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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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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한 걸음씩


BY 문해빈 2012-11-06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연수가 두 눈을 말똥거리며 영우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영우는 연신 웃기만 할 뿐이다. 기분이 좋아 웃었고, 또 자신을 향해 예쁜 두 눈을 깜박거리는 연수가 있어 행복했다.

 

 

“월요일에 그 분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군요.”

“그렇지. 이제야 알아들은 모양이군.”

 

 

 

영우는 최도윤 씨가 허락을 했다는 말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연수는 믿지 않았다. 갑자기 방송이 개편되고 진행자가 바뀌게 되어 한 번 더 녹화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다른 연예인이나 개성 있게 살고 있는 일반인들은 방송의 힘을 알기에 조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감정만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기에 조용히 응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최도윤이란 남자만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 방송 하지 말자고 했기에 연수도, 영우도 속이 타 들어갔다. 그런 남자가 허락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은 월요일에 찾아 갈 계획이었지만 먼저 영우에게 전화가 걸려 왔기에 이 기쁜 소식을 연수에게 알리고 싶어 아침 이른 시간부터 전화를 해서 연수를 불러내었다.

 

 

 

 

“잘 되었지?”

“잘 되었네요. 그러니까 부분 편집만 하는 조건으로 해서 방송을 하기로 했다는 거네요.”

 

“응. 정말 잘 되었지? 만약에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 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기로 하려고 했는데······. 좌우지간 잘 되었어. 너도 기쁘지? 그 분, 방송타면 우리 프로가 시청률이 제일 많이 나올 거다. 그 나이답지 않게 인상도 좋고, 훈남이잖아. 더욱 그 시간대라면 거의 주부들을 시작으로 해서 여자들이 전부이거든.”

영우는 순조롭게 방송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아 연신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네.”

“누구 또 올 사람, 있어요?”“응. 이석민 아나운서!”

“이 아나운서도 오기로 했어요?”“소식을 전했더니 그로서도 기뻤는지 점심이나 함께 먹자고 하더군. 그래서 연수를 만난다고 하니까 합류를 하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그랬군요.”

 

 

연수는 짧게 대답을 할 뿐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많이 늦네. 배고프지?”

“아니요. 두유를 마시고 나왔어요.”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어머니표 두유구나.”

“네.”

“넌 여전히 대답이 짧아.”

“······.”

 

 

영우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연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 웃어요?”

“내 마음이다. 내가 잘 웃는 거 어제 오늘 본 거 아니면서 괜한 트집이다. 너 혹시 지금 우리 둘만 있으니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봐 그게 두려운 거지. 그래서 더 말도 없고, 더 굳은 표정을 보이는 거지.”

연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물만 마시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다. 그래. 그게 윤연수의 매력이지. 그런데 어젯밤, 잠을 자지 않았어?”

“왜요?”

연수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영우의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진짜 얼굴이 이상한 것인가 싶어 양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반쯤 감겨 있네. 내가 너무 일찍 깨웠나?”

“한 시간 정도 잤어요.”

“한 시간! 잠 안자고 뭐했는데? 가만, 어머니하고 그동안 하지 못한 얘기를 한다고 자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내가 방해물이군.”

“그런 거 아니에요. 사실은······ 문제를 만들고 나왔거든요.”

 

“문제? 무슨 문제?”

 

 

연수는 입술을 움직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 남자, 무슨 마력을 가진 남자도 아니고 이 남자 앞에만 있으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좋아 그냥 오빠처럼, 친한 선배처럼 믿고 따르게 되는 건지 모르지만 함께 있다 보면 어려운 점, 힘든 점을 다 얘기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속에 있는 얘기들을 이 남자에게 얘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사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연수는 답답함을 조금은 풀고 싶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 남자와 얘기를 한 것은 절대로 밖으로 새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편한 상대를 만난 연수는 나누고 싶었다. 혼자 해결하기엔 버겁고 힘들었다. 잠도 자지 못할 만큼 힘들었기에 머리도 아파왔고 눈도 아파왔다. 과연 장녀가 되어 잘 하는 것인지, 점점 헷갈렸으니까. 부부가 사랑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인혁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것은 너무나 차가운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눈빛치고는 차가웠다. 그다지 정 있게 지내 온 부녀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번 이혼 문제에 딸이 개입한 것을 알고서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내내 신경 쓰였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이혼을 시키고 싶었다. 두 사람은 이혼을 하는 것이 덜 원수가 되는 것이니까. 이미 올 때까지 온 두 사람은 이제 여기서 종착점을 맞이해야 한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남자, 금방 화를 내며 이혼을 부르짖던 여자는 시간과 함께 남자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 그게 또 맞는 가 싶어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또 살아가고 있었다. 그 세월이 이미 수십 년이 되고 있었지만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랑이 아니면 서로를 향한 신뢰라도 있어야 하지만 두 사람에겐 그것조차 없어 보였다. 남자는 하늘 위에서 군림만 하고 있었으며 여자는 하녀처럼 종속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두 사람들이다.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은······ 애완동물은 사랑이라도 받고 살지만 이지영은 애완동물조차 되지 못했다. 그저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였으며 한 번씩 바라봐 준다면 그것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발악하는 여자였다.

