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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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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3

“우리 내일 만날까? 난 명절이 진짜 싫어. 너무 심심해.”

추석 전날, 다들 신이 나서 가방을 싸는데 정아는 시들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허락할지 모르겠네....... 그리고 명절 같은 날은 원래 집에서 보내야 되잖아?”

“아휴, 또 고리타분한 소리 한다. 이런 날은 그냥 맘껏 싸돌아다니라고 있는 거야. 근데 넌 아직도 꼬박꼬박 허락 받고 다니니? 그냥 나오면 되는 거 아냐?”

정아는 혜란의 손바닥에 자기 집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다음날 혜란은 차례 상 차리기를 비롯하여 모든 일에 아주 열성적으로 덤벼들었다. 일단 할 일을 다 해 놓고 나가도 되는지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혜란이 한참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뜻밖에도 수연이였다. 수연이는 식용유 선물 세트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혜란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 소리만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혜란아, 잘 지냈어? 놀랐지? 난 명절 되면 선물 사 들고 이 집 저 집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더라. 그래서 나도 올해는 흉내 좀 내 보려고.”

둘 사이에 언제 공백기가 있었냐는 듯 수연이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유창한 달변 또한 여전했다. 부모님은 딸한테서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수연이의 애교에 마냥 미소를 지었다. 수연이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혜란은 대답 대신 엄마를 쳐다보았다. 수연이에게 홀려서인지 선물 세트 때문인지 엄마는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혜란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사실 수연이를 보는 순간 맨 먼저 스친 것은 정아와의 약속이었다. 오랜만에 수연이가 찾아왔는데도 정아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운다는 사실이 혜란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수연이한테 더 반가운 척을 했다.

혜란은 수연이와 함께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수연이는 새로 장만한 듯한 투피스에 구두까지 신어 꼭 아가씨처럼 보였는데, 혜란은 칙칙한 옷차림이어서 그 옆에 나란히 서 있기가 좀 창피했다. 그리고 지난 일도 생생하게 떠올라 수연이를 대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하지만 수연이는 계속 만나 왔던 사이처럼 능청스럽게 혜란을 대했다. 수연이의 그런 시원시원한 성격은 정말 탐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연이의 단점 또한 여전했다. 수연이는 전에 봉제 공장에 다닐 때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 자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와 동료들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시간을 다 잡아먹었다. 조만간 또 다른 데를 알아볼 예정이라기에 혜란은 웬만하면 한 군데에 좀 정착하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난 역마살이 끼었나 봐. 일단 한번 아니다 싶으면 더는 붙어 있을 수가 없으니까. 어쩌겠어? 이렇게 살다 죽어야지 뭐.”

진지하게 얘기를 해 줘도 성의 있게 받아들일 줄 모르는 태도 역시 그대로였다. 극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혜란은 벌써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수연이는 성룡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줄이 많이 밀려 있었다. 결국 표를 끊긴 했지만 다음 회까지 기다려야 했다. 혜란은 다른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수연이가 돈을 냈으므로 꾹 참아야 했다. 둘은 극장 대기실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혜란은 가장 궁금했던 걸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됐어?”

“뭐? 아 그거? 옮긴 공장에서 가불 땡겨서 병원 갔지 뭐.”

“괜찮아?”

“뭐가?”

“네 몸이나 기분 같은 거.......”

“괜찮지 그럼, 안 괜찮음 뭐 어쩌겠어?”

수연이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해 버리니까 혜란은 지금껏 그 일로 미안해하고 신경을 써 왔던 게 괜히 억울했다. 그리고 매사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처리해 버리는 수연이가 마음에 안 들었다. 깊은 속마음까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둘은 시내를 쏘다녔다. T시에 있는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처럼 거리는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혜란은 그런 장소가 어색하고 불편한데 수연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했다. 가게에 걸려 있는 옷이나 구두를 보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길거리 노점에서 액세서리 같은 걸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수연이는 배가 고프다며 경양식 집으로 쑥 들어갔다. 혜란이 그런 집은 비쌀 거 같다며 망설이자 수연이는 자기가 살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누가 돈을 내든 두 사람의 형편에 비해 버거운 곳이란 뜻이었는데, 괜히 자기만 궁상떠는 꼴이 돼 버려서 혜란은 씁쓸한 마음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거기서 혜란은 처음으로 돈가스라는 걸 먹어 보았다. 후식으로 하얀 찻잔에 담겨 나온 커피를 마실 때는 어쩐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 먹고 나오면서 혜란이 계산을 하겠다고 하자, 수연이는 학교 다니는 애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하며 먼저 지갑을 꺼냈다. 문제는, 그런 수연이가 고마워야 하는데 솔직히 그런 맘이 안 생긴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왜 수연이는 있으면 있는 대로 돈을 펑펑 써 버리는 건지 답답하기만 했다.

수연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 9시가 다 돼 있었다. 낮에 선선히 보내 줬던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명절날 계집애가 집에 안 붙어 있고 어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느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고모가 다녀간 건 그렇다 쳐도 오빠들 가는 것까지 못 본 건 자기도 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혜란은 얌전하게 욕을 먹었다. 

“그리고, 수연인가 하는 걔, 다시는 못 오게 해라. 학교도 안 다니고 공장에나 다니는 그런 애하고 어울려 봤자 너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다. 걔는 집도 절도 없다면서? 그런 애랑 친구 해 갖고 뭐 어쩌려고?”

“수연이가 어때서요? 나는 뭐 공장에 안 다녔어요?”

다 좋은데 엄마가 마지막에 수연이를 들먹이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혜란은 엄마한테 팩 쏘아 주고 작은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자기도 종일 떨떠름하게 대했으면서 엄마가 수연이를 막 대하는 건 왜 그리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