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슴프레한 새벽녘.
설은 오랜만의 단잠에서 깨어나 주위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자신을 조이듯 꽉 끌어 안고 있는 남자의 품에서 그녀는 별 저항없이 눈을 떴다.
준수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쪽 팔을 그녀에게 내어 주고 다른 쪽 팔로 눈을 가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커다란 키와 건장한 체격탓에 간밤에는 그렇게 커 보이던 침대가 축소된 듯 작아보이기까지 했다.
풀어헤쳐진 셔츠는 구겨져 있고 심지어 바지 허리춤에서 셔츠가 삐죽이 빠져 나오기도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빈틈이 없고 냉정한 이미지를 일관하던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엿볼수 있는 게 매일 있는 광경은 아니지 않는가...
자신이 걱정되어, 자신을 찾으러 먼길까지 달려 와준 사람이다.
그리고 말없이 안아주며 위로가 되어 준 사람이다.
마음이...가슴이 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날밤 이후,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의 재회 후, 두렵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때 알았을까...자신이 김준수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될것이란 걸...그래서 그렇게 두려움이 앞섰던 걸까...
사랑은 ...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닌가보다...
그 우연이 인연이 되었고 결국...필연적으로 그를 사랑할 운명으로까지 와버린 것이다.
자신의 심장까지 뛰게 만든 사람...
비록...짝시랑이지만 그것도 사랑인 것이다.
설은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동생처럼 아껴주고 좋아해 주는 걸로 만족하기로...
지금은...지금은 그냥 그의 곁에 있는 걸로 행복한거야...
설은 그의 콧날과, 자면서도 매섭게 다물어져 있는 입매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만보지?]
헝컬어진 모습만큼이나 저음으로 갈라진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자는줄 알았는데...
그가 손을 내렸다.
잠을 설쳤는지 그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깨,깼어요? 미안...!]
무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의 목소리가 모기만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무방비 상태의 그녀는 그대로 그의 가슴위로 무너졌다.
[...!]
준수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찾아 자신을 입술을 가져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과 부드럽고 따스한 그녀의 입술이 빈틈없이 포개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휘어 감고 내리누르는 그로 인해 그녀는 손가락조차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었다.
놀란 그녀의 눈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감촉에 절로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키스에 반응을 보이자 준수는 대범하게 거칠게 입술을 놀렸다.
가만히 그녀의 도톰한 아랫 입술을 이빨로 자근자근 씹는가 싶더니 이윽고 윗 입술도 똑같이 했다.
그리고 혀로 입술 전체를 쓸어내더니 벌어진 그 입안으로 잽싸게 혀를 집어 넣었다.
그녀가 꿈틀하며 몸을 굳히는게 느껴졌으나 준수는 오히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돌려 더 조여 안았다.
그의 거칠고 대담한 키스에 그녀는 힘들어했다. 숨조차 쉬기가 쉽지 않았으니깐...
그것을 아는지 그가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100미터 달리기를 끝낸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또한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숨결이 엉켰다.
깊고 사나운 남자의 눈과 서글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눈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5년...5년이야]
무...슨...?
들릴듯 말듯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되물어 보려고 했으나 그가 몸을 바꿔 그녀를 자신의 아래로 가두었다.
물결처럼 그녀의 머리결이 흩어졌고 눈은 놀란듯 흔들렸다.
두 뺨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잠을...잘수가 없었어. 얼마나 꼼지락거리는지...그러면서도 새근새근 잘도 자더군...]
그는 그녀의 떨리고 있는 눈꺼풀과 오똑한 코,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입술을 손끝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그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팔안에서 밤새도록 오르내리며 그를 고문한 곳이다.
작고 나긋한 몸매...달콤한 숨결...말캉말캉한 가슴...
준수는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한손을 내려 그녀의 셔츠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단숨에 그 커다란 손으로 한쪽 가슴을 감아쥐었다.
[아...!]
외마디 소리를 내뱉은 그녀는 얼음 땡. 하듯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삼켜버릴듯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마구 달아 올랐으나 그녀는 이상하게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온갖 신경이 오로지 자신의 가슴을 감싸쥐고 있는 그의 손에 가 있었다.
[오,오해하지 마세요...전, 저는 잘때 ...그,그냥...아무것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래?]
부끄러움에 버벅대는 그녀 대신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입만 벌린채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바다에서 갓 건져올린 파닥거리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에 준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미쳐버릴것 같은 심정으로 그가 밤을 꼬박 지새웠다는 걸 그녀가 알리 없었다.
고개를 들어 잘도 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준수는 몇번인지도 모를만큼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걸로 만족해했다.
한입에 삼켜도 비리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그녀안에서 느꼈던 그 짜릿한 절정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욕망이, 감정이 가는 대로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건 죽을 맛이었다.
끙...
준수는 그녀의 유혹적인 가슴에서 손을 내려 그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툭. 쳤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속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숨을 토해냈다.