 

 

지금이라도 엄마가 아닌, 아내가 아닌, 며느리가 아닌 여자로서 인정받고 세상을 향해 살아가는 이지영이란 여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엄마보고 이혼을 하라고 했어요.”

“······!”

 

 

 

영우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다가 앞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마셔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늦더위에 곰탕집으로 데리고 온 거부터 문제였는지 여기저기서 끓고 있는 뚝배기에 담긴 각종 탕 종류를 보면서 땀이 나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왜 갑자기 땀이 나는지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 나가자 연수가 웃었다.

 

 

다른 어떤 말을 해도 잘 웃지 않는 여자가 지금은 웃는 다는 게 영우로서는 눈동자를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힘들기만 할 뿐이다. 처음 입사를 한 여자를 한 눈에 보고 반해 늘 주위를 맴돌면서 정성을 들였지만 냉정하고 차가운 여자는 선을 분명히 그은 채 어떤 시도를 해 와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동료나 선배 이상은 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남자 때문에 한동안 이상한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 소문은 곧 잠잠해져 갔다. 그 이유는 영우의 연수를 위한 숨은 배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영우는 소문이 나는 그 시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개그맨이 되어야만 했다. 원래 성격 좋고 소탈한 면이 많았지만 더욱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냈으며 남자와 여자란 경계선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5년이나 하고 있었다면 이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개그맨이 되어야만 하는 남자의 시린 마음을 알기는 한 것일까. 그저 마음 좋고 일 잘하는 선배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속마음을 다 얘기해도 다 들어주는 착하디 착한 오빠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옆에 있고 싶은 사람은 영우였다. 처음엔 부담을 느껴 자신을 피하는 것이 싫었기에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 한솥밥을 먹으면서 일도 하고, 회식도 하고, 또 다른 프로그램을 같이 해 나갔다. 진짜 동료가 되었고, 진짜 친구가 되어 버렸으니까. 단 한 가지, 연인 사이만 제외되었을 뿐이다.

지금도 이 여자는 가정사를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가벼운 수다치고는 가장 어려운 이야기였다. 달리 얘기한다면 그만큼 박영우라는 남자가 만만하고 부담 없는 것일까. “선배, 놀랐구나. 괜히 얘기했죠. 나도 그만하고 싶어요. 아직 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어요.”

연수는 멋쩍은 표정과 함께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날에는 이런 미소를 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지금은 어지간히도 머릿속이 복잡하긴 복잡한 모양이다.

 

 

 

“놀랄 일은 아니구······. 아니다. 놀란 것은 사실이다. 부모님의 이혼이 아니라 거기에 네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 놀라게 한다고 해야겠지.”

“그렇죠?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는 잘 없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딸이 부모님의 이혼을 도우는 경우는 없겠죠. 내가 생각해도 착하고 좋은 딸은 되지 못하는 가 봐요. 그것도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가 싫니? 무서워?”“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잘 모르겠어요.”

연수는 자꾸만 웃을 뿐이다. 다른 날과 달리 입술에 모여 든 신경들이 미세하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잤기 때문일 것이다. 잠은 사람의 뇌를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지금 연수는 평소와 달리 조금은 다른 여자로 보였으며 혼자 해결하기엔 지독히 복잡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영우는 조용히 들어 줘야만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이 여자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이 나올 거 같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늦네. 무슨 일이 생겼나? 전화라도 해 봐야겠군.”

 

기다림에 지친 영우가 전화를 들어 번호를 누르려고 할 때, 저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석민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온다.”영우가 손을 들어 석민을 향해 여기라는 신호를 보이자 석민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 와 자리에 앉았다.

“제가 좀 늦었죠? 갑자기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사고? 사고 났어요? 그건 설마하니······교통사고?”

 

 

 

영우가 석민의 몸을 위아래로 살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나가자 옆에 있던 연수도 석민의 형태를 살피고 있었다.

“제가 아니고 제 앞에 있던 차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차와 충돌을 했거든요. 전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위험한 상황으로부터는 모면을 했지만 수습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몸에 무리가 왔을 텐데······.”

영우는 진심으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더 석민의 몸을 찬찬히 살펴 나갔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습니다.”

“그래도 교통사고는 몰라요. 이런 말 있잖아요. 후유증은 시간이 경과해야 나타나는 거라고. 일단 병원에는 가요. 괜히 시간을 지체하다가 큰일 납니다.”

“조금 더 경과를 살펴 본 후에 가죠. 그건 그렇고 저 때문에 계속 기다리신 거 같은데 주문은 하셨는지?”

 

 

 

석민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미안해하는 눈빛을 지었다.

 

“우린 곰탕을 주문 할 생각입니다.”

‘우리! 우리! 우리······!’

