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나도 너 별로야]
설은 담담한 얼굴로 지원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난 너처럼 그렇게 꼬여있지는 않아. 빙 둘러서 말하는 재주도 없고... ]
[웃겨, 너. 마치 날 아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마. 기분나빠]
새침하고 차갑게 지원이 쏘았다.
[기분 나쁜건 아니? 너는 상처받는게 싫으면서 왜 다른 사람들에겐 상처되는 말을 함부로 하니?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 글쎄...난 아니라고 봐. 네가 날 보자고 한 게 그 증거가 아닌가 싶어. 지원아. 넌 아름답고 능력있는 친구야. 그런데 왜 그렇게 삐딱하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니?]
[너 지금 나한테 설교하니? 천하의 김준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지금 잘난척 하는거야?]
[준수씨와는 상관없는 얘기야. 그리고 어쩌면...준수씨보다 내가 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너 그거아니? 준수씨가 내게 사랑이 아니더라도 난 아마 준수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했을거야. 왠지 알아? 그 사람...아무도,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았을 때 조건없이...정말 아무런 조건없이 날 도와줬어. 그런데 내가 준수씨에게 날 가지라고 했어. 이자대신으로...]
[......!]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내 삶은 없을것 같았어. 그 사람...화를 냈어. 돌아가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그런데 내가 고집부렸던거야. 그리고 그 날 이후...다시는 그 사람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5년이나 지난 후 우린 다시 만났어. 돈때문에... 난 반드시 갚겠다고 했고 준수씨는 받을 수 없다고 했고...그러다보니 어느날 깨닫게 된거야. 내가 준수씨를 많이...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네 말대로 그 사람, 내겐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준수씨도 날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고...]
[네 사랑 얘기 들을 만큼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
[알아. 다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가 가진 배경때문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은 거야. 그리고 내가 널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
[너 정말 웃긴다. 그러면 내가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릴까봐? 그걸 기대한거니?]
지원의 여전히 쌀쌀한 말투에도 설은 그저 피식 웃었다.
[한지원의 자존심에 그럴 일은 없겠지. 나도 기대하지 않아]
설은 진지한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네 꿈을 버리지 마, 한지원]
그녀의 말에 지원이 고개를 돌려 설을 보았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넌 유능한 비서야. 한번의 실수로 너의 그 재능을 놓치지 말라는 소리야. 네 사표.. 아직 보류야]
지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다. 아니 믿을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김준수의 성격상 해고를 해도 열두번은 더 했을텐데...아직 사표가 보류라니...
지원의 눈이 다시 작아졌다.
[너니? 네가 해고하지 말라고 했니? 내가 너에게 한 짓을 알고도 말이야?]
[그건 어디까지나 너와 나의 문제잖아. 지원이 네가 회사에 해를 끼친것도 아니고...하지만 너, 준수씨 밑에서는 다시 일하지는 못할거야. 다른 부서로 발령나겠지? 알지?]
[일없어. 난 이미 사표 썼어. 다른 곳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너한테 도움따위 받지 않아]
[도와주는 거 아니야. 솔직히 너처럼 똑똑한 애가 다른 경쟁 업체에 가는 건...준수씨한테 손해가 아닐까?...그리고 이모가 그러는데 그 사람 회사만큼 좋은 곳이 없다며?...너도 힘들게 들어갔을 거 아니야. 놓치지 마]
[내 문제야. 네가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나 스카웃 하겠다는 곳 많아]
여전히 가시돋친 말이다. 그래도 설은 이제 상관없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조건이 좋은 곳은 흔하지 않겠지. 이왕이면 네 능력 알아주는 곳이 좋지 않아?]
[그런 얘긴 너와 하고 싶지 않아]
딱 잘라 지원이 말했다. 설은 나즉히 함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미우면 무슨 짓이든 못하랴... 이해가 간다.
자신 또한 박종철과 박진호를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분노했던가...
지원이 자신에게 한 짓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에 어쩌면 지원이의 자신에 대한 미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지원. 내가 왜 그렇게 미운데? 내가 너에게 잘못 한 게 있어?]
정말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지원은 말이 없었다. 그저 굳은 얼굴로 음료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는사이 문자가 왔다. 준수다.
-아직도 한지원과 함께야? 데리러 갈까?-
설은 웃었다.
