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급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은 박종철이었다.
흠칫하는 그녀의 손을 준수가 야무지게 잡았다.
[김사장이 뭔가를 오해 한 모양인데, 나와 잠깐 얘기좀 합시다. 내 설명할테니...!]
다짜고짜 박종철은 말을 쏟아냈다. 무언가 절박해 보였다.
심각한 표정이 그러했고 다급한 듯한 말투가 그러했다. 그런 박종철의 모습을 보면서 설은 불현듯, 예전 자신의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사정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번만...한번만...다시 한번만 생각해 달라고...
하지만 누구 한사람 아버지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지금 준수한테 메달리고 있는 것이다.
박종철은 준수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듯 하고 있는 설을 발견하고는 멈칫하더니 입매를 비틀었다.
놀란 눈치였다.
설마했는데... 역시인가...하는...!
아마도 박진호한테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준수에 대해 알아보았을 터였다.
그가 뉴욕 법조계에서 미친개로 통했던 인물이라는 것...
물었다하면 놓치 않는....!
그래서 덜컥. 겁이 났겠지...
박종철은 분노를 담은 얼굴로 설을 보았다.
[김사장, 설마. 저 애가 하는 말을 다 믿는 건 아니겠지요? 지 아비가 나때문에 죽었다는 억지로 사는 애인데...!]
[그 말!]
박종철의 말을 준수가 냉정하고 사납게 가로막았다.
[조심하는게 좋을 겁니다. 아마도, 조만간, 법원에서 소식이 날아들텐데 입 조심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수의 말에 박종철의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지금쯤...본사가 있는 미국으로 가신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범하십니다? 회장님께 당한 사람들이 이미 소송 준비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연락을 받지 못하셨나 봅니다]
박종철의 얼굴빛이 낯빛이 되었다. 설마하는 표정이다.
준수가 비웃었다.
[아니면...다른 일로 오셨는지... 설마, 제 아내를 모독하기 위해서 왔다면...?]
박종철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말이 없었다. 그저 설을 노려만 보았다.
설은 그런 박종철을 지지않고 노려보았다.
[또...뵙게 되는군요, 아저씨]
조용한 음성으로 설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표정은 싸늘했다.
[무언가 잘 안되는 것 같아 보이는군요... 그렇다해도 그건 인과응보예요. 죄를 지으셨다면 응당 그 죄값을 받아야겠죠.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입다물어, 니 까짓...!]
박종철은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준수의 인상에 입을 다물었다.
잘못 걸렸어...
박종철은 설을 데리고 휭하니 몸을 돌려 사라지는 준수를 보며 휘청하는 몸을 애써 가누었다.
정말이지 잘못 건드렸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 박종철은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이제껏 마음먹어 안되는게 없었다. 뜻대로 되었다. 그런데...!
저 건방지고 오만방자한 젊은 놈 때문에 모든게 한순간에 무너질 상황에 이르렀다.
하필...
하필 저 계집애 옆에 저 놈이 있을 게 무어란 말인가...
어떻게 저 윤설이 저런 거물을 잡았단 말인가...!
2.
[정말이예요? 박종철 아저씨가 법정에 서는건가요?]
전용엘리베이트에 타자마자 그녀는 준수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그렇게 될수있다면 아마도 저승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으음...]
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을 가만히 당겨 안았다.
그녀는 준수가 사심(?)을 갖고 자신을 당겨 안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채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아버지께 한 짓 말고 또 저지른 게 있는거군요?]
[그래. 주식 조작. ..]
준수가 가만히 그녀의 코트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허위 유포설로 다른 회사를 낼름 한 사건...]
그녀를 자신에게로 바짝 당겨 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 얼굴위로 고개를 숙였다.
헉...!
그제야 눈치 꼽은 그녀의 얼굴이 벌개졌다.
[거기다...사기죄...]
그녀는 자신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러 오는 그의 욕망덩어리를 감지했다.
친숙하면서도 낯설은 통증이 불현듯 찾아오자 그녀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착 가라앉은 깊은 눈동자로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아....
다른 생각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
그녀의 눈꺼풀이 사르르 닫히면서 팔이 절로 움직여 그의 목에 감겼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먹이를 찾은 사냥매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입술을 집어 삼키며 그 뜨거운 혀로 가지런한 이를 싸악. 훑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 틈사이로 혀를 집어 넣어, 무언가를 찾듯이 입안 구석구석 샅샅이 휩쓸었다.
머리속이 빙글도는 것 같고 다리에 힘이 풀려 설은 자신이 그에게 메달리다시피 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가 주는 느낌..설은 어떤 것인지 안다. 알기에 그저 키스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고 그 다음에 올 짜릿한 쾌감을 기억하고는 기대로 몸을 떠는 것이다.
