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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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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꿈꾸는 남자들


BY 문해빈 2012-10-17

“영희한테 가 봐야 하기 때문에 취소할 수가 없어.”

“······.”

영희란 말에 인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잘 잤는지, 고통은 어느 정도인지 가서 봐야겠어. 힘든 수술이었어.”

“수술은 잘 되었다면서. 그렇다면 꼭 오늘 가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가족들 없어?”

 

 

 

인혁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휴가라는 말이 나왔을 때, 지영도 갈등했다. 휴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편인 인혁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뭔지 모르지만 가슴이 답답하기 시작해 왔다.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미리 얘기라도 해 주었다면 휴가에 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루정도가 되더라도 휴가는 휴가니까.

그런데 지금 얘기하고 있는 남자에게 반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반항 같은 것이었다.

“없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다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돌봐 줄 가족들이 없어. 그래서 우리가 돌봐 주려고.”

“우리?”

우리란 말에 인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는 지영 곁으로 다가 섰다. 앉아서 지영을 보고 있기엔 뭔가 대화의 부족이란 느낌이 들었기에 자리에서 일어 난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경순이하고 현경이.”

 

 

아내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물어보느냐는 눈빛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다 동창들이다. 경순이와 현경까지 나오자 인혁은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는지 식탁에 있는 커피 잔을 들어 계속 마실 뿐이다.

“나는 말했다. 오늘 밖에 시간이 없다고. 나중에 딴 소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지영은 알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히려 감정적으로 이상해지고 있는 사람은 인혁 자신이었다. 살면서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작고 소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모든 것은 남편에게 맞춰 살아 온 여자였다. 그 여자가 다른 약속을 잡았으며 그쪽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인혁은 여름이라 식지 않는 커피가 오늘 아침엔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름에도 꼭 뜨거운 커피를 즐겼기에 마시고는 있지만 지금은 차가운 커피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속이 타 들어갔다. 진짜 이런 기분은 그로서도 처음이었기에 감정조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몇 시간이나 있다고 올 건데? 오늘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생각이거든.”

“그건 나도 몰라. 어제처럼 또 늦어지게 될 수도 있고.”

“뭐? 어제처럼 또 늦어진다고. 그런 점심은?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라고?”

“다 준비 해 놨어. 하얀 죽도, 전복죽도.”

“죽만 어떻게 먹어?”

“밥통에 밥도 해 두었어. 황태국도 끓여 뒀으니까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별 어려운 것은 없을 거야.”

별 어려운 것은 없다고 한다. 인혁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 순간, 지영은 인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길들여 진 사람은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도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가스렌즈 사용법은 알고 있을까? 불을 켜는 것은 할 수 있을까? 식탁에 다 차려지고 나면 의자만 빼서 자리에 앉는 것이 전부인 남자다. 의자에 앉아서 다 갖추어진 밥과 반찬들을 먹는 것이 이 남자가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져 있었으며, 길들여 진 모양이다.

 

 

 

“전자렌즈를 사용해. 그건 할 수 있잖아. 잠시 돌렸다가 먹으면 먹기에 불편하지 않을 거야.”

“전자렌즈 사용 못해.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어. 어떻게 하는지 몰라. 어제 보고 왔잖아. 직계 가족도 아닌데 며칠만 더 있다가 가도 될 거 같은데.”

 

 

 

다 맞는 말이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큰 일이 있어도 남편이 휴가라고 하면 취소를 시키는 게 마땅한 일이었으며 대부분 한국의 여자들은 남편을 따랐다. 지영도 갈등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영희 쪽으로 향했다. 이미 약속되어진 것도 어쩔 수없는 일이었지만 갑자기 그러고 싶었다. 무슨 마음인지 모르지만 하루라는 휴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짧은 휴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다. 더욱 이번 같은 경우는 혜수로 인해 더 짧은 휴가가 될 거 같은 예감도 들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지?

