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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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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분수 (4)


BY 둘리나라 2007-09-16

 

그는 고깃배를 타는 전형적인 뱃사람이었다. 새벽이면 불을 밝히는 바다 위에서 은빛 비늘과 생의 사투를 벌이는 서른 살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자였다.

스물셋. 버림받은 스물셋의 삶을 강 도식이라는 남자가 책임지려 하고 있었다. 그냥 막연하게 남자의 가슴에 안겨 이제는 쉬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일순간 감정에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내 외로움을 달래준다며 큰소리치는 그가 왠지 싫지 않았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우직함과 두둑한 배짱과 듬직한 모습에, 이 남자는 믿어도 괜찮으리라는 믿음이 가슴 구석부터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싶은 정말 사랑만을 위해 살고픈 바람도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의 종말을 보았으니 가슴시린 사랑 속에 결혼생활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몇 달의 사귐 후 우리는 작은방 하나를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함께 잠이 들고, 함께 눈을 뜨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고 지냈다.

그는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전 남편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성(性)이라는 신비스런 육체의 절대감각에 눈을 뜨면서 자연스럽게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갔다. 부부 사이의 가장 완벽한 언어는 성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있던 열정에 놀라 환희의 소리도 저절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남편의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손길에 세포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절정의 기쁨에 황홀한 하루하루가 오르가슴의 연속이었다.

부부 사이에 육체적 사랑이 없으면 정신적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들이다. 자신들이 육체가 가져다주는 만족감과 쾌락의 최고조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을 운운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기기 이전부터 세상에 존재해온 종족 번식의 본능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 잠재되어있는데 단지 발견을 못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성은 신비스럽고 놀라웠다. 신이 생명에게 준 가장 최고의 즐거움은 바로 음과 양의 결합이며, 지상 최대의 선물은 인간들이 나누는 성의 오묘함이 아닐까? 나는 이 남자 강 도식이 없으면 가슴이 허전하고 왠지 불안하고 밤이 외로웠다. 벌떡거리는 활어처럼 나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심장소리를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온몸이 녹작지근하고 만사에 의욕이 사라졌다. 이것이 속궁합이 맞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 몸에는 천성적으로 더러운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까! 어떤 때는 무서웠다. 꿈에 엄마를 본 날은 살에서 피가 나도록 문지르고 문질렀지만 심장으로 모여드는 강한 색의 유혹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성에 집착하고 속된말로 밝히는 여자로 변해가는 육체를 말려야 하는 정신조차 성의 노예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잠자리에서 나의 만족을 보는 일을 좋아했고 그의 강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장에서는 별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고 불꽃이 한꺼번에 터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리는 말 그대로 속궁합이 완벽한 부부였었다.

동네에서 부러워하는 잉꼬부부로 불리며 마음껏 사랑하며 살았다. 그러나 신은 정해진 내 운명으로 돌아가라고 짜인 톱니바퀴 속으로 막무가내 등을 떠다밀었다. 행복 뒤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너무 좋아서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 실수였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여자 김 연희의 인생에 행복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음을 망각하고 잠시나마 기쁨을 누렸던 벌을, 죽음보다 깊은 절망의 고통으로 뒤쫓아 와 막다른 골목에 나를 몰아세우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나는 벌거숭이의 몸으로 저항 한번 못하고 고스란히 맨몸뚱이에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무참히 입고 나동그라졌다.


남편이 혼인신고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몇 년을 미루던 나는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바라보는 그를 거짓말로 이해시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은 속이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했었다는 것과 도망을 나왔다는 것. 그 뒤로 연락을 안 해서 이혼이 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것. 차마 엄마와 남편의 관계는 말할 수가 없어 의처증에 못 이겨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아픔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아니 믿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위로하고 안아줄 줄 알았다. 그만큼 날 사랑했기에 내 과거도 사랑해주리라 어리석게도 믿었다.


“당신에게 처음부터 전부 다 얘기하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졌어요. 미안해요. 나…… 용서해줄 수 있죠?”

“아니 절대로 용서 못 해!”


남편의 입에서 나온 독화살들이 무방비상태인 나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살점에 독이 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기치도 못했던 반응에 목까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떨려왔다. 아무 말 없이 연방 소주잔을 털어 넣던 남편이 술병을 벽을 향해 던졌다. ‘퍽’ 소리가 나며 파편들이 방바닥에서 신음을 냈다. 벽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알코올은 세포증식을 하듯 자꾸만 괴기스럽게 커졌다.

