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부터 가게안의 분위기가 몹시 긴장되어 있었다.
유마담은 연신 창밖을 응시하며 왔다갔다 정신없었고 장여인은 의자에 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손님이 온다는 거예요, 이모?]
[기다려봐...곧 알게 될거야]
설은 궁금했다.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건지....?!
퍼뜩 뭔가를 떠올린 설은 유마담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이모, 혹시...박종철 아저씨가 연락온건가요?]
[뭐? ... 그 놈이 왜? 아니야! 그 나쁜놈이 여길 왜 와!]
아닌가... 그럼 대체...!
[왔어...!]
밖을 응시하던 유마담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자동차 한대가 장미 넝쿨 너머로 멈추어 섰다.
그리고...!
헉!!!!
밖을 보던 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준수가 차에서 내려 망설임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총알같이 설이 나갔다.
검정색 바지에 검은 가죽 쟈켓을 멋지게 차려입은 준수는 영문을 몰라하며 놀란 얼굴로 달려 온 설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손님이...당신이에요?]
속삭이듯, 조심스런 어조로 설이 물었다.
준수는 대답대신 그녀를 안으로 밀었다. 바람이 차다.
[왜 제겐...!]
[오늘은 너의 어머님을 뵈러 온거야. 일단 들어가. 바람이 차군]
준수는 그녀를 안으로 들여 보내고 따라 들어섰다.
따스한 온기가 바깥의 냉랭한 찬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유마담이 한걸음에 달려와 준수를 맞았다.
긴장과 호기심...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유마담]
[네에...어서 오세요, 김사장님]
준수는 안쪽에서 가만히 몸을 일으키는 장여인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머리를 틀어올린 후덕한 몸매의 여인이 조심스런, 그러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픔도 분노도 묻어나는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준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뵙겠습니다. 김준수라고 합니다]
전혀 흔들림없는, 긴장감도 없는 준수의 목소리에 장여인은 놀랐다.
너무 당당하지 않는가...
게다가...예상밖이다.
그렇게 젊고 강인한 인상을 지닌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몸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예사롭지 않았다.
[안녕하세요...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장여인의 음성은 딱딱했다.
유마담이 설의 팔을 잡고 주방으로 갔다.
[네가 차를 들고 가. 난 불안해서 안되겠어]
불안하기는 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에게 일언반구없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장여인 또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딸과 관계를 가진 남자다...
아무런 감정없이...그저...!
장여인의 가슴이 즈끈. 아파왔다. 쓰라려왔다. 부끄럽기도 했다.
게다가 남자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고 대담하고 강해 보였다.
설이 차를 들고와 두 사람 앞에 놓았다.
[레몬 차예요]
준수는 눈을 들어 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장여인은 뜨끔했다.
준수의 눈빛이 남다르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딸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게 아닌지... 장여인은 덜컥 겁이 났다.
안돼...! 다시는 내 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거야. 두번 다시는...!
[날...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장여인은 준수가 그런 눈빛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게 편치 않았다.
[딸을 팔아 목숨을 연장한 죄많은 에미를 보러 온건지 아니면 빌려준 돈 때문인지...!]
날이 선 차가운 장여인의 어조에 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압니다만...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그럼 무엇때문에?]
매섭게 말을 잡고 늘어지는 장여인을 보며 준수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마담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설의 손을 끌어 당기더니 자신의 옆에 앉혔다.
[어머님의 딸, 윤설때문입니다]
장여인과 유마담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했다.
지금...뭐라는 거야?.....
[설...설이 때문이라고?]
유마담이 장여인 옆에 앉으면서 되물었다.
둘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기는 했으나 그게 확실히 무언지 감을 잡지 못하던 유마담이었다.
[우리...설이가 이유라니, 무슨 말이죠?]
[제가 윤설을 사랑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장여인과 유마담은 준수의 말을 퍼뜩 이해하지 못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2.
[솔직히 말씀드리죠. 5년전...분명히 전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애처로워 투자하는 셈 치고 도와주겠다고 유마담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고집불통 윤설이 기어이 찾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솔직히...애초부터 윤설을 가질 마음 따윈 없었습니다. 당돌한 그 아가씨를 겁줘서 보낼 생각이었죠. 그런데,...!]
준수는 옆의 설을 쳐다보고는 픽 웃었다.
