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끌리는 아이
저항 할 수도 없었다. 맥이 빠져 두 팔은 축 늘어졌고 발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주연은 자신의 의식을 깨워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바위처럼 무겁게 자신을 덮치고 있는 남자를 도저히 밀어내 버릴 수가 없었다. 입이 열리지 않았고 소리는 목구멍에서 메아리로 울려 머릿속에 부딪쳤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주연은 자신의 몸을 에워 싼 전류를 부시려 온갖 힘을 다 썼지만 점점 몸이 굳어 감을 느꼈다. 살고 싶다는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강한 일념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드디어 손이 움직여졌고 다리도 움직여졌다. 주연은 눈을 떴다. 가위에 눌린 악몽에서 깨어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일어나 앉았다. 아직 창밖은 어둡고 별도 보이지 않았다. 주연은 새벽이 열리는 하늘에 괜한 짜증을 날렸다.
뜬 눈으로 새벽을 지새우고 여유 있는 출근 준비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 간 주연은 잠시 유비를 생각했다. 아니 그의 아들이 더 궁금해졌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었다는 아이가 어떻게 자랐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딱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주연은 지난 밤 잠자리에 들기까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는 걸 느꼈다. 그래서 다시 악몽을 꾸었나 보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울을 보는데 뭔가 가슴을 짓눌려 오는 느낌에 등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평소에 자주 있었던 증상이다. 주연은 오늘따라 더 심한 듯해서 욕조에 걸터앉아 눈을 꾹 감았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잃은 것과 부모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진 삶의 운명은 결코 선택권 없는 명줄을 쥐어야 했겠지. 그 핏덩이는 가여움 보다 미움이 컸기에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독하게 명줄을 놓아 버렸지. 결코 천벌 받을 일은 아니었어.
주연은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가슴을 짓눌러 오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돌아보지 않고 명줄을 놓아 버린 핏덩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 한때 잠잠하더니 왜 하필 다시 시작을 하는지. 주연은 전날 본 맞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나갔어. 하고 자책을 했다.
총각인 유비가 아이를 입양하여 기른다. 주연은 듣지 않아야 되는 말을 들었다고 후회를 했다. 다시 가슴속이 답답해져오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주연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거울을 주시하였다.
그 핏덩이를 두 눈 속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시려오는 눈을 감당 못하고 다시 감고 말았다. 주연은 차라리 두 눈으로 핏덩이의 존재를 확인이라도 해야 잊어지려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전날 유비를 만나고 그의 양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였다.
그나마 간간히 떠오르던 핏덩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젠 징소리처럼 울려오는 것이었다. 급기야 가슴속까지 쿵쿵 후벼대니 주연은 머리를 크게 흔들어 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머리를 감았다. 화장을 마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시간이 넉넉한데 식욕이 나지 않았다. 주연은 냉수만 한 컵 마시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받아 놓은 숙제처럼 유비를 떠올렸다. 뭔가 답을 내야 할 것 같아 고민하며 고개를 약간 오른 쪽으로 젖혔다. 한참을 생각해도 정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주연은 휴대폰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담장 위를 온통 가릴 듯 얽혀서 서로 가지를 내어 밀고 있는 넝쿨장미. 빨간 꽃송이들이 싱싱하게 멋을 내고 있었다. 며칠 사이 피워 낸 꽃송이가 많아 보여 주연은 눈으로 세어 보았다. 스물 한 송이가 넘자 숫자 세기를 멈추었다. 스물 하나는 주연에게 마음 아픈 숫자다.
주연은 진한 빨강색의 장미꽃을 참 좋아한다.
가시가 있어서 함부로 누가 꺾어 갈 수 없는 그 도도함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주연은 자신의 몸에도 가시들이 수 없이 솟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 다시 길게 한숨을 내어 쉬던 주연은 유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번 본 얼굴인데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첫눈에 사람 좋아 보이고 성격이 넉넉해 보여 호감이 갔다. 남자 앞에서 가슴이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 주연은 왠지 낯설지 않은 유비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정말 처음으로 자신이 여자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이없는 말을 하여 충격을 주었다.
아이가 있다고. 그것도 총각이 양자를 들여서.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그걸 이해하라고? 하필 날더러 어쩌라고. 여기까지. 주연은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했다.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명줄을 놓아 버린 핏덩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주연. 비양심적인 자신을 속이며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살아 온 나날. 그 치욕. 고통. 아픔의 생지옥을 혼자서 감내했던 주연은 결혼의 꿈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유비를 만나고 처음으로 마음이 열렸다. 한 순간이지만 유비와는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유비의 입에서 아이가 있다는 고백을 듣기 전까지.
주연은 유비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미혼에 양자를 기를 수가 있었을까? 솔직히 아이만 없다면 주연이 지금 당장 결혼하겠다고 말 할 것 같았다.