우리라는 말이 온 몸의 신경을 자극해 왔지만 석민은 애써 태연함을 보이면서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들을 보고 있었다.

“이 집은 기본적인 곰탕이 맛있어요. 물론 꼬리 쪽이나 도가니 쪽도 맛이 있지만 곰탕 그 자체를 맛있게 만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곰탕을 선호하는 편이죠.”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이 아나운서도 곰탕을 좋아하는 군요.”“두 분도?”석민은 두 사람이란 공통적인 것을 넣고 싶지 않았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선을 그어야만 할 거 같았기에 최대한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우린 거의 생활을 같이 하다 보니 식성도 비슷해 졌어요. 처음엔 시간에 쫓겨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이 맛에 길들여 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

 

 

우리라는 말은 지독히도 신경을 자극시켜 왔다. 그냥 하는 말이지만 말끝마다 우리였다. 석민의 인내심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무조건 참아야만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일한 적이 오래되었나 봅니다.”

“연수가 입사를 하고부터 거의 같이 일을 해 왔어요. 간혹 다른 프로그램을 맡을 때도 있었지만 몇 번을 제외하고는 제가 따라 간 것이 맞다고 해야겠죠.”

“······.”

따라 다녔다고 했다, 늘 함께 일을 했다고 했다. 석민이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여 종업원이 다가 와 영우를 보고선 말없이 주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도 있으니까 가장 맛있는 부위의 고깃살로 주면 고맙겠는데······.”

여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벼운 인사와 함께 주문서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별로 많은 말들이 필요 없이 진행되는 주문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석민이었다. 영우는 여 종업원과 기본적인 말만 했을 뿐이며 또 연수는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며 그들이 정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단골이세요?”

“네. 어떻게 하다 보니 이젠 단골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영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석민이 주위를 빙 둘러 살펴보았다. ‘원조 할매 곰탕’이란 간판이 그제야 석민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여기가 얼마만큼 유명한 집인지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았지만 와 본 적은 없었다. 몇 번이나 올 기회가 있었지만 오지 못한 집, 결국에는 옛 연인과 함께 일하는 관계로 만난 박 피디와 오게 되어버린 것이다. 박 피디는 그렇다 하지만 옛 연인인 연수와 여기서 밥을 먹게 되리란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좀 더 근사하고, 좀 더 분위기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매번 거절당하는 남자, 한 번도 약속을 해 주지 않는 여자. 그 여자를 여기서 만났고, 함께 밥을 먹게 된 것이다. 옆모습이 나이와 함께 잘 어울렸으며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방송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쳐다 볼 여유도 없었기에 오늘은, 지금은 마음 편히 볼 수 있었다. 석민은 잠깐이었지만 연수를 쳐다보며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어 보였다. 변한 게 있다면 살의 의미일 것이다. 젖살이라고 해야 하는 것인가. 20대 초반의 윤연수는 여리고 여린 여자였다면 지금은 갸름하게 변한 턱 선이 어찌 보면 날카로운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석민의 눈에는 그것조차 아름다움이었으며 여인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인! 여자와 여인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윤연수는 완연한 여자였으며 더 깊게 말하자만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변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포기가 되지 않아 다시 찾아 왔는지 모른다. 많은 산을 넘고, 늪을 지나 이 여자 곁으로 돌아왔다. 이 여자 곁으로. 보고 싶어서, 만나고 싶어서,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때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으니까.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으니까.

 

 

오직 윤연수만을 자신의 아내가 되어야 하니까. 다른 여자는 안 되니까······.

 

 

“저도 단골이에요.”

연수가 석민의 깊은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몇 분인지 모르지만 옆으로 쳐다보는 시선은 불처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에 멈추고만 싶었는지 모른다. 늘 주위를 서성거리는 남자, 공식적인 회식자리에서도 틈만 나면 만나자고 하는 남자, 그 남자가 부담스러운 것은 연수 자신이었다.

왜 여기로 와서 사람을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하는 것일까.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그건 그렇다고 하지만 혹시라도 두 사람의 사이를 누군가 알게 된다면? 연수는 속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과거의 그림자로 인해 소문이 떠도는 것은 싫었다.

가장 화려하게 보이는 곳이 방송의 세계라고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가장 폐쇄적이고 어두운 곳이 방송의 세계였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각종 포장지로 잘 포장되어 사람들을 즐겁게도 만들고, 또 로망을 꿈꾸게 하지만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곳이 여기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열애설이었으며 잘못된 소문이다. 소문은 득이 되는 것 보다는 독이 되는 것이 더 많기에 정말로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다. 영우와는 이미 오래도록 일을 하면서 잘못된 소문을 수습해 나갔지만 석민과는 문제가 달랐다. 석민과는 어떻게 해서든지 소문을 만들지 말아야 했으며 조금의 틈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눈빛이 달라져 간다는 것을 느꼈기에 연수는 불안했고, 걱정이 앞섰다. 석민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아쉬운 게 없는 남자, 거침없는 남자, 한 번 마음먹으면 다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남자, 그 남자가 과거의 여자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 말은 연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늘 폭탄을 지닌 기분이었다.

