 정우오빠는 춥다고 손을 잡아 주었었다. 그게 벌써 일 년이 훨씬 지난 일이 되었는데도 그때의 떨림은 어제처럼 생생한데 또 손을 잡으니 심장 박동은 배로 뛰었다.

“손이 차구나.......”

정우오빠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혜란의 손을 꽉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혜란은 너무 떨려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분식집 간판이 조금만 늦게 나타났으면 심장 마비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으면서 정우오빠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을 땐 또 어찌나 아쉽던지 혜란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혜란이 뭘 먹을지 고르질 못하니까 정우오빠는 메뉴판에 있는 대로 이것저것 시켰다.

“너무 많은데요.......”

“많이 먹어. 내가 언제 또 너한테 이런 걸 사 주겠니?”

혜란은 정우오빠가 건네준 젓가락으로 후루룩거리며 우동을 먹었다. 사실 배도 고팠지만 정우오빠의 시선을 피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정우오빠는 떡볶이를 몇 개 집어 먹었을 뿐 젓가락질이 활발하지 않았다.

“오빠 배고프다고 했잖아요, 왜 안 드세요?”

“그러게. 이상하게 배는 잔뜩 고픈데 막상 먹으려 하면 먹히지가 않네.”

어쩐지 그 말이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혜란은 심각한 티를 안 내려고 더 부지런히 먹는 데만 열중했다. 정우오빠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혜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에 영화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정우오빠의 눈동자에는 혜란이 없었다. 그저 무연히 허공의 한 지점을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혜란은 가만히 정우오빠를 쳐다보았다. 그는 뭔가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몇 초를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정신이 돌아온 듯 정우오빠는 물을 마셨고 혜란은 재빨리 젓가락질로 돌아갔다.

“혜란아.”

“네?”

“너 왜 나한테 편지 안 썼어?”

혜란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돌발적인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편으로는 그 말이 어쩐지 자신의 편지를 기다렸다는 뜻으로 들려서 마구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혜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루에 백 통이라도 쓰고 싶었다고, 그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너 나한테 실망 했지?”

“네?”

“알고 있잖아? 내가 시험 포기한 거. 근데 왜 아무 것도 안 물어봐?”

“무, 물어볼 게 없는데요.......”

“그래? 흠, 아무런 관심도 없었단 말이지?”

정우오빠는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혜란은 진짜 자기 마음을 보여줄 수가 없어 울고만 싶었다. 혜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빈 우동 그릇만 휘휘 저었다. 정우오빠도 더는 말이 없었다. 어색해진 두 사람과는 달리 다른 테이블들은 시끌벅적했다. 그중에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확실히 알려주는 바구니가 놓인 테이블도 있었다. 혜란은 그제야 자신의 가방 속에 숨겨 둔 초콜릿을 떠올렸다. 족히 몇 만원은 돼 보이는 화려한 그 바구니에 비하면 자기 것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혜란은 절대 그걸 정우오빠한테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정아가 없으니 줄 방법도 없었지만.

“참, 넌 어때? 학교 다시 다니는 거 힘들지 않아?”

“그냥, 그럭저럭.......”

“소정이랑 같이 입학해 놓고 한 학년 처지니까 기분이 안 좋지?”

“조금........”

“나도 그래. 내 친구들은 벌써 이학년 되고 입대한 애들도 있는데, 나만 삼 년째 이러고 있잖아.”

“올해는 꼭 잘 될 거예요.”

정우오빠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혜란은 너무 판에 박힌 대답을 한 것 같아 곧 후회했다. 정우오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질수록 후회도 더욱 커져 갔다.

“다 먹었으면 그만 나갈까?”

정우오빠가 계산을 하는 동안 혜란은 밖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가게를 나오던 정우오빠는 혜란을 향해 웃어 주었다. 뭔가를 크게 잘못한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의 미소를 보니 혜란은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또 남들 눈에는 두 사람이 커플로 비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히 황홀하고 우쭐했다.

마침내 헤어질 순간이 왔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네.......”

혜란의 입에선 선뜻 인사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우오빠는 이미 혜란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 빨리 그를 붙잡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절대 안 된다고 외쳤다. 그 둘이 다투는 동안 정우오빠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혜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기요, 오빠!”

정우오빠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혜란은 정우오빠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우오빠의 깊은 눈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혜란은 말없이 가방을 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꼭 남의 가방을 뒤지는 기분이었다. 혜란이 초콜릿 상자를 내밀자 정우오빠는 흠칫 놀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이거 먹고 힘내시라고요.......”

정우오빠는 상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거, 임자가 따로 있었던 거 아니야?”

“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냥 주는 거란 말이지?”

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른 뜻은 하나도 없고?”

“네.”

정우오빠는 무어라 중얼거리며 상자를 받았다. 이거 섭섭한 걸, 혜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정우오빠는 상자를 꼼꼼히 훑어보는 내내 미소를 지었다. 내리깐 그의 긴 속눈썹에 혜란의 마음은 다시금 세차게 요동쳤다. 혜란은 정우오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요, 저 오빠한테 실망 안 했어요. 절대로요.”

정우오빠는 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가 아하, 하고는 웃었다.

“근데 왜 그랬는지 궁금하기는 해요.”

“왜 그랬겠어? 자신 없으니까 도망친 거지.”

정우오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무나 선선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해 버리니까 마음이 더 아팠다.

“이건 두고두고 아껴 먹을게. 고맙다.”

정우오빠는 상자를 한 번 흔들어 보이곤 돌아섰다. 그리고 이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혜란은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걸음을 떼는 순간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다. 혜란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좀 전까지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김질했다. 꿈이 아니었다. 생생한 현실이었다. 가슴이 펄떡펄떡 뛰면서 감격의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순식간에 마음이 싸하면서 허전해졌다. 자신 없어서 도망쳤다는 정우오빠의 말과 쓸쓸한 뒷모습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