두려움. 가마득히 잘려나갔던 기억 한 뭉치가 ‘쿵’ 소리를 내며 내 발 앞에 떨어졌다. 알몸의 엄마와 남편이 부둥켜안고 쾌락의 교성을 지르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귀를 막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 이건 악몽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넌 처음부터 순진한 얼굴로 나를 속였어. 가면을 쓰고 말이야. 계획적으로 나를 만났지. 그렇지? 나쁜 년. 혼자 있다니까 속이기 좋다 싶어 나를 택한 거지. 더러운 년!”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당신을 사랑했어. 제발 믿어줘요.”

“흥. 너를 믿느니 길거리에 개가 교미 안 한다는 말을 믿겠다. 쓰벌. 나랑 할 때는 그놈 생각 안 나던. 내가 더 잘해주니 있은 거지 으흐흐. 나 만나기 전에는 밑이 근지러워 어떻게 살았냐. 쓰벌.”


그의 입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상스러운 욕들이 터져 나왔고 지금까지 사랑하고 살을 섞고 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들이 이어졌다. 엄마와 남편이 저지른 신도 인정하지 않은 불륜을 가슴속에 담아둔 일이 그만큼 용서받지 못할 죄란 말인가. 상처를 입고 쓰러진 건 나인데 왜 나에게 손가락질과 욕설을 한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질서가 안 잡힌 유치원생의 줄 서기처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끝까지 엄마는 내 인생의 악랄한 방해자였다.

매일 밤마다 뜨거운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주던 남편이 과연 맞는지 의심이 갔다. 또다시 소용돌이 속에서 절망을 향해 슬픈 눈을 떠야만 하는가에 대한 불안하고 숨 막히는 의문으로 세포와 신경들이 곤두섰다.

그날부터였다. 남편의 모질고도 끈질긴 구타가 시작된 것이.

깨진 술병 위에서 술을 또 병째 마시기에 술병을 뺐었는데 뺨으로 손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찰싹!’ 정적이 흐르던 방안에 소름이 돋도록 날카로운 소리가 뺨에서 터져 나왔다. 눈앞에 불이 번쩍하며 몸이 약하게 휘청거렸다. 놀라서 쳐다보았더니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에는 핏발이 선 살기가 가득했다. 등과 가슴에 발이 쉴 새 없이 폭력의 도장을 찍었다. 발이 닿은 곳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뼈까지 아릿한 아픔이 스며들었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뺨 한대 안 맞고 컸는데 강자의 폭력 앞에 무참히 쓰러지는 약자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 구석구석을 칼로 찌르듯이 경련이 일고 숨을 못 쉴 만큼 아파왔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을 담당하는 세포들이 감각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정신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갈비뼈에서 통증이 심하게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래쪽의 느낌이 이상해 간신히 머리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바지가 돌돌 말려 벗겨져 있었다. 허벅지 주변에는 끈적끈적한 액체들이 비린내를 풍기며 아메바처럼 얼룩덜룩 붙어 있었다. 순간, 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살면서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없어졌던 구역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양손으로 안간힘을 다해 벽을 잡고 일어서서 거울을 보았다. 코에서 터진 피가 얼굴에서 목까지 뱀처럼 늘어져 말라붙어 있었다. 빨간 뱀 한 마리가 코에서 나와 심장으로 들어가려 했던 걸까? 몸속을 돌아다니던 엄마에게 물려받은 화냥기가 밖으로 빠져나온 걸까? 나는 한참을 말라붙은 핏덩어리를 만지며 엄마라는 존재를 심하게 아주 심하게 원망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부어올라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대면 터져 버릴 듯이 부풀어 오른 얼굴은 풍선이었다. 정말 사람의 모습이 맞는지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어 거울을 방바닥에 던져버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은빛 생선비늘이 되었다.

바다를 향해 지느러미를 힘차게 움직이는 물고기의 내장들이 방안에 가득 차며 역한 비린내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공간에 하얀 물방울을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 내장도 없는 물고기들이 머리 위를 다리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난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속이 뒤집혀라 구역질을 해댔다.

웩, 웩. 속이 뒤집어져라 발악을 하니 눈가에 비릿한 방울들이 매달리더니 밀려오는 파도 위에 떨어졌다. 방울들이 떨어질 때마다 물고기들이 파도에 휩쓸려 차츰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상처 난 가슴과 무너진 사랑의 잔해뿐이었다. 아! 정말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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