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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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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탄생사...


BY 조 양 희 2010-09-21

매사에 기운이 없다.

엄마는 그렇게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나버렸다.한마디말도없이......

이별의 준비 시간도 주질않고서...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맞이하는 사람은 막내 고모였다.

"고모야!!"

 난 너무도 반가웠다.그래서 고모를 와락 안고 울었다.

그날 저녁. 출근 때문인지 아빠가 잠시 집에 들리셨고 고모와 심한 다툼을 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뭐가 뭔지...

그날 저녁 나는 고모에게 사실데로 이실직고하였다.

아마도 엄마가 집을 나가신것은 나 때문인것 같아서 마음이 편칠 못했다.

 고모는 내가 계모라는 사실을 안다는것에 큰 충격이였나보았다. 그리고 내가 따져 묻듯이 했다.

 나는 왜 엄마가 없었는지를... 엄마 나이 19세. 아빠나이 21세때 만났다고 한다.

 아빠는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하고 5학년때 그냥 돈 벌겠다며 집을 나가서

이일 저일을 닥치는데로 했단다.

 아빠가 술집 웨이터로 일을 하다가 열아홉살의 엄마가 역시 가출을 하여 아빠가 근무하는 술집에

 친구따라 첫출근 하던날 엄마한테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아빠는 그때 당시 벌써 상당한 알부자였단다.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낮에는 중국집 배달부에서 저녁에는 또 술집 웨이터로...

 또 .아빠의 꿈이 복싱 선수여서 간간히 출전을 해서 매달도 획득 할 만큼 실력도 갖추었다 한다.

 그래서 엄마와아빠는 동거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서 '나' 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아빠는 섬처녀를 한명 구해서 나를 키워주고 엄마를 도와줄 도우미를 둘 정도로 재력도 있었단다.

 끔직히도 엄마를 사랑했었단다. 태어나자말자 나는 급성 폐렴으로 부산 아미동의 대학병원에

 인큐베이터생활을 했단다. 혈액도 RH +B형으로 수혈도 힘들었다고한다.

고모의 기억으로 그때 한번씩 병원비를 지급할때마다 현금을 보따리로 주었다고 한다.

 의료보험이 지금처럼 활성화 되지않았었기에....아빠의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 나는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니였을 수 도 있었다고 한다.그렇게 알콩 달콩 소꼽 장난을 살고 있었는데...

 아빠한테 강제 징집이 날라 왔다고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빠는 군대를 가시게 되었고

 한달 가까이쯤 되었을때 외할머니 되시는 분과 겨우 돐 지난 나를 포대기에 업고 와서는

하루이틀만  나를 돌봐달라했단다.

부산에 있는 짐 정리를 다하고서 아빠가 제대할때 까지 할머니집에서 살겠다며....

그렇게 분유 서너통을 남기고서 나를 두고 돌아서는 그 모습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였다 한다.

 아마도 외할머니의 농간이 아니였냐고 다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외할머니 되시는 분이 그때 당시에도 동네 부녀회 회장을 하며 시장상인들을 상대로 아빠가 벌어놓은

 돈으로 일수놀이를 하실정도로 대단(?)한 분이였단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와 생활하게 되었고 군에 계신 아빠는 아무것도 모른채....

아빠가 제대를 하고서도 한참을 엄마를 찾아 방황하시고 다니셨는데도 행방을 찾을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5.6년을 폐인처럼 지내는 아빠를 할머니.할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오랜 설득으로

 그때 나를 돌봐주었던 보모를 새엄마로 결정을 하고 거의 강제로 하다시피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그때 족두리 쓰고 오던 그 날이...그것 조차도 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키워준 사람이 났다고...

그리고 너무 똑똑하지 않아야 나를 구박하지 않고 잘 키워준다는 할아버지의 거센 밀어부침으로...

나의엄마는 배우 윤정희씨를 쏘옥 빼 닮았다고 했다.

그날이후부터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 배우 윤정희씨의 사진을 보면 습관적으로 오려서 노트며 책이며에

고이 간직하게 되었다.

엄마를 상상하며 그리며...

엄마가 보고프고 그리울때면 꺼내어서 가슴에 품고 하염없이 울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