 

 

그 짧은 시간동안 줏대도 없고, 의지력이 약한 여자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지영의 모습을 읽은 인혁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지영을 향했으며 자신이 정한 계획 속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때,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지영은 당연히 인혁이 정한 계획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전화를 해서 오늘부터 남편이 휴가에 들어갔어. 내일 갈게. 오늘은 미안하지만 너희들만 가. 정말 미안해······.

그런 말로 자신을 변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입술이 열리기 위해 인혁을 쳐다보던 그 순간, 헤수가 방에서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연신 하품과 함께 눈을 비비고 있었다.

 

 

 

“엄마! 지금이 몇 시인지 알기나 해? 아직 깨우지 않으면 어떡해?”투덜거리는 듯 짜증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인지 목소리는 화가 나 있는 듯 했다.

혜수를 쳐다보던 지영은 본능적으로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식탁에 하나, 거실에 하나, 그리고 전자렌즈 옆에도 하나를 걸어두었다.

세 딸을 키우면서 벌써 두 번의 수험생 생활을 해 보았기에 시계가 얼마큼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에 맞추어 깨우고, 시간에 맞추어 주스를 먹이고, 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보내고. 시간에 맞추어 데리고 오고. 그 시간들이 지나고 잠시 쉬는 가 싶었는데 이젠 혜수 차례였다.

언니들과는 터울이 나는지라 새삼스럽게 더 바빠져 갔다.

혜수의 말처럼 시간은 많이 지나가 있었으며 자칫 잘못하면 지각까지 할 정도로 시계바늘은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 버렸네. 얼른 씻고 와서 죽을 먹던지, 주스라도 마시자.”

“우리 담임선생님, 불독이란 말이야.”

“불독?”불독이란 말에 인혁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가 따라 불렀다. 불독, 불독이라고.

 

 

 

그의 눈빛에서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혜수가 말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불독! 사납고, 화도 잘 내고, 잘 웃지도 않고. 거기다가 이마엔 언제나 하늘 천자를 만들고 다녀. 그래서 별명이 불독이야.”

 

“고약한 남자교사를 만났구나.”

“남자 교사 아니야. 여자 교사! 여자 교사에게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이며 자존심 상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만 진작 본인은 몰라. 그게 더 웃겨. 뒤에서 끽끽거리며 흉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혼자서만 모르거든. 그런데 아빠! 내가 전에 말했잖아. 여자교사라고. 나이는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결혼도 못했고, 그래서인지 그 히스테리를 우리한데 다 풀어 버리는 악마의 영혼도 가지고 있는 할머니 같은 얼굴도 보인다. 이것도 말했는데? 결혼하지 못한 노처녀라고. 생긴 얼굴이 호감을 주지 못한 다고. 아빠도 보기보다 기억력이 나쁘네. 엄마만 기억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빠!”

 

 

 

혜수가 인혁을 향해 아빠라고 불렀다.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실컷 다 얘기를 해 놓고 또 부르는 것일까.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은 모양이구나.”

“아빠는 그 기억력으로 일 잘하는 거 맞아?”

“······.”

딸 아이 입에서 일을 잘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들었던 거 같구나. 혜수야, 그렇다고 그거 하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란다. 아빠가 하는 일은 엄청나거든.”

인혁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할 정도로 완벽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설령 농담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상대가 딸이든, 아내라도.

윤인혁이란 남자에게 있어 일은 모든 것이었으며 또 어쩌면 목숨이었으니까. 목숨처럼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으니까.

 

 

 

“물부터 마셔. 하품은 그만 하고.”

지영이 혜수 곁으로 다가 와 물을 건네자 혜수는 물 컵을 받아 들였다. 입은 점점 크게 벌어져 가면서 하품을 연신 해 대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시원한 생수를 벌컥거리며 마셔 갔다.

“엄마, 어제 나보다 일찍 잔 거 알고 있어? 수험생을 둔 엄마가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자는 법은 어디에 있는 거야?”

예리하다, 바늘보다 더 예리했으며 날카롭게 느껴졌다.

