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첫 단추
유비의 눈이 번쩍 광채를 발사했다. 하마터면 벌떡 엉덩이를 일으켜 설 뻔했다.
그녀는 약간의 미소와 함께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숙이며 눈인사를 하였다. 유비는 천천히 일어서 맞이하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유비를 마주보는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유비는 당황하였던 자신의 태도를 들키지 않았음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긴장을 감추려 물 컵을 가져다 입술에 대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유비의 얼굴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지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가를 움직여 살짝 웃음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비가 물 컵을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네, 반갑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지요?"
주연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상냥하게 인사말을 했다.
"아, 아니요. 저도 조금 전에 도착 했습니다."
유비는 전혀 초면인 듯 생소한 얼굴로 괜히 겸연쩍어 했다.
주연은 유비를 슬쩍 훑어보았다. 들었던 바와 다름없는 인상에 먼저 호감을 느꼈다. 쌍꺼풀 없는 눈, 그리고 반듯한 콧날,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넓어 보이는 이마에 주연의 시선이 마침표를 찍었다. 높은 점수에.
너무 크지 않은 키도 부담 없어 좋다. 알맞게 벌어진 어깨도 마음에 들어. 반팔 아래로 보이는 팔뚝의 근육이 부지런해 보여 남자답다. 거기에 굵지도 가늘지도 않는 목소리가 경쾌하여 듣기 좋다. 이만하면 괜찮겠어. 주연은 마음이 흡족하여 미소를 지었다.
유비역시 지난 세월만큼 변한 주연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드디어 차를 주문 받으러 종업원이 다가왔다. 머리칼을 가지런하게 빗어 말아 올려 깔끔해 보이는 소녀였다. 유비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고 주연에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 주연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유비도 갈증이 나던 참이라 같은 걸로 시켰다.
유비는 커피 한 모금을 쭉 마시고 얼음 한 조각까지 입에 넣고 나서 주연을 바라보았다. 가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주연이 유비를 돌아봐 둘이는 눈이 마주쳤다.
유비가 먼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주연의 맑은 눈을 바로 보며 얘기 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주연 역시 자리가 어색한지 입을 떼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밖으로 나갈까요?"
유비가 이렇게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은 걸맞지 않는 옷을 벗어 내리듯 홀가분하게 일어섰다. 평소 찻집을 드나드는 성격이 아니어서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9월에 들어선 기온은 초가을의 날씨였다. 제법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수령이 어림잡아 일 세기를 살았을 것 같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였다. 아직 여물지 않았을 것 같은 은행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아마 며칠 전 내렸던 장대비를 온 몸으로 맞아 그리 되었으리라 주연은 짐작했다.
처서가 지나도 식을 줄 모르던 더위가 백로에 밀려 간 듯 공원은 제법 선선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들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유비는 연인인 듯 손잡고 거니는 젊은이들 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바라보았다.
주연은 우선 앉을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미소를 보냈다. 또 꼬마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보며 생끗 웃어주었다.
“우리 저기에 앉을까요?”
유비가 적당하게 그늘진 곳에 비어 있는 나무벤치를 가리켰다.
“네. 그러죠.”
주연이 좋다고 하자 유비는 안내하듯 성큼 앞서서 나무벤치 앞에 가 걸음을 멈추었다. 주연은 유비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코가 곧게 뻗어 길고 높았다. 얼굴 옆선의 윤곽이 차분해 보였다. 적당히 다듬은 머리칼이 전체적으로 깔끔하였다. 아직 드러내지 않은 성격 또한 유순 할 것 같다고 미루어 짐작을 하는 중이었다.
유비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깔아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 주연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주연이 답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주연을 바라보는 유비의 가슴이 울컥하였다. 주연의 얼굴에서 읽어내는 지난 세월만큼의 무게가 자신을 아프게 했다. 유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에 힘을 주어 감았다 뜨면서 양심을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 뜨려 어깨를 덮게 한 주연은 고개를 끄덕하며
“고맙습니다.”
하였다. 초면의 남자가 베풀어 주는 호의지만 주연은 사양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열어 버렸으니까. 주연은 긴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등 뒤로 쓸어 넘기면서 손수건 위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유비는 잠시 서서 그러는 주연을 바라보았다.
쇠골 뼈가 약간 들어 나 보이는 원피스는 아이보리색으로 단아하면서 화려해 보였다. 거기에 긴 소매 끝에 레이스가 달려 그녀를 한껏 여성스럽게 강조해 주었다.
때마침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은은한 향이 풍겨져 나왔다. 숲 어느 나무에서인지 주연의 긴 머리칼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유비는 그 향기를 맡으려 코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선이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 하는지 애잔해 보였지만, 상큼하게 웃는 미소만은 아직도 유비를 취하게 했다.
이 순간 주연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유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루어진 만남인데, 우린 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있어. 제발 우리는 만나야 할 인연인 것을. 네가 느껴주었으면 좋겠다. 유비는 마음으로 주연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유비는 생각보다 더 긴장감에 마음이 떨려와 숨을 길게 내 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때마침 불어와 주는 바람에 마음의 열을 식히며 유비는 입을 열었다.
"주연씨는 우리가 이렇게 맞선으로 만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준비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런데 마치 외워 두었던 것처럼 삼류 대사가 주저 없이 입을 통해 나와 버렸다. 막상 하고 싶었던 멋진 대사는 어디로 숨었는지, 촌스런 말을 해 놓고 유비는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즉답 없이 먼저 빙그레 웃어주었다. 유비는 왼 손 가운데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씩 따라 웃었다.
주연이 뜸을 들인 다음 유비를 보며 오른쪽 가슴위로 모아 내려진 머리칼을 손으로 잡아 뒤로 젖혀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면 하늘의 뜻이겠죠. 다음으로 금생에서의 필연적인 인연이라면 피할 수 없는 만남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인의 소개로 이루어진 맞선을 가벼이 생각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유비는 기대했던 대답 이상으로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주연이 고마웠다.
“주연씨가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고맙고 이렇게 만남의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절대 무의미한 시간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의 진심이 그 쪽의 관심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호호.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인께서 말씀해 주셨지만 그 쪽의 솔직한 마음을 보고 싶어요.”
“네. 하하. 좀 쑥스럽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겠습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나이에 주연씨에게 처음으로 제 마음을 열어 보이려 하니 좀 떨리기도 합니다. 하하.”
주연은 진지하게 들어 보겠다는 의지로 고개를 들어 유비를 쳐다보았다.
유비의 눈빛이 진실을 담은 듯 가슴으로 흘러 들어와 순간 온 몸에 오싹한 전류가 흐름을 느꼈다. 그래서 주연은 숨을 참으려 가늘게 들이쉬고 내 쉬었다.
뭔가 모르겠는데 마음이 쩡~하고 울려와 표현 할 수 없는 뜨거운 열이 되어 절로 숨을 참게 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첫 단추는 꿰어지고 말았다.
2008-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