이 남자, 금방이라도 폭탄을 터뜨릴 것이니까.

 

 

 

오늘도 최도윤 씨의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는 영우의 말에 바로 이곳으로 나온 남자다. 물론 가장 중심이 되는 세 사람이었기에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계획을 짜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남자와 있으면 늘 긴장이 되었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석민이 말했다.

 

 

 

곧 자신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겠다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연수는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다른 사람의 눈빛은 묵살한 채 옆에 있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다행히 영우는 석민의 깊은 눈빛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연수 말대로 연수도 여기 단골입니다.”

영우가 수저를 각자의 앞자리에 놓으면서 편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달랐다. 여전히 눈빛이 최고조에 있는 석민과 그런 눈빛을 느끼고 있는 연수만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자주 식사를 하시는 모양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나운서, 그거 아세요? 아무리 제가 비주얼이 약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예쁜 윤 아나운서와 함께 붙어 다녀도 소문이란 것이 나지 않아요. 열애설이 터져 주길 바랐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열애설은 늘 비켜가고 있습니다.”

 

 

 

영우가 호탕한 웃음을 짓자 석민도 함께 웃음을 보였다. 이 소리,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적인가? 아군인가?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이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왜냐 하면······ 나눌 수 없는 존재니까.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여자는 자신의 여자니까.

이석민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다. 박 선배가 워낙 성격이 좋으니까 그런 거라는 거 아는 사람은 다 알잖아요.”

연수는 아닌 듯 하면서 영우 편에 서 있었으며 다리가 붙어 오는 석민의 다리를 피하기 위해 오른 다리를 왼쪽 다리로 바싹 붙였다. 이 남자는 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사사건건 사람을 신경 쓰게 하는 것일까. 연수는 영우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석민으로 인해 불편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묘하면서 집요한 눈빛은 물론이었거니와 접촉으로 인한 다리는 상당히 불편했다. 석민도 그런 연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으며 또 다시 긴 다리를 연수의 다리로 살짝 살짝 닿아가게 만들었지만 연수는 애써 침착함을 보이면서 계속 영우와 대화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말, 상당히 기분 나쁜 거 알고 있지? 윤연수! 넌 아직도 모르는 게 있다. 넌 내가 다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남자의 순정을 얕보지 마라. 한 번 마음은 영원한 마음이다. 한 번 마음을 줬으면 그게 다야.”

“또 시작이다. 그만하시고 곰탕이나 드시죠.”

그 사이에 종업원이 들고 온 곰탕은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으며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장난은 그만 해야겠지. 여기서 더 심한 장난을 하면 이런 식사조차 하지도 않을 거니까 그만해야지. 그나마 너하고 밥 먹는 재미로 사는 박영우인데. 우선 먹자. 여름에 먹는 보양식이라.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군.”

영우가 뚝배기 안에 파와 소금을 넣고서는 연수의 뚝배기 안에도 파와 소금을 넣어갔다.

“어때? 오늘은 적당히 넣었지? 그래도 많이 넣어서 먹어. 파는 몸에도 좋으니까.”

“오늘은 적당히 넣었어요.”

 

 

적당히 넣었다는 말을 하면서 연수는 영우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한 사람, 석민만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게 늦고 있었다.

 

 

 

“혹시 이 아나운서는 곰탕을 싫어하시는 건 아니겠죠?”

곰탕을 받고서도 가만히 있는 게 영우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끓고 있는 뚝배기를 보게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소금을 넣는다던지, 파를 넣어 간을 맞추는 게 우선이었지만 석민은 파도 넣지 않았으며 소금도 넣지 않은 채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도 곰탕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수육은 더 좋아하죠. 점심시간만 아니라면 수육과 함께 생각나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영우가 싱긋이 웃어갔다. 그 역시 생각나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린 한 녀석을 같이 생각하고 있는 거죠?”

영우가 계속 웃고 있자 석민도 무표정에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음 기회에 만들죠.”

“그 기회, 조만간 제가 만들겠습니다.”

“앞으로는 연수뿐만 아니라 이 아나운서와도 자주 만나게 될 겁니다. 우리 취미가 먹는 거니까요.”

 

 

‘우리! 우리!’

 

 

 

이 말,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툭하면 우리라고 한다, 별 뜻 없이 한 말인지 모르지만 박영우라는 이 남자, 연수에 대한 마음이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영우보다 가만히 먹고 있는 연수였다. 우리라는 말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며 소금을 넣어도, 파를 넣어도 그저 묵묵히 받아먹는 연수 때문에 속이 뒤집어 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잘 먹는 여자가 점점 가관이었으며 얄미워지고 있었다.

가만, 그런데 이 여자가 원래 이런 음식들을 잘 먹었나?

연수가 곰탕을 좋아했나? 파를 많이 넣었나? 혼자 골똘히 생각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3년을 사귄 여자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자와는 이런 음식들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거의 레스토랑 같은 곳에 가서 스테이크와 파스타 등을 먹은 기억만이 나고 있었다.