 

 

“어제는 엄마가 많이 피곤했거든. 그렇지 않아도 널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생기고 있는데 야단은 여기까지로 하자. 더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고 싶어.”“미안한 사람의 말투가 아닌데.”

“그렇게 들렸어?”

“응.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어.”

“엄마 친구 영희 아줌마 알고 있지?”“영희 아줌마! 응. 잘 알고 있어.”“영희 아줌마가 수술을 하셨거든. 반나절을 꼬박 세우며 한 수술이야. 걱정스런 마음에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어. 긴장을 많이 했는지 집에 오니까 온 몸이 욱신거리고 파김치가 되더라.”

“무슨 수술을 했는데 하루 종일이나 걸려?”

혜수의 눈동자는 궁금증으로 몰려들었다. 누구보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19살의 소녀였다.

“······.”

갑자기 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슨 수술인데?”

헤수는 계속 묻고 있었다. 여전히 궁금하다는 눈빛은 말똥거려 나갔으며 빨리 대답을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그게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지영은 말을 멈추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인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인혁은 무표정이다. 그 무표정 속에서도 암이란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듯 입술이 움직여 나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으로 입술이 살짝 살짝 열리는 듯 하다가 벌어져 버렸다. 아마 입 모양으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있었기에 지영도 알았다며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꼭 일부러 깜박거린 것은 아니지만 무언의 약속이 되어 버린 것처럼 눈을 깜박거린 것이다.

수험생에게 무겁고 어두운 말을 하는 것은 피해야만 한다, 수험생을 위한다면 텔레비전 소리도 줄여야 하고, 목소리도 낮추어야 하고, 발걸음 소리도 최대한 들리지 않게 걸어야 한다······.

 

 

 

또 어제처럼 수험생보다 먼저 자는 경우는 절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엄마라면······.

 

 

 

그리고 지금처럼 아픈 이야기는 삼가야만 한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받아들여 시간의 감정이 오래 갈 수 있기에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였다.

“응. 갑자기 복통이 나서 수술을 하셨거든. 그런데 결과는 좋아. 시간은 많이 지체되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힘들었지만 다행스럽게 모든 것은 잘 되었어.”

“다행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픈 사람이 제일 싫어. 많이 아픈 사람은 할아버지와 이모만으로 끝났으면 좋겠어.”

시아버지가 암 투병을 오래도록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과 여동생인 세영이 교통사고 후, 반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몇 번의 대수술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고통이 따르고, 아픔조차 당해내지 못할 땐 입술을 꼭 깨물면서 안으로 울음을 삼키어 나가던 그 고통까지 막내딸인 혜수는 가슴속에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은 암으로 고통 받다가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고, 또 한 사람은 몇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원래의 자연적인 몸으로는 돌아오지 못했으며 자신의 몸을 보면서 점점 말이 없어지고 우울증을 보이던 여자는 어느 날 떠났다.

잠시 여행 중이라는 말이 전부였다. 여행을 떠난다고? 여행이 끝나면 돌아오겠다고······.

아직까지 여행 중이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세영과는 나이 차가 났음에도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냈던 사이라 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바쁜 입시 생활로 인해 잠시 잊고 살았는데 또 다시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딸의 눈빛이 흐려지려는 감정을 다른 쪽으로 돌린 사람은 인혁이었다.

시간적으로 봤을 때, 빨리 씻고 준비해서 학교로 가야했고, 또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부모니까. 아빠이든 엄마이든 두 사람은 혜수의 부모니까.

막내라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입시생활에 늘 지쳐있는 딸이 안 되어 보였으며 측은해 보였다. 누군가가 안 되어 보이는 것은 혜수가 처음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무조건 강해야 한다, 사람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버티며 살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면 안 된다. 자신에게 묶여 둔 말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 딸이자 막내인 혜수에게만은 너그러웠으며 측은한 마음이 생겨났다. 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아침마다 하품을 하면서 잠을 더 달라고 하는 딸이 안 되어 보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지금도 연신 하품을 하고 있는 딸이 안 되어 보였지만 곧 감정이 아닌 이성의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결국 사람은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 이성으로 살지 못하면 도태하니까.