-아뇨...-
라고 답장을 보냈다.
[말...하기 싫은거니?]
재차 물어도 말이 없다. 설은 그런 지원 옆에서 자신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이제 1월이 막바지다. 이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날만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언제나 2등 인생이었어]
지원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보다 공부를 잘해도 집에선 언제나 오빠가 우선이었어. 공부 잘하는 내가 오빠 기를 죽인다고 대놓고 핀잔도 줬어. 그런데 난 그게 싫어서 오기로 더 열심히 공부를 했어. 하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더라. 인정받고 싶었는데도 부모님은 언제나 오빠...오빠...오빠가 최고였어.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 주는 건 학교였어. 학교에서 난 1등이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진...]
[......! 나? 난 그렇게 공부를 잘한 건 아닌데...?]
[그래. 윤설 너보다 내가 공부는 잘했지. 그런데 선생님과 아이들은 모두 널 좋아했어. 항상 네 주변에 친구가 많았어. 난 또다시 밀려난 기분이었고...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이유없이 네가 밉고 싫었던 게...]
[그...랬니? 아니야. 우린 널 부러워했어. 한지원이는 못하는게 없구나...언제나 빛나보였어. 하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했어. 넌 항상 친구들에게 거리를 두었으니깐. 그렇지?]
[...어쩌면... 빈틈을 보이면 나 자신이 무너질까봐 그랬던것 같아]
[상처받을까봐? 특히..집안 빵빵했던 내가 그걸 무기로 널 상처입힐까봐?]
설의 말에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하지도 알것 같았다.
사춘기 시절이 아닌가. 예민한 시기가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웃고 울고...미워하고...
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운 시절이다.
[그립네...여고시절이....]
2.
지원이와 헤어지고 설은 걸었다.
자신에게 여전히 차가운 지원이지만 설은 마음이 가벼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지원이의 마음도 자신과 같을 것이란 걸 설은 알았다. 그렇게 조금씩 지원과 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휘돌아도 설은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설은 그제야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준수씨 화내겠다]
몇번의 신호음이 가고 그의 음성이 들렸다.
[저 지원이와 헤어지고 잠깐 걷고 있는데...준수씨 어디예요? 집?]
-걸어? 이 추운 겨울 날씨에?-
[그렇게 많이 추운건 아니에요. 금방 지하철 타고 집에 갈 거예요. 내일 볼 수 있어요? 좋은 소식 있는데]
-그래? 그럼 내일까지 갈 필요없어. 지금 봐-
[지금요? 준수씨 집으로 오란 소리예요]
-뒤를 봐-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설은 몸을 돌렸다.
덩치 큰 준수의 차가 바로 뒤에서 따라 오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그녀는 얼른 뛰어갔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언제부터 따라 온 거에요?]
[볼이 차...]
그가 따스한 손으로 그녀의 찬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 ...한지원과 헤어지는 것도 봤어...바로 전화할 줄 알았지]
나무라는 투다.
[미안해요. 생각 좀 했어요]
[그래...한지원이 보자고 한 진짜 이유가 뭐지?]
[지원이가 학교로 찾아갔대요. 교장선생님을 만났다고...]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신이 잘못 알고 올린 글이라고...]
[아직 양심은 살아있군]
[그래요. 지원이가 나쁜 마음을 먹고 한 게 아니라는거죠]
[그렇다고해도 한지원에 대한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난 한지원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고하지 말아요]
[먼저 저녁부터 해결하고]
두 사람은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해고하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주문을 끝낸 준수를 보면서 설이 재차 확인을 했다.
준수는 생수를 들이키며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설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보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여전히 지원이가 날 싫어하고 나 또한 지원이가 별로지만 지원이의 행동은 이해해요. 지원이도 반성하고 있고...그게 중요한거예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지원이도 인정했어요. 그러니깐 준수씨가 이번 한번은 너그러이 용서해줘요. 아니 기회를 줘요. 저도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으니깐]
[한지원이 기회를 달라고 하던가? 그래서 널 부른건가?]
설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원인 자존심이 강한 친구예요. 잘못은 인정해도 구걸은 하지 않아요. 지원이를 버리지 말고 받아주면 좋겠어요]
준수는 팔짱을 끼고 설을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쌍꺼풀진 그 커다란 눈이 준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저 고집...!
처음 그의 방으로 들어왔을때도 그랬다.