 

 

 

“국 식어요. 빨리 드세요. 이런 음식은 식으면 맛의 깊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먹어 주는 게 좋죠.”

“제가 원래 뜨거운 음식은 잘 먹지 못해서 조금 식히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식을 동안 수육을 드시던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석민은 종류별로 나온 수육 중에 살코기를 들어 올리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는지 앞에 놓인 깍두기 국물을 뚝배기 안에 넣고 있었다. 이 방법은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큰 어머니가 해 준 방법이었다.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뜨거운 것도 잘 먹지 못하고 또 파도 먹지 못하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시원한 깍두기 국물을 넣어 자칫 예민한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비릿한 맛도 제거해 주고, 담백한 맛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곰탕, 미국으로 가기 전에는 가끔 먹긴 했었다. 단지 연수와 먹어 본 적이 없었지만.

“오, 제대로 맛을 즐길 줄 아시는 군요.”

“곰탕에는 깍두기 국물이 제격이죠.”

“그렇죠. 그 방법은 가끔 연수도 사용을 하긴 하죠.”

“······.”

 

 

 

 

그 순간, 석민은 연수를 쳐다보다가 뚝배기 안을 보고 있었다. 저 뚝배기 안에 깍두기 국물을 넣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그의 성격상 예전 같으면 무조건 공격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더한 것은 스물 초반의 남자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 나이를 가진 남자는 무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기에 무조건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했다.

 

 

사랑을 했다. 이 여자, 윤연수를······.

 

 

뭐든지 자신의 취향대로 여자를 따라오게 만들었지만 이런 음식들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함께 먹어 본 적도 없었으며 파나, 깍두기 국물을 넣어 준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고 싶어졌다. 깍두기 접시를 몇 번이나 들어올리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젠 스물 초반의 철없는 나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석민은 멈출 수가 없었다. 31살의 남자는 눈동자를 몇 번이나 이리저리 굴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윤 선배! 깍두기 국물, 넣어주면 안 됩니까?”

“······!”

조용히 먹고 있던 연수의 손이 멈추었으며 순간적으로 옆에 있는 석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깍두기가 잘 익어서 그런지 국물 맛이 한층 더 깊은 맛을 느끼게 해 줄 거 같습니다.”

 

 

 

석민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연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남자, 폭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조심하라고 했다. 사람들의 눈은 예리하고 무섭기 때문에 튀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충고를 했지만 자신의 성격은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넣어 드리고 싶은데요.”

석민이 연수의 무표정한 눈동자와는 상관없이 한 번 더 얘기를 해 왔다.

“오늘은 담백하고 구수한 맛을 즐기고 싶어요. 다음에는 얼큰한 맛으로 먹죠.”

연수는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거절의 눈빛을 보이고선 다시 뚝배기 안으로 숟가락을 넣었다.

“그렇게 하시죠.”

 

 

 

냉정하면서 단호한 음성에 석민도 그대로 받아 들여야만 했는지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서는 어느 정도 식어있는 국을 먹기 시작했다. 이젠 다른 것보다는 두 사람의 속도에 맞추면서 이 국을 다 먹어야만 할 거 같았다. 두 사람은 속도도, 호흡도 척척 맞는지 국도 잘 먹었으며 수육도 종류별로 가져가서 소스에 찍어 먹고 있었다.

 

 

 

석민의 숟가락도, 젓가락도 빠르게 움직여 나갔다. 연수의 취향에 이젠 맞추어 가야 하니까.

“그런데 최 도윤 디자이너와는 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응. 화요일에 만나기로 했어. 월요일에는 학교에 가야 한다고 하더군.”

“그 분, 학교에 강의까지 나가나요?”

“글쎄다. 그건 모르겠는데. 교수라는 직책도 있었나? 내가 들은 말로는 보석 디자이너, 그리고 푸드스타일리스트라는 명함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여간 대단한 남자야.”

“그렇죠. 제가 봐도 멋져 보이긴 했어요. 그 나이에 풍기는 멋스러움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좌우지간 보기엔 좋았어요.”

순간, 석민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수의 말들이 재미있어 졌기 때문이다. 멋지고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란 말이 왜 자꾸 재미있어 졌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연수의 말들이 귓가에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가 일로 인한 자리가 아니라면 장난스런 농담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로 인해 만났기에 미소만 지었다.

 

 

“그렇다면 녹화는 어떤 식으로 할 생각이세요?”

 

 

 

잠잠히 깍두기와 함께 먹고 있던 석민도 두 사람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들어왔다. 이제 세 사람은 한 배를 탔으며 무엇을 하던지 가장 완벽한 팀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했기에 석민도 무조건 적극성을 보였으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자신으로 인해 두 번이나 진행되는 방송 녹화다. 어찌 보면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란 것을 알지만 그런 표정은 보이기 싫었다.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면 그것은 잘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방 열을 올리지만 곧 잊어버린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가장 완벽한 방송을 만들면 되니까.