잠시 동정심이 일어났지만 곧 정리를 하면서 혜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빨리 씻고 전복죽과 토마토 주스를 먹어야지.”

“둘 중에 하나만 먹을게.”

“둘 다 먹고 가. 기운 빠지면 공부하기 힘들어.”

“그런데 아빠는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그러고 보니 이 시간까지 집에 있는 아빠가 이상해 보였는지 두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휴가다.”

 

 

 

“정말? 그러면 오늘 우리 가족 외식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는 날이네.”“넌 수험생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피, 수험생은 사람 아닌가? 오늘 하루 논다고 성적이 쑥쑥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성적이란 말에 인혁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해갔다. 성적! 성적이라고 했다.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는 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 사회는 학벌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할 정도로 잔인성을 보이면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인혁은 알고 있었다.

사는 게 얼마나 치열한지 알기는 한 것일까. 얼마나 고통이 따르고 있는지 알까?

 

 

 

너무나 느긋한 딸을 쳐다보다가 자동적으로 지영을 바라보았다.

자식들 교육문제, 그 외 가정사의 모든 문제도 지영이 도맡아 해 왔기에 믿었다. 무조건 믿었는지 모른다. 두 딸인 연수와 은수는 나름대로 남들이 인정하는 대학을 다녔으며 또 졸업을 해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양 이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은수는 졸업을 하진 못했지만 제 몫은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래도 흘러가리라 믿었다. 연수와 은수와 그렇게 해 온 것처럼 혜수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느낌으로 알게 되었다. 막내인 혜수는 언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학원도 다니고, 고3 수험생의 흉내를 내고는 있었지만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열정을 뿜어내는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혜수는 단지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아이와 같았다. 어서 어서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 19살이 아닌 20살이 되는 꿈만 꾸고 있었다. 20살이 된다는 것은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자유는 준비되지 못하면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준비되지 못한 자에게는 자유가 아닌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으련만 철없는 막내딸은 그저 아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빤 내가 좋은 대학에 못가면 미워할 거야? 미워 할 거지?”

“······!”

 

 

 

갑자기 혜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인혁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인혁이 혜수를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서서 바라보았다. 혜수는 읽어나갔다. 아무리 철없고, 막내딸로 자라고 있지만 윤인혁이 어떤 아빠인지 알기에 먼저 인혁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다른 눈빛으로 변해가는 아빠의 얼굴을 그냥 지나칠 자신이 없었다. 완벽주의자! 윤인혁이란 남자는 완벽주의자이니까.

“그런 말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법이 어디에 있어?”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인혁은 금세 눈동자를 원래의 위치로 돌렸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미워하는 일은 없어. 절대로. 왜냐하면 윤혜수는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거든. 윤혜수는 윤인혁의 딸이니까.”

“······!”

무슨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혜수는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을 뿐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그 순간, 본능적으로 지영을 향했다. 도와달라는 눈빛이다. 엄마니까. 그래도 어려운 말만 골라하는 아빠를 해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 눈만 깜박거렸다.

그러나 지영은 웃고 있을 뿐이다. 말똥거리는 눈망울이 예뻐 보였을까? 아니면 눈에 눈물이 고여 가는 것을 조금은 즐기고 싶었을까. 무조건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에 지영은 웃고 있다가 옆에 서 있는 인혁을 쳐다보았다.

인혁의 입술도 살짝 열려갔으며 그 사이로 균형 있게 자리 잡은 하얀 치아가 주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다. 자연스런 웃음, 사랑이 담긴 미소가 딸을 향하고 있었기에 지영도 서서히 치아가 드러날 만큼 미소를 지었다.