그가 돌아가도 좋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그럴수 없다면서 고집을 세웠다.
그래서 그녀를 가졌다.
그리고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에게 목말라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3.
호출이다.
준수는 신여사의 호출에 급히 회장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신여사와 현수가 심각한 얼굴로 준수를 맞았다.
[우리와 최종 계약을 맺은 00건설에서 연락이 왔다. 덩치가 커서 자기네 회사가 감당을 못할 것 같다면서]
준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립니까?]
[00건설 회장이 직접 전화를 했어. 도저히 자신이 없다면서...]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죠]
[내 말이 그 말 이잖니. 곧 공사 들어가야 하는데 대체 무슨 조화속인지. 이회장이 그렇게 가벼운 인물도 아니고...야무지고 바르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알수가 없구나]
[이회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그게 말이다. 병원이란다]
[병원?]
[그래. 다쳤다는구나]
신여사의 말에 준수는 다시 양미간을 좁혔다.
다쳐...? 다쳤다구...그것도 갑자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이상하게 돌아갑니다]
[그렇지? 이회장도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더군]
현수의 말이다.
[거기다 더 이상한건 이회장이 미안하다면서 그대신 대진건설쪽이 어떠냐며 내게 그러더군]
신여사의 말이다.
[00건설과 대진건설 간에 모종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일단 제가 이회장님을 만나보겠습니다]
하면서 준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벌써 가려고? 차나 한잔 해]
신여사가 나가려는 준수를 불러 세웠다.
[뭐...다른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예리한 준수다. 신여사는 그런 아들을 한번 쓰윽 째려보았다.
[어머니께서 너의 그 아가씨한테 관심이 있으신가봐]
현수가 대신 거들었다. 준수가 묻듯이 신여사를 바라보았다.
[뭐...내가 그애와 헤어지라고 한들 네 놈이 들을것 같지도 않고]
[어머니]
현수와 준수가 동시에 신여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현수마져 한편이 되어 있는 듯해 신여사는 그런 현수를 째려보았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걔가 영어며 일어, 중국어까지 한다며? 그래서 이렇게 된 이상...그 애를 내 밑에 두었으면 어떨까해서]
신여사의 말에 준수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 갔다.
[그 재능을 뒀다 뭐하니? 똑똑한지 아닌지 이 기회에 알아도 볼겸...]
[그냥 두십시요. 전 그 녀석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게 둘겁니다]
준수는 돌아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정한 놈...]
찬바람 쌩쌩부는 준수가 가끔 신여사는 서운했다.
[그런다고 내가 가만 있을 것 같니?]
오기를 부리는 신여사를 보며 현수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4.
[오늘은 데이트 없어?]
교수님이 연결해준 출판사에서 보낸준 책의 번역 작업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설에게 유마담이 말을 걸었다.
유마담이 그녀 앞에 따끈한 석류차를 내밀었다.
[김사장 안 만나?]
유마담은 그저 좋기만 했다.
누구나 탐내하는 최고의 신랑감인 김사장이 설을 끔찍히도 아낀다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춤이라도 출 수 있었다. 장여인보다 더 기쁘고 행복했다.
[이모도 참...]
[얘. 난 내가 연애하는 것처럼 좋아서 죽겠어.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하고 애기도 빨리 낳고 그랬으면 좋겠어]
[이모. 너무 앞서 가지 마세요~~]
[너야 아직 젊지만 김사장은 벌써 서른 중반이야. 빨리 애를 가져야지. 얘, 아기 낳으면 내가 봐줄까?]
[네가 애를 왜 봐주니?]
언제 나타났는지 장여인이 유마담 뒤에서 한소리 했다.
[에구, 깜짝이야! 언니도 참! 놀랬잖우]
화들짝 놀라 외치는 유마담을 보며 장여인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래도 유마담은 싱글거렸다. 이젠 장여인이 무섭지 않은 유마담이었다.
최고의 사위감을 물어다 준 건 자신이지 않는가...
장여인이 눈을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저녁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해]
[저녁? 누구?]
유마담이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미숙이 네가 노래를 부르는 김사장 말이야. 토요일에 보잔다고 해]
할말이 끝난듯 장여인이 몸을 돌려 주방쪽으로 뚜벅 걸어갔다.
유마담이 함빡 웃으며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