[그런데 윤설이 저를 올려다 본 순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그대로 보낸다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그래서 제 욕심으로, 제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룻밤이 지나고 그녀가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습니다. 5년동안...그녀를 지켜보며 제게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유마담이 충격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놓치지 않을겁니다. 이제 윤설은 제가 책임집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윤설을 함부로 하지 못할것이며 다시는 울게 하지 않습니다]
준수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장여인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그저 멍하니 준수와 자신의 딸, 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딸이 웃고 있었다.
행복한듯, 수줍은 듯...마냥 행복한 얼굴로 남자를 향해 웃고 있었다.
장여인은 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보였다.
게다가 남자는 어떠한가...
그 미소짓고 있는 눈가가...쓰다듬고 있는 그 손길이 다정하기 이를데 없었다.
누가봐도 사랑이 넘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언니...]
유마담이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언니...내 기도가 통했어. 밤이면 밤마다 내가 기도했잖우. 우리 설이가 김사장같은 사람만 만나기를 내가 손이 닳도록 빌었다우. 그런데 이루어졌어. 정말 통했다구, 언니]
믿을수없다는 얼굴로 유마담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다시 준수의 눈이 장여인을 향했다.
[다른 모든 일들은...잊으십시요. 오직, 김준수라는 한 남자가 윤설을 사무치듯 사랑한다는 사실만 기억해 주십시요. 그리고 제가 윤설을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요]
선뜻 장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떨떨했다.
[언니. 뭘 망설여? 허락한다고 그래. 김사장만한 사람 없어. 어서 대답해줘...]
옆에서 유마담이 채근했다.
장여인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숨도 크게 내쉬어보았다.
[난... 이건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무어라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설이와 얘기도 해야할 것 같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고...미안하지만 다른 일 없다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장여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준수는 살며시 미소지어 보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이해합니다. 아마도...조금은 충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어머님께서 불러주시리라 믿고 가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럼...안녕히 계십시요]
준수는 처음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장여인은 뜻하지 않았던 일로 안해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뜻밖의 손님이 뜻하지 않은 폭탄같은 선언을 하고 가버린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하고 간 것이다.
[언니, 언니. 저것봐!]
유마담이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헌칠한 준수가 고개를 숙여 설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연신 머리를 쓸어주더니 고개를 기울여 설의 입가에 키스를 하는게 아닌가!
주저함이 없었다.
장여인과 유마담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수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머나, 어머나! 언니. 보았어? 김사장이 설에게 뽀뽀를 했어. 설이가 예뻐서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역시 김사장이야. 거리낌이 없잖우!]
유마담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김사장이 우리 설이를 사랑한다잖아. 그것도 5년동안이나 사랑했다잖아. 그러면 된거야. 이제 된거라구, 언니]
유마담의 눈에서 눈물이 비죽 나왔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놓여지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장여인은 조용히...조심스런 눈빛으로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3.
[그 아가씨, 우리한테는 언제쯤 소개시켜 줄거니?]
본가에 들른 준수에게 신여사가 물었다.
자신의 얼음장같은 아들을 녹여버린 여자가 누군지 신여사는 궁금했다.
아니, 호기심이 일었다.
내로라 하는 기업의 여식도 싫다. 팔등신 미녀도 닭보듯 하던 아들을 사로잡은 여자이니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소개시켜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
[왜? 내가 잡아 먹을까봐 겁나니?]
[그녀는 제가 그저 호텔 사장인줄만 압니다. 수그룹의 총수이신 신영자 여사님의 둘째 아들인줄은 모른다는 겁니다]
[뭐야? 네 놈이 누군지 얘기도 하지 않았다는 거냐? ]
[묻지도 않는데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잖습니까?]
[일부러 얘기하지 않은거겠지. 네 놈이]
[알면 충격받지 않을까?]
그의 형, 현수가 한 마디 했다. 준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 조금은 놀라겠지요]
[일단 한번 보자. 언제가 좋겠니? 말 나온 김에 내일 집에 데려 오너라]
[제 집으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일이 마침 토요일이고 하니 점심이나 같이 드시죠]
준수는 씨익 웃었다.
4.
토요일.
설은 정각 9시. 집앞에서 기다리는 준수의 차에 올라탔다.
유마담이 함박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