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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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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31

6월 20일, 월급날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그날 이후 수연이는 남자한테 쏟던 애정과 관심을 모두 혜란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그게 다 계산된 행동 같아서 혜란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월급날 당일은 더 살갑게 굴었다. 아침에 일찍 와서 일할 준비도 혼자 다 해 놓고, 점심때는 밖에 나가서 하드까지 사다가 몰래 혜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문을 닫으면 찜통이 되는 탈의실에서 하드를 먹었다. 하지만 듬성듬성 굵은 팥까지 섞여 있는 달고 시원한 하드였음에도 혜란은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우리 이번 일요일에 소풍 갈까? 김밥은 내가 쌀게. 넌 몸만 와.”

수연이가 말하는 것만 봐서는 이미 돈을 빌려 주기로 결정이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지 않고선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혜란은 퇴근할 때 말하려던 걸 지금 당장 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수연이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수연아.......”

“응?”

“수연아, 미안해. 우리 엄마가 안 된대.......”

혀로 장난스럽게 하드를 핥아 먹던 수연이는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정말 미안해.......”

“동수엄마한테 말해 보는 건 어때?”

“좀 쌀쌀맞긴 해도 네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줬으니까.......”

“이번에도 잘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혜란은 분위기가 너무 조용한 게 두려워 억지로 이것저것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수연이는 그 자세로 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쯤 하던 수연이가 침묵으로 일관하니까 혜란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결국 혜란도 더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답답한 탈의실이 더 후텁지근했다.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 나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혜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연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안 가?”

“먼저 가.......”

수연이 손에 들려 있는 하드에서 팥물이 뚝뚝 떨어졌다.

 

다음날 수연이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가 되자 혜란은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점심시간에 동수엄마가 다가왔다.

“너 혹시 수연이 어디 사는지 아니?”

“예? 저, 저는 모르는데요.”

“진작에 잘라야 되는 걸 꾹 참고 봐 줬더니만, 이젠 무단결근까지 해? 이게 말이 되니?”

“아, 아파서 못 나온 게 아닐까요?”

“암만 아프기로서니 손모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닐 텐데, 전화 한 통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니? 가불 있는 대로 당겨 쓸 때 진작 눈치 챘어야 했는데.”

동수엄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웃음 살살 칠 때부터 알아봤다는 둥, 그런 애는 이런 데서 진득하니 일할 애가 아니라는 둥, 꼴 보기 싫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는 둥, 여기저기서 온갖 험담들이 터져 나왔다. 수연이는 졸지에 세상에서 가장 난잡하고 몹쓸 애가 돼 버렸다. 혜란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으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날 퇴근하고 혜란은 곧장 수연이 방으로 가 보았다. 녹슨 대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었지만 수연이의 방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마침 옆방에 세 들어 사는 아줌마가 나오기에 혜란은 수연이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그 아가씨, 월세가 석 달이나 밀려서 쫓겨났어. 주인이 더는 사정을 못 봐 준다니까 대판 싸우고는 옷가방만 챙겨 그날 밤으로 날라 버렸어.”

월세까지 밀린 줄은 몰랐다. 아무리 씀씀이가 헤프고 남자한테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대책 없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혜란은 문득 수연이가 봉제 공장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수연이는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왔었다. 어쩌면 수연이는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 몸에 밴 게 아닐까. 일이 좀 꼬인다 싶으면 훌쩍 떠나 버림으로써 책임을 회피해 버리는 방식까지 말이다. 혜란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기 몸 갖고 어딜 가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이렇게 지저분하게 일을 벌여 놓고 가는 건 이해가 안 되었다. 만약 자기가 돈을 빌려 주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니 혜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연이한테 임신 고백을 들은 이후 잠까지 설쳐 가면서 혼자 끙끙댔던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차피 엄마 때문에 돈을 빌려 주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여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한 데다 수연이한테 안 된다는 말은 또 어떻게 전할까 싶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그날 점심때 수연이한테 안 된다고 말해 놓고 마음 졸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수연이는 그날 퇴근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간이라도 빼줄 듯 친절하다가 얼음으로 돌변해 버린 수연이를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자기만 믿고 있다가 일이 어긋나 버렸으니 그럴 만하다 싶다가도 혜란은 마음이 서운하고 쓰라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수연이가 결근했을 때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하루 이틀 지난 뒤 얼굴을 보면 좀 나을 것 같았다. 혜란은 수연이가 다시 출근하면 두고두고 잘해 주면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었다. 하지만 수연이는 그런 혜란을 비웃기라도 하듯 돌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연이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혜란은 그동안 수연이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혜란의 일상은 다시 무기력하고 지루해졌다. 수연이보다 그래도 자신의 처지가 좀 낫다 싶었던 생각도 쏙 들어갔다. 족쇄를 채운 것처럼 한 군데서만 붙박여 사는 자신보다 어디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수연이의 삶이 혜란은 더 멋있어 보였다. 더구나 수연이는 실연의 아픔과 임신이라는 이중고까지 떠안지 않았던가. 겁 많고 소심한 자신에 비하면 수연이는 너무나 용감하고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혜란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