 

 

가끔 보여주는 저 미소, 저 웃음은 백 만 불짜리의 효과를 넘어가고 있었으며 색다른 매력에 남자로 느껴져 갔다. 남편이 아닌 남자로. 저 미소에, 저 웃음에 늘 지는 여자가 되어 살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더 이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지영을 향해 인혁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조금 전에 말했던 거, 그거 말이야. 전복죽을 몇 분 정도 데워야 한다고 했지?”

“······.”

“메모지에 적어 식탁 위에 두고 가. 1분이면 1분, 3분이면 3분. 정확하게 적어.”

“······.”

 

 

 

기막힘이다. 이런 것을 두고 기막힘이란 단어가 나왔을 것이다. 그냥 대충 알아서 데우면 될 것을. 차가우면 더 데우면 될 것이고. 너무 뜨겁다는 느낌이 들면 시간을 줄이면 될 텐데. 그동안 보아 온 것만 해도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는 일이다.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메모지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휴 하며 한숨을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 한숨이 나오기도 전에 혜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엄마, 또 어디가?”

“응. 그게 말이야.”

“혜수야, 일단 씻고 학교가야지.”인혁은 여전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있는 막내딸이 걱정스러워 욕실 앞까지 데려갔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씻고 학교에 가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아빠, 3시 되면 수업 마치는데 외식하면 안 돼?”

또다시 문을 열고 나온 혜수를 인혁도 지지 않고 욕실로 밀어 넣었다.

 

 

 

“알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학교부터 가야지. 여기서 늦어지면 밥도 먹지 못한다.”

“영화도 보고 싶어. 요즘 재미있는 영화 정말 많이 하거든.”

공부만 해도 부족할 터인데 영화에 대한 얘기를 전문가처럼 하고 있는 딸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인혁은 목소리에는 다른 감정을 실어 넣지 않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혜수니까. 막내딸이니까.

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음성에서 이미 마음은 아빠가 휴가를 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공부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을 보이는 딸이다. 인혁은 혜수가 하는 말들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알았다며 빨리 씻으라는 남편의 목소리, 또 안에서는 어떻게 씻는지 요란한 소리들이 밖에까지 들려왔다. 이들의 대화, 이들의 모습은 가끔 보는 아침의 풍경화였다. 이들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으니까. 아름다움을 넘어 편안해 보이는 그림이었으니까. 그러나 진작 아내를 향해서는 아픈 말만 골라하고, 늘 자신의 틀에 맞추기를 원하는 독재자 남편이었다.

무조건 자신의 말만 들어야 했으며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런 남편이었지만 막내딸에게만큼은 양보도 하고, 또 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인간적으로 보였다. 딸에게마저 자신에게 대하듯 막무가내로 하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인간적으로 보였다. 인간적으로 보이는 남자, 착한 아빠로 보이는 남자, 그 남자를 유심히 보고 또 보았다.

 

 

그까짓 정신적인 외도! 그게 뭘까? 정신적으로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답을 찾고 싶었지만 찾지 못했다. 이혼을 요구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진작 돌아 온 것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는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그냥 묻어버리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예전에도 그래왔듯이 흘러가는 물처럼 지나갈 것이니까. 지나버린 계절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오늘은 몇 시에 올 생각이야?”

언제 다가왔는지 잠시 멍해진 사이에 뒤에 인혁이 서 있었다.

“모르겠어.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어제처럼 늦지는 않을 생각이야.”

두 사람의 대화로 보아 너무 늦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럼 혜수 수업마치면 외식하고 영화를 보자.”

“영화까지.”

 

 

외식은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영화까지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오후에 학원을 가야 한다는 것을 감정에 도취되어 잠시 잊은 모양이다.

“오늘밖에 시간 없어. 또 혜수가 원하니까.”

“내일은 뭐 할 건데? 계속 휴가라면서. 어머니도 찾아뵈어야지.”

“어머니!”

“응. 어머니!”

 

 

 

어머니란 말에 인혁이 고민하는 눈빛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는 눈빛 속에선 이미 생각하는 남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음, 영화를 보는 것은 안 되겠군. 혜수가 원해서 해 주고 싶었는데. 다른 방법으로 돌려야겠군. 혜수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거 뭔지 알고 있어?”

