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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27

지독한 감기 몸살은 꼬박 열흘을 갔다.

겨우 기운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연말이었다. 혜란은 밤 9시에서 10시까지 하는 FM 영화음악 애청자였는데, 연말 특집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음악 100선’은 특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드디어 12월 31일, 최고 순위가 발표되었다. 러브 스토리, 금지된 장난, 라스트 콘서트, 로미오와 줄리엣, 필링 러브 등이 5위권 안에 들었다.

일등을 한 ‘러브 스토리’가 잔잔하게 흘러 나왔다. 음악 시간에 소정이랑 그 곡을 따라 불렀던 게 생각났다. 그때 소정이는, 눈 덮인 센트럴 파크에서 주인공들이 뛰놀 때 흐르던 ‘눈 장난’ 이란 음악이 더 좋다고 했었다. 영화를 못 봤으니 혜란으로선 그게 어떤 곡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날 ‘러브 스토리’에 이어 ‘눈 장난’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경쾌한 기타 소리에 악기처럼 어우러지는 여자의 청량한 음색이 단숨에 혜란을 사로잡았다.

문득 소정이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지금까지 정우오빠 생각만 해 왔던 게 괜히 미안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정이만 생각하면 따라붙는 알 수 없는 경계심과 거리감은 여전했다.

 

1985년 1월 20일, 두 번째 월급을 받았다.

구만 원이 들어 있었다. 하루 일당 이천팔백 원씩 계산해서 결근 없이 한 달 꼬박 일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이제부터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매달 그 금액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혜란은 자신의 앞날이 그 알량한 월급 몇 푼에 영영 매여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첫 월급 때는 붕어빵이라도 사 들고 갔는데 이젠 그럴 기분도 안 생겼다.

엄마는 일 년에 백만 원을 모으려면 매달 팔만 원씩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혜란의 몫으로 남는 건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이었다. 하지만 적금을 넣어야 귀 수술도 하고 복학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만원은 최소한의 생필품만 사서 쓰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결국 책을 산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신발 같은 걸 사 신는다는 건 여전히 사치스런 꿈으로만 남았다.

이제 혜란의 임무는 적금을 다 넣을 때까지 죽어라 일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몸에서 탈이 났다. 귀야 워낙 만성이 되어서 제쳐 둔다 해도 봉제 공장에 들어간 이후로 달고 살게 된 호흡기 질환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수시로 목이 붓고 코는 헐다 못해 피까지 났다. 일은 하나도 안 힘든데 아픈 코로 매일 더러운 먼지를 들이켜야 한다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

“넌 어째 멀쩡한 데가 하나도 없냐? 하여간 덩칫값도 못한다니까.......”

코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혜란을 볼 때마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찼다.

몸이 부실해서 그런지 정신적인 불안정도 만만찮았다. 혜란은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못살게 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아 애가 탔다. 열심히 일도 하고 적금도 들고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항변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돈을 버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위해, 지금 현재 뭔가를 도모하고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이 혜란을 짓눌렀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뭔가를 하기엔 시간도 의지도 체력도 모두 바닥난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혜란은 일단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일분일초를 아껴 쓰면 적어도 극심한 자학에선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요일은 평일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목욕을 다녀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만화를 그렸다. 라디오도 열심히 들었다. 물론 갑작스런 무기력에 사로잡혀 하루를 그냥 날려 버릴 때도 있었지만, 순간순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본 마음가짐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냈건 대충 보냈건 잠자리에 들 때마다 허무해지는 건 똑같았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이야! 혜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다.

 

드디어 소정이의 편지가 왔다.

언제나처럼 퇴근해서 작은방 문을 열었는데 방바닥에 연두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대입 시험일로부터 두 달을 훌쩍 넘기도록 소식이 없다가 이제야 온 것이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혜란은 지난 두 달 동안 자신의 마음이 그토록 뒤숭숭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애써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혜란은 매일매일 소정이의 편지, 즉 정우오빠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에 지치다 못해 슬슬 화가 나다가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편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혜란은 선뜻 봉투를 뜯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큰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편지 생각뿐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뜯어볼 용기가 생긴 것은 잠자기 직전이었다. 필체에도 표정이 있는 것일까, 항상 명랑하게 보였던 소정이의 글씨가 이번에는 아주 우울하게 다가왔다. 결국, 안 좋았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정우오빠가 S대에 실패했고, 재수가 결정됐으며, 식구들 모두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극복하는 중이라고, 소정이는 담담하게 적고 있었다. 혜란은 편지를 다 읽기도 전에 명치를 세게 맞은 것처럼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 채 편지를 기다릴 때가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성적이 특별히 나쁘게 나온 것도 아닌데, 아마 운이 없었던 것 같아. S대만 아니면 웬만한 대학은 다 갈 수 있는 성적이고, 오빠도 어디든 가길 원했지만, 아버지는 바로 재수를 결정해 버렸어. 오빠는 싫은 눈치였지만 크게 거부하진 않았어. 대신 전보다 더 말이 없어지고 분위기가 좀 살벌해졌지. 아, 방학이라고 재미는 하나도 없고, 되는 일도 없고, 시간이 빨리 가 버렸으면 좋겠어.......’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소정이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는 대단했었다. 저녁 먹고 잠깐 쉬었던 것 갖고도 온 식구가 쩔쩔맸는데 하물며 대입 시험에 떨어졌으니 그 눈치와 압박감은 오죽할까. 더구나 재수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지겹고 끔찍했다. 혜란은 그런 정우오빠한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너무 기가 막혔다. 대학에 합격하면 그 핑계로 편지를 쓰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이젠 그것도 어렵게 돼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