석민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조금 전에 얘기한 대로 부분편집만 할 생각이니까 그다지 어려운 점은 없을 겁니다. 전에 해 놓았던 상태에서······.”

 

 

 

거기까지 말을 하던 영우가 말을 머뭇거렸다. 역시나 예민한 부분이었다. 다른 아나운서와 녹화를 해 놓았던 상태에서 한 사람의 얼굴만 바뀌어 들어오면 된다는 의미였기에 석민도, 영우도, 연수도 제각기 생각은 틀렸다. 그러나 석민은 가장 표정관리를 잘하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알기에 가장 지독한 연기자의 모습을 보였는지 모른다.

 

 

 

“결국 저 때문에 일을 어렵게 만드는 셈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더 잘해야 하는 거죠?”

석민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자 호탕한 성격을 가진 영우도 웃어버렸다. 이젠 이런 사소하고 불편한 일은 접자는 웃음이었다.

“여기.”

영우가 종업원을 불렀다.

“왜요?”

 

 

 

연수가 물어오고 있었지만 영우는 종업원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며 종업원이 다가서자 따뜻한 국물을 더 달라고 했다.

“와, 아무리 단골이지만 너무 하네요. 사장님께서 특별히 거의 곱빼기 수준으로 드렸는데 거기에 또 국물을 더 달라고 하다니. 정말이지 박 피디님, 너무 하신다.”

“조금만 더 줘라. 손님들 팍팍 몰고 올 테니까.”

“알았어요. 이번 국물은 사장님 권한이 아닌 제가 알아서 갖다 드릴 게요.”

“고마워. 탕은 식으면 맛이 없잖아. 얘기를 한다고 국물이 많이 식었어.”

영우는 계속 소년처럼 웃으며 애교스런 표정까지 지었다.

“박 피디님은 그 웃음 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웃는 모습은 정말로 보기 좋네요.”

 

 

“그러니까 뭐야? 웃는 모습만 보기 좋단 말이지.”

“네. 그거 모르셨어요? 웃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종업원의 말에 영우는 계속 웃고 있었으며 마주보고 있던 연수도 그런 영우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윤 아나운서도 보기보다 배가 엄청 크네요. 곱빼기를 아무렇지 않게 먹다니.”

종업원은 연수의 뚝배기를 보다가 배 부분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생각만큼 보기 싫게 배가 나오지도 않고. 이렇게 먹으면서도 화면에 뚱뚱하게 나오지도 않고.”

“······!”

연수는 종업원의 말을 들으면서 뚝배기를 보았다가,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먹고 있는 곰탕은 곱빼기라는 것이다. 거기에 영우는 또 국물을 달라고 했다.

“이거 곱빼기 인가요?”

연수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해갔다.

 

 

 

그 순간, 석민이 웃고 있었다. 연수의 동그랗게 변해있는 눈동자,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뭔가 애매하고 표정 관리가 되지 않으면 눈동자부터 커지는 여자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기본적으로 하는 짓은 변하지 않은 것이 옛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늘 절도 있는 표정과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는 여자가 지금은 종업원의 곱빼기라는 말 한마디에 눈을 깜박거리며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눈동자만 빠르게 굴리다가 커져만 갔다.

 

 

“곱빼기 아니야. 그냥 국물만 조금 더 첨가되었을 뿐이야.”

“그게 그거죠. 곱빼기 맞습니다.”

“······!”

 

 

 

석민은 곱빼기임을 강조했으며 연수는 계속 두 눈만 말똥거렸다. 곱빼기가 무슨 죄는 아니다. 그런데도 연수는 곱빼기를 먹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는지 눈을 어디로 둬야 할 지 몰랐다. 탕이 곱빼기다. 거기에 수육까지 열심히 먹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산이 되는 것일까.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또다시 자신의 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만큼 먹은 것일까. 배는 어느 정도 나온 것일까. 연수가 짧게 한숨을 내 쉬자 석민은 계속 웃음이 나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방송국에 입사해서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이 여자와 가까이서 만나기를 원했지만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장 자연스런 간접 데이트가 되고 있었다.

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예상외로 결과는 만족이었다.

 

 

 

‘윤연수,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될 거 같구나. 넌 변하지 않았어. 당황하고 애매한 상황이 되면 꼭 그런 모습을 보였지. 눈을 깜박거리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보기 좋네. 변하지 마라. 그 모습, 그대로 가자. 네 옆으로 오기를 잘 한 거 같다. 예쁘네. 곱빼기면 어떤데? 잘 먹으면 되는 거지. 잘 먹어서 예쁘기만 하네.’

 

 

 

 

석민은 거의 비어있는 연수의 뚝배기 안을 바라보며 일부러 또 웃었다. 석민의 눈빛이 계속 뚝배기 안으로 머물자 연수는 석민을 향했다.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상을 그릴 수는 더욱 없었기에 계속 눈만 깜박거려 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종업원은 뜨거운 국물을 더 갖고 왔으며 각자의 뚝배기 안에 국물을 붓고 있었다.