“혜수는 워낙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소녀라서. 시계도 가지고 싶어 하고, 액세서리들도 사고 싶어 하고. 또 예쁜 옷들도 많이많이 가지길 원하고.”

“다 사 줘.”

“······!”

“스트레스가 많은 시기잖아. 원하는 거 다 해 줘.”

원하는 거 다 해주란 남자는 혜수의 아빠였다. 계산도 하지 않았으며 무조건 사 주라는 말만 했다.

“최대한 일찍 와. 시간을 아껴야지.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먼저 만나 백화점에 가서 혜수가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사면 어떨까? 그게 좋을 거 같은데······.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란 생각도 들고. 그 다음에 혜수 좋아하는 것으로 맛있는 식사를 하자. 그게 가장 좋을 거 같은데.”

인혁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견을 지영에게 묻고 있었지만 이미 이대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벌써 지영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있었기에 그대로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거. 어머니한테 가야지.”

“자고 올 거지?”

“그건 힘들어.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아침 일찍 만나야 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지 못해. 대신 다음 주에 가서 자고 오자.”

 

 

 

 

그 약속이 뭔지 잠시 궁금했다. 그러나 하루라는 시간으로 온 가족과 어울리기엔 무척이나 짧아 보였지만 혼자 애를 쓰는 게 기특해 보였다. 아빠의 역할도, 아들의 역할도. 그리고······ 남편의 역할도.

오늘 하루는 이 남자가 계획하는 대로 따라가야만 할 거 같았기에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신도 그동안 하고 싶은 거, 가지고 싶은 거. 미리 생각하고 있어. 나중에 고를 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다가 바로 고르면 좋잖아. 시간도 절약되고.”

순간,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이 잘난 남자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속은 괜찮은 모양이다. 말도 잘하고, 딸과 장난도 치고, 거기다가 아내를 향해 속을 뒤집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잔소리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배앓이는 끝난 모양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다 나아보였다.

이아침, 행복감이 느껴져 왔다. 소소한 일상생활에서의 행복이 여자에겐, 아내에겐,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겐 큰 것을 묻히게 만들었다. 그동안 복잡하고 힘든 감정들은 파도처럼 쓸어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가벼워졌다. 파도들이 철썩거리며 싹 쓸어간 모양이다.

처음 시작은 여기저기서 엉키어 오듯이 정신없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시간과 함께 점차적으로 안정되어 갔으며 어느 한곳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처럼, 상큼한 바다처럼,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다른 것은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그저 이 시간들이 좋을 뿐이다. 단순하면서 소박한 여자는 또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들여져 있었으니까. 윤인혁이란 남자에게 길들여져 있는 단순한 여자이니까.

 

 

 

 

3. 사랑을 꿈꾸는 남자들

 

 

 

 

 

“웃으면 행복이 옵니다. 제목처럼 오늘도 크게 웃으시고 활기찬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팔월의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날씨는 찜통더위를 연상 시킬 정도로 덥습니다. 덥지만 조금은 웃으면서 여유를 가져 보면서 이 더위를 이겨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어김없이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로서 네 번째 녹화방송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긴장의 자락을 놓지 않은 세 사람은 마이크를 내려놓으면서 옆에 놓여 진 물을 마셔가고 있었다. 연수는 연수대로, 석민은 석민대로, 하란은 하란대로 물을 마시면서 휴 하는 한숨소리를 낼 뿐이다.

“그 한숨, 제가 쉬어야 할 거 같은데요.”

옆에서 생수 한 병을 다 마셔가던 연수가 하란을 쳐다보며 농담과 진담을 건네었다.

 

 

“너야말로 이젠 가장 완벽한 아나운서잖아.”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더욱 이번처럼 거의 매일 녹화를 해야 하고, 또 시청률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살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에요.”