징--
엘리베이트가 열렸다.
먼저 입술을 뗀 준수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품안의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몽환적인 눈빛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다.
그 모습에 욕망이 인다.
자신이 주는 것에 취해 있는 그녀를 그대로 안고 그녀의 아늑하고 그 깊은 곳으로 침몰하고 싶었다.
하고 싶다...가지고 싶다...
하지만...젠장.
신여사와 점심 약속이 있지 않는가.
그가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쳤다.
[내려]
그녀가 곱게 눈을 흘기자 준수는 소리죽여 웃었다.
기다려....밤은 길고 또 수많은 날들이 있으니깐...
3.
세 사람이 호텔 레스토랑 창가, 전망 좋은 쪽에 자리를 했다.
[현수는 오늘 은행쪽 사람들과 미팅이 있어 참석 못했어. 괜찮지?]
그녀에게 한 말이다.
[네, 어머님]
그녀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신여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번갈아 준수와 설을 쳐다보았다.
유달리 설의 모습이 반작반짝 거린다.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친다.
이상하지?...저 놈이 저 애를 밤새도록 고이 접어 옆에 누이고 자장가를 불러 주지는 않았을텐데...
어찌 피로한 기색이 전혀 없을까...
신여사는 한쪽 입가를 치켜세우며 자신을 빤히 보는 준수를 마주보았다.
[쟤가 아주 생생하구나. 너, 긴장해야 하는거 아니냐?]
하면서 신여사가 사악하게 한번 웃었다.
준수의 눈썹이 싸악. 올라갔다. 그것을 신여사는 무시하고 시선을 다시 설에게 향했다.
[너에게 줄것이 있어서 불렀다. 일단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꾸나]
차를 마시면서 신여사는 그녀 앞에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풀어보거라]
의아한 눈빛으로 설은 조심스레 보자기를 풀었다.
고급상자다. 척봐도 보석상자다.
힉...!
다이아세트...그리고 진주세트...그리고...이, 이건 무슨 보석이더라? 이것도...힉! 도대체...!
숨이 막혔다. 그 찬란함에, 그 종류에
눈이 부셨다. 그녀의 눈이 준수를 보고 신여사를 보았다.
[예물이다. 내가 며느리인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저기, 어머님...!]
[놀랄것없다. 현수의 첫 부인이었던 그 망할 것한테도 해 준 것이니 고마워할 것도 없어]
준수는 안다. 신여사가 현수의 전부인에게 해준 건 다이아 하나였다. 그것도 한정판의 최상품...
그것 또한 현수의 전부인이 요구했던 물품이었다.
그런데 신여사는 설에게 보석이란 보석 종류는 죄다 해 준 것이다.
준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과하십니다, 어머니. 이런 걸로 이 녀석 환심을 사겠다는 겁니까?
내 맘이다, 이놈아. 상관말아. 내 며느리이기도 해! 며느리 재능 좀 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저, 어머님]
[오냐. 말해보거라. 마음에 드니?]
[네에...그런데...]
설이 빙긋 웃었다.
[그런데 너무 과해서...조금은 겁나요, 어머님. 저 버릇 나빠질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신여사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준수의 꽉 다문 입매가 씨익 올라갔다.
이 녀석, 머리 나쁘지 않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어머니의 패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빙 둘러 얘기할 필요가 없겠군.
[뭐, 투자라고 생각하거라, 그럼...하지만 그 다이아는 원래 시어머니가 해주는 거야. 이 놈아, 어서 손에 끼워줘]
신여사는 얄미운 자신의 아들을 째려보았다.
준수는 얼른 다이아반지를 집어 들었다.
[내가 할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당신이 해주시겠다고 하셨어. 하지만 네말대로 나머지는 좀 과해. 그렇지?]
반지는 그녀의 손에 꼭 맞았다. 알이 굵지도 작지도 않게 딱 보기 좋았다.
[살면서 내가 너에게 하나 하나 해주려고 했는데 그 기쁨을 어머니께서 깡그리 무시하신거야]
[놈, 말하는 것 봐라]
신여사가 콧방귀를 뀌자 설은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신여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감사해요. 저, 마르고 닳도록 열심히 하고 다닐게요]
[뭐...정 고마우면 네가 나를 가끔 도와주면 돼]
신여사의 본심이 나왔다.준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저, 몇달후면 뉴욕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때, 이 녀석도 데려갑니다]
그녀의 말을 막으며 준수가 사무적인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뭐야?]
외마디 놀란 신여사의 말에 설 또한 놀란 눈으로 준수를 보았다.
그...렇게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