[너는...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
그의 중얼거림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거의 독백처럼 들렸다.
[뭐라구요...?]
그녀가 물었으나 대답대신 준수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해돋이..봐야겠지?]
2.
바다는 고요했다.
눈쌓인 바닷가는 조용히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바닷가로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준수는 추울것이라며 미진이 챙겨준 담요를 뒤집어쓰고는 그 안으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저기...사람들이...]
[신경쓰지마]
그는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건 그렇고...오늘, 나와 올라갈거지?]
묻는다기보다 단정적인 말투로 그가 묻자 가만히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즉각, 준수는 품안에서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리는 걸 본 설은 살포시 웃었다.
[저는...가지 않아요]
[이유는?]
[저도 그렇고...엄마도 그렇고...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저를 다 비우고 돌아가야만 엄마가 저를 봐도 힘들지 않을 거예요. 돌아갈 땐 예전의 제가 되어서 가고 싶어요]
[왜..네가 먼저가 아니고 번번이 가족을 먼저 생각하지?]
[그야 가족이니깐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 준수는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욱. 하는 성질을 애써 눌렀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김준수씨, 저 어린애 아니에요. 괜히 저로 인해 시간 낭비마시고 올라가세요]
젠장, 이걸 그냥 끌고 올라가?...
[더 돌아다닌다고해서 과연 해결이 될까?그런다고 잊혀지냐구]
못마땅했다. 내키지 않았다.
[잊을려고 하는게 아니라 묻으려고 하는 거예요.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희망이 남아 있는 걸 알면서도 열지 않는 것처럼 묻어두려는 거예요.아마 엄마도 그럴거예요....죄송해요]
[내게 그런 소리 하지마. 내게도 책임이 있어]
[그렇지 않아요. 절대로!]
그녀는 미소지어 보였다.
[걱정마요. 오늘 남해에 가볼 거예요. 대학때 가려다 못 간 곳이라 꼭 가보고 싶어요. 그러고나서 올라갈게요]
그의 심정을 알리없는 그녀가 신난듯 쫑알거렸다.
[내가...강제로 데려가겠다면?]
강한 어조로 그가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당신은...그러지 않을거예요...아! 해 뜬다!!]
바다 저 너머로 서서히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보라! 동행의 떠오르는 태양...
저 찬란하게 떠오르는 아침해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불게 타오르는 태양을 마주 한적이 있는가...
어제같은 오늘의 태양...오늘같은 내일의 태양...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듯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뜰 것이다.
설은 절망을 벗어놓는다.
원망도 미움도 던져놓는다.
희망을 품는다.
다시금 일어설 희망을 가져 본다.
3.
준수는 서울로 올라왔다.
한 호텔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지 않는가.
비록 오너가 모친이라고 해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공과 사가 확실한 그였는데 윤설이 개입되면 그것도 소용없었다.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고 오기는 했으나 그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서울 도착해서 전화한다고 그를 밀어내던 그녀였다.
중요한 미팅만 아니라면...!
긴 한숨이 버릇처럼 세어 나왔다.
[총지배인...]
준수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키큰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에, 사장님]
[5년전...이 방으로 날 찾아왔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기억합니까?]
[네에. 기억합니다. 제가 직접 안내를 맡았습니다]
남자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총지배인...내가 총지배인을 왜 높이 평가하는지 압니까?...총지배인의 호텔에 대한 자부심과 성실성...그리고 침묵할때를 아는 그 묵직함 때문입니다]
총지배인은 놀랐다. 준수가 직원들을 학력보다 능력을 보고 평가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가 그런 칭찬을 하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고교 졸업후 호텔에 입사해 도어맨부터 시작한 총지배인은 한번도 요령피우지 않고 자부심을 갖고 일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 주고 평가 해 준 사람이 준수였다.
그런데 과분한 칭찬까지...!
총지배인의 어깨가 으쓱한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준수는 그런 까닭에 총지배인이 그 날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총지배인...그날일에 대해 총지배인은 함구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호텔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무적인 것 외에는 함구한다는 게 저의 철칙중 하납니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그날, 근무한 직원이 누군지 압니까?]
[물론입니다...무슨 일입니까, 사장님?]
[알아보십시요. 최근, 그날 일에 대해 얘기한 직원이 있는지...아니면 누군가 묻고 다닌 자가 있는지...]
[알겠습니다, 사장님]
[총지배인. 조용하게...그리고...]
[알듯 모를듯 ...조심스레 알아보겠습니다]
준수의 의중을 안다는 듯 총지배인이 말했다. 그리고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준수는 휴대폰을 꺼내 설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어디지?]
-기차안이예요. 전국적으로 눈이 왔나봐요. 차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이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즈막했으나 밝았다.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다행스러워요-
쯧...다행같은 소리하고 있네...
괜히 심술이 났다.
[언제쯤 올라올거지?]
-전화할게요...정말로...-
그렇게 그들은 통화를 끝냈다.
그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그를 찾는 신여사의 번호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