 

“그건 그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을 해야 하니까 우리들 부담이 확실히 높은 것은 사실이지. 어설픈 부분들을 편집하고, 고친 다고 하지만 거의 매일 방송되다보니 사실상 생방송이나 다름없잖아. 그래서인지 시청자들이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거 같아. 오른 쪽 얼굴과 왼쪽 얼굴이 달라 보인다, 옷과 화장법이 요란해 보인다, 세 사람이 따로 노는 거 같다, 너무 튀려고 한다.”

 

 

 

연수가 웃고 있었다. 그 사이에 벌써 인터넷을 다 점령한 모양이다. 이제 두 번 방송이 나갔다. 네 번의 녹화를 했지만 두 번은 아직 정규방송 시간에 나가지 않았다.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한 프로는 월요일에 나가고, 오늘 한 것은 화요일에 나갈 것이다. 그 사이에 시청률은 이미 나와 있었으며 세 사람에 대한 분석도 정확하게 나와 있었다.

 

 

 

“그건 결국 관심도가 높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습니다. 반응이 좋아요.”

이 프로의 감독인 영우가 세 사람 곁으로 다가 와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면서 생긋 미소를 지었다.

“박 감독, 웃는 얼굴은 자신감인가? 이제 겨우 두 번 방송 되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죠?”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중년의 연기자인 하란도 결국은 웃어 버렸다. 예능에 잠시 출연했었다. 조 연출자에서 정식 연출자가 되어 이 사람, 저 사람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쉽게 허락을 했다. 그 전에도 조금은 알고 지냈지만 그게 인연이 되어 개인적인 친분을 더 많이 가지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여기까지 왔다. 인연이라면 인연 일 것이다. 자신도 웃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남자, 박영우 연출가는 유난히 웃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였으며 또 웃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잘 어울렸다. 입매가 유독 예뻐 보였으며 사랑스럽게 느껴 질 정도였다.

 

 

 

“즐깁시다. 이미 시작은 했고,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즐기는 겁니다. 우리가 즐기고, 재미있어 하면 시청자들도 즐거워 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첫 방송을 타고, 제가 말했던 거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즐기자고, 진짜로 웃자고.”

 

 

 

석민이 세 사람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한다면 아직은 석민으로서는 세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것도 개인적인 관계라면.

“이 석민 아나운서! 수고했어요. 늘 인사를 해야지 하면서 눈인사만 짓다가 오늘은 제대로 말을 걸어보네요.”

 

 

 

하란이 석민을 향해 최대한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란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완전히 융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방송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고 복잡해서 방송에 보여 지는 그 순간에는 진짜 연기자가 되어 너무나 친한 사람처럼, 친한 친구처럼 행동을 하지만 막상 방송이 끝나면 극과 극이 되는 모습이 많았다.

친하게 보이던 사람과는 짧게 인사를 나누었고, 방송에서 그저 무덤덤하게 있던 사람하고는 방송이 끝나면 언니와 동생이 되고, 친한 선배이자 후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석민만 낙동강 오리알처럼 혼자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함께 즐거움을 나누자고 했지만 막상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이 세계였다. 다른 세상도 이미 나이 든 성인이라면 각자에게 맞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긴 그 관계가 더욱 심했다.

그래서 방송도 이 사람과 연결되면, 저 사람과 연결되고,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세 사람이 그러했다. 단 한 사람, 석민만이 아직 제대로 끼어들지 못한 채 미소만 지으면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석민 아나운서도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네요.”

 

 

 

하란이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연수는 묵묵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지 가장 힘든 사람은 그녀 자신이란 것을 그녀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하란도, 영우도 모른다.

왜 석민과는 농담도 하지 못하고, 그 흔한 미소조차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되지 않는 것을 모른다. 연수는 석민과 조금은 더 친해지려고 말을 주고받는 하란과 영우를 뒤로 하고 먼저 분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을 조금은 더 마시고 싶었는지 모른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해 지독할 정도로 시선을 멈추지 않는 석민의 눈빛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도 쉬어야 했고, 자신도 쉬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