 

 

 

“전 됐어요.”

“이미 부었는걸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렇군요.”

휴 하는 한숨소리가 연수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연수야, 먹자. 넌 먹을 수 있어.”

“아니요. 배가 부른 걸요.”

연수가 먹지 않으려고 하자 영우는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연수야, 그동안 우리가 먹은 게 늘 이 수준이었다.”

“······!”

 

 

 

이 수준이라고 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른 말로 하면 지금까지 먹은 것이 곱빼기였다는 것이다.

영우가 계속 웃자 석민도 따라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다. 왠지 모르지만 자꾸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영우가 웃는 웃음이 어떤 웃음인지 모르지만 석민은 석민대로 웃어버렸다.

 

 

 

윤연수라는 여자가 사랑스러웠으니까. 예뻐 보였으니까.

“우선 먹자. 다음 주부터 일이 밀려있다. 그러니까 재충전을 시켜야지.”영우는 수육을 시작으로 해서 탕을 먹어 나갔으며 석민도 말없이 먹어 나갔다. 연수만이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두 남자는 연수가 아닌 먹는 것에만 집중을 해 나갔다. 그러나 두 남자는 연수를 보고 있었다.

각자 보고 있는 눈동자는 달랐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연수를 향한 사랑이었으니까.

영우는 영우대로 사랑이었고, 석민은 석민대로 사랑이었다.

 

 

 

‘연수야, 이런 데이트도 괜찮네. 언제나 널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 방법이 있었다니. 좋다. 이 시간도 좋고. 어린 아이처럼 표정 짓고 있는 너도 마음에 들고. 오늘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왔다. 내일은 또 한 걸음을 걸어 나갈 것이다. 날 자세히 봐 주는 그날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석민이 연수를 향한 눈빛이 점점 깊어져 갔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우는 먹기에 정신이 없었고, 연수도 아까운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국과 고기를 먹어 나갔다. 그들의 점심시간은 평화로워 보였으며 좋아 보였다.

 

 

 

 

***

얼마나 잤을까?

지난 밤, 자지 못한 연수가 계속 울려대는 벨 소리에 눈을 뜨고서는 불을 켰다.

문을 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또한 어디선지 모르지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기도 했다. 연수는 눈을 비비며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질하고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들리는 소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며 윤연수라는 이름을 불러 댔다.

 

 

“윤연수! 윤연수!”

“누구지? 이 시간에. 도대체 몇 시나 된 거야?”

 

 

연수가 연신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았을 때, 9시 10분이었다.

“누구지?”

연수는 자신의 이름을 끝없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신을 아는 사람으로 느껴졌지만 가까이 다가섰을 때, 연수는 밖에서 들리는 음성의 주인공이 석민임을 알았다. 윤연수라고 끝없이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은 석민이었기 때문이다.

“윤연수!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문 열어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왜 왔을 거 같아?”

석민이 오히려 물었다. 그러나 문을 치는 동작은 멈추지 않았으며 다시금 윤연수라는 이름도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별 다른 일 없으면 내일 회사서 만나죠.”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

“아까 할 얘기는 다 한 거 같은데.”

 

 

 

 

곱빼기인지 많은 양을 힘들게 다 먹었지만 그것으로도 영우는 헤어지기 싫어 근처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 가서 각자 좋아하는 커피까지 마시고 헤어졌다. 일에 대한 거, 각자 취미에 대한 거까지 얘기를 해 나갔지만 연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을 뿐이다. 영우는 석민에 대한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성격상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또 진짜 친구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박영우니까. 박영우는 친구이든, 그 누구라도 좋은 동료로 만들고 싶어 했기에 이젠 석민과 좋은 동료이자 비슷한 여유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좋아 친구가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석민도 영우의 진심을 알았기에 대화의 장르는 넓었으며 끝없이 이어졌다. 연수만이 나오는 하품을 참고 있었을 뿐이다. 커피를 마시고, 또 리필해서 마시고. 그 시간들이 서너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집으로 왔다.

집으로 와 한 일은 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침대로 향했으며 두 눈을 감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거, 눈꺼풀이 맞다는 것을 실감했기에 연수는 씻지도 못한 얼굴을 걱정하면서 이미 감겨진 눈꺼풀과 함께 깊은 잠에 들어 간 것이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마도 내일 아침까지 잠에 푹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그 달콤한 잠을 깨운 사람이 석민이었다. 언제 왔을까. 오래도록 벨을 눌렀나. 문을 치고 있었나. 약간은 화가 난 목소리였기에 연수는 현관 앞에 서 있었지만 선뜻 문을 열어 줄 수 없었다. 근래에 와서 자주 전화도 해 왔으며 이젠 그것으로 통하지 않았는지 집으로 찾아왔다.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여자, 오늘따라 원망스런 음성이 문을 사이에 두고 더 크게 들렸다.