콩깍지라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주연은 남들이 말하는 콩깍지라는 뜻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었다. 한 번 만났는데 이렇게 유비가 마음에 들다니. 주연의 머릿속은 그림책속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꽃길을 걷느냐. 가시 밭 길을 걷느냐. 주연은 기로에서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 해결책은 유비가 아이를 떼놓겠다며 결혼하자고 말해주는 것인데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주연의 유일한 희망사항이었다. 도대체 유비에게서 아이는 무엇일까? 그것도 양자인데. 주연은 자신이 놓아 버린 핏덩이보다 유비가 거둔 양자 아이가 궁금해졌다. 그 아이를 보면 주연이 평생을 마음속에 감추고 살아야 할 멍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연은 아직 출근 시간이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생각을 모았다.
스물여섯 살이 되도록 남자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혼자 살 작정이었다. 그랬는데 필연인지 악연인지 유비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주연은 짧은 순간 인연인가 했었다. 고집했던 고독에서 손을 뻗어 짝을 잡고 싶어졌었다. 그랬는데 생각지 못했던 아이라는 강이 가로 놓였다. 인생을 걸고 건너느냐 포기 하느냐 이 시점에서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주연은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주연은 시계를 보았다. 악몽을 꾸느라 새벽잠을 설쳤던 탓에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맑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던 주연이 눈을 힘주어 깜박거렸다. 눈이 시릴 때 하던 습관이다. 주연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가끔씩 눈이 시릴 때 쓰는 인공 눈물 점안 액을 집어 들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두 눈에 두어 방울씩 넣었다. 주르륵 눈물처럼 액이 흘러내렸다. 티슈를 뽑아 닦다가 5년 전 숱하게 눈물 흘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 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 눈물이 났었다.
방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곤 했었다. 주연은 그 후 철저히 이성을 외면하고 살았다. 그랬는데 정작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가 보다. 하룻밤 사이에 한 남자의 얼굴로 마음을 도벽하게 될 줄 주연은 정말 예상 못했었다.
스물여섯의 얼굴 나이보다 서른이 훨씬 넘었을 것 같은 마음의 나이로 그저 덤덤하게 살아온 주연. 스물두 살에 스스로 잠근 청춘의 덫은 그렇게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로 덫을 끊어 낼 수 없었던 주연. 그래서 철저히 사수한 고독의 영역에 마술처럼 다가온 한 남자. 유비.
주연은 이렇게 누군가가 예고 없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가 숙명처럼 마음을 열고 들어 왔다면 그의 아이도 끊을 수 없는 어떤 끈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만나보고 나서 인연인지 악연인지 결정하자. 그래도 서로에게 폐는 되지 않겠지.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주연은 작심한 듯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 전화를 걸지 않으면 평생 후회 할지 몰라. 주연은 자신에게 용기를 주며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유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주연씨군요.”
몹시 기다렸던 듯 반색하는 유비의 목소리가 들려와 주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를 만나보고 싶어요.”
마치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가족을 대하듯 그의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단숨에 해버렸다. 약속을 하고 핸드폰을 닫는 순간 주연의 온 몸에 찌릿 하는 전율이 느껴졌다. 잘했어. 일단 아이를 만나보고 그 다음에 마음가는대로 결정할 거야. 주연은 골치 아팠던 수학 문제를 풀어내고 느끼는 뿌듯한 마음으로 출근을 서둘렀다.
생각보다 빨리 주연의 마음을 얻은 유비는 운명이라 여겼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아내와 아들의 엄마가 되어줄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어요. 유비는 주연을 만나게 된 것을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라 여기고 감격스러워했다.
하루 종일 즐겁고 행복해서 마음이 들뜨는 걸 숨길수가 없었다.
그러는 유비에게 주위에서는 좋은 일 있는가 보다고 지레 짐작들을 하였다.
유비는 미리 퇴근하여 직접 유치원에 가서 수업중인 아들 성이를 데리고 나왔다. 약속시간보다 두 시간 전이지만 성이를 이발소에 데리고 가서 단정하고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다듬게 하고 다시 아동복 가게로 데려갔다.
"아빠! 오늘 무슨 날이야?"
"음, 엄마 만나는 날이야."
"엄마? 엄마가 왔어? 언제?"
"응, 미국에서 어제 왔단다. 그래서 성이를 만나고 싶어 해."
"엄마가 왔어? 이제 아픈데 다 나았어?"
"그래, 엄마 만나면 성이가 엄마 사랑한다고 꼭 안아주어야 한다."
"응. 알았어."
유비는 이미 주연이 성이를 보면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렸다.
처음 유비와 주연이 만났던 공원의 그 때 그 벤치에 유비는 성이를 데리고 가서 앉았다. 성이에게 비스킷과 음료를 먹게 하고 유비는 신문을 들어 한 장씩 넘겨보며 주연을 기다렸다.
잠시 후 약속 시간인 오후 여섯시 이십분이 되자 주연이 공원 입구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유비가 먼저 보고 일어서자 성이도 과자를 먹다가 아빠를 따라서 일어섰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주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두 눈이 성이의 얼굴에 멎었다. 그리고 대 여섯 걸음 정도 남겨두고 주연의 걸음이 갑자기 딱 멈추었다. 성이를 바라보던 눈이 점점 커지고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빠! 엄마야?"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이가 주연에게 달려갔다. 주연은 엉겁결에 성이에게 두 팔을 벌려 안겨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