“윤연수 아나운서님! 문 좀 열어주시죠. 전 이석민 아나운서입니다. 일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잠시 조용한 음성이었나 했지만 곧 그의 목소리는 다른 남자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으며 이젠 윤연수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호칭까지 붙였기에 연수는 당황했다. 여긴 오피스텔이다. 방음이 약해 지금 석민이 하는 소리들이 누군가 듣는 다면 분명히 문을 열 수도 있을 것이며 아니면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의 애정놀이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좋지 못한 상황으로 간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기에 연수는 양 손을 꼭 잡은 채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계속 저 상태로 지치게 둘 것 인가. 이 시간에 혼자 사는 여자 집에 오는 남자, 그 남자는 이석민이다. 저돌적이고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남자라는 것을 알기에 연수는 계속 머뭇거려 나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석민은 연수의 이름을 불렀다가, 아나운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가 급기야는 한 번의 잘못을 용서 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그날, 그것은 오해다. 그건 정말 사고였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단 말이야. 넌 실수 같은 거 하지 않니? 더군다나 그 나이라면······. 유혹 앞에 약할 수도 있어. 그건 정말 사고였으며 내 마음은······ 가지 않았어. 그 여자에게 가지 않았단 말이야. 단 한 번도.”

 

 

“······.”

“널 잊은 적 없어. 너 때문에 방송국으로 왔어. 널 얻기 위해 아나운서가 되었단 말이야.”

 

문을 열어야 할 것만 같았다. 너 때문에 방송국으로 왔다,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 왔기에 연수는 우선 문을 열었다. 자신의 사생활을 누군가 듣고 있다는 거, 누군가 알게 된 다는 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혹시라도 인터넷이나 엉뚱한 곳에서 소문이 나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자신은 윤연수였다. 멀리 멀리 날아가고 싶기도 했고, 또 높은 곳으로 뛰고 싶어하는 윤연수였기에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들어와요. 단 부탁이 있어요. 조용히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

 

 

 

석민이 차갑고 냉정한 눈빛을 지으며 서 있는 연수를 쳐다보며 잠시 멈칫 했지만 그는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들어오고 싶었던 집인지 이 여자는 모를 것이다. 너무나 오고 싶었던 곳이다. 윤연수가 사는 집은 어떤 집일까. 어떻게 해 놓고 살고 있을까. 어떤 모양새를 만들어 놓은 집일까. 화려한 집일까. 그녀의 성격대로 온갖 꽃들로 꾸며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고, 화려한 장신구들을 좋아하는 여자였으니까. 혼자 많은 상상을 했던 집은 생각을 벗어난 수수하면서 단조로운 집이었다.

 

 

 

화려한 장식은 커녕 그 흔한 꽃도 없었으며 액자 하나 제대로 걸려 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이사를 간다면 이삿짐이 별로 없어 단 시간에 이사를 할 수 있을 만큼 짐도 없었으며 소품들도 별로 없었다.

 

 

 

“혼자 사는 여자 집이 설렁하군. 텔레비전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침대도 이왕이면 좀 큰 것으로 하던지. 자다가 몸부림이라도 치면 떨어지겠군. 다치지 않으면 그만 다행이겠지만. 정말 생각을 벗어나게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이라도 사 오는 건데. 후회스럽군. 정말 설렁한 집이야. 식탁은······.”

너무나 작은 식탁이었다. 작은 식탁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군데군데 흠이 많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새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으며 꼭 누군가 쓰지 않는 것을 주워 온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석민은 계속 주위를 맴돌았다. 주위라고 해 봤자 발걸음으로 몇 걸음 걸어 돌면 끝이다. 그만큼 집은 작았으며 한 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올 만큼 작은 집이었다. 평수로 따진 다면 딱 혼자 살기에 적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석민은 이런 좁은 곳에서 연수가 산다는 것이 오히려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기에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여기서 얼마나 살았어?”

“작년에 이사를 했으니까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네요.”

“그 전에는?”

“그 전에도 오피스텔에 살았죠.”

“내가 묻고 있는 것은 그 전에도 이만큼 좁은 공간에서 살았냐고 묻는 거야.”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대부분의 오피스텔은 거의 이 정도 수준이죠.”

“다 이러진 않아. 여긴 너무 좁아.”

 

 

 

석민은 옆으로 걸어가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식탁 옆에 있는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해 왔기 때문이다.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계속 윙윙 거렸으며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이 냉장고, 고장 났어?”

 

 

그 순간, 연수는 냉장고를 보면서 소리가 심하게 울리자 문을 열어 손으로 몇 번 치고 있었으며 그리고는 조용했다. 사람에게 얻어맞은 기계도 놀란 것인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진작 놀라고 있는 사람은 석민이었다. 용감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살면서 습득을 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연수가 하는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며 생활 속의 방법으로 보였다.

 

 

“냉장고, 고장 났어? 쓰지 못할 정도로.”

“수리하러 올 거예요.”

“차라리 하나 사는 게 낫겠다. 이것도 전자제품이라고 사용하는 것인지. 여기 담겨진 음식들을 먹으면 오히려 배탈이 날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