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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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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는 바람 -2-


BY 데미안 2012-01-27

 

1.

설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잔뜩 화가 난 준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말...!]

화를 내고 싶었다.

자신을 긴장시키고 돌아버리게 만든 그녀를 찾으면 정신이 번쩍 들게 흔들며 혼내리라 다짐했는데 막상, 맥없이 약해 보이는 그녀를 보자 찡하니 가슴이 무진장 아팠다.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성큼 다가온 준수는 그녀의 손에 야무딱지게 쥐어져 있는 코트를 잡아 채 소파에 던졌다.

그리고는 그곳이 커피숍이라는 것도 손님이 있다는 것도 아랑곳않고 소중한 것을 감싸 안 듯 그녀를 가슴 안으로 끌어 당겨 꼭 안았다.

그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결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너때문에...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가 다소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엉거주춤,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망설이던 설은 그의 그 말에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편안했다.

한치 앞길이 보이지 않아 두렵고 절망적이고 깝깝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준수가 자신을 안아주자 설은 세상을 다 얻은 듯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안아주는 순간, 설은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속에  김준수라는 남자가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어느새 자신이 그 김준수라는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었다.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도 관심없었다.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상관없었다.

세상 모든 것 다 제껴두고 오로지...자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김준수인 것이다.

그를 안은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울수 있는 가슴이 있어서 좋았다.

설은 처음으로 마음껏 울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안겨, 그의 고급 와이셔츠가 눈물에 얼룩져도 설은 그 순간은 그렇게 그에게 안겨 울고 싶었다.

그는 이해해줄 것이다.

그는 알것이다.

그래, 그는 안다

그녀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동안의 모든 것들이 묻어나는 것일테지...

아마도 마음껏 울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속도 위반 딱지, 무진장 날아올거야... 얼마나 밟았을지...나도 모르니깐. 또다시 이렇게 나를 긴장시키면...너,죽는다]

말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만 그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오뉴월의 햇살처럼 따사롭기만 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준수는 그녀의 머리결을 만지면서 눈으로 친구인 장희를 찾았다.

장희는 그의 자그마한 아내와 카운터에서 흥미진진한 눈으로 준수를 보고 있었다.

장희가 손으로 오케이신호를 보내자 준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준수는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는 건...오늘까지야.  그동안 쌓아놓았던 눈물, 지금 다 쏟아내. 그리고 다신 울지마라]

[보기...흉하죠?]

벌곃게 된 눈빛으로 그녀가 웃었다.

[그래, 보기 흉해]

하면서도 준수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가를 훑어내렸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정리하면서 베시시 웃었다.

가슴에 난로가 있어,  그 온기가 그녀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하트를 찾아 부풀리는 것 같았다.

사랑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는데...?]

궁금했다. 그가 자신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준수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 설은 준수의 눈이 향하는 곳을 쫓았다.

장희와 그의 아내가 미소를 지며 손을 흔들었다.

[저 놈이 친구야,  그리고 네 얼굴을 알고 있어]

준수의 말에 그제야 설은 그 두사람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지나치리마치 관심을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

그러자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장희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아내와 같이...

[소개시켜줘, 임마]

장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고...! 오랜만입니다, 제수씨]

준수가 장희를 제쳐두고 그의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희의 아내가 웃었다.

[네에. 준수씨]

그녀는 가만히 설을 건너다 보았다.

[조금전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당황스러웠죠?  준수씨가 올때까지 붙잡고 있으라고 해서...가실까봐 조마조마했어요]

설은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죄송하고 미안한 건 오히려 자신 같았다.

[이 놈은 이장희라고, 고교때부터 친구고 여긴 장희 부인인 권미진씨]

준수가 소개를 했다.

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전 윤설이예요...초면에 제가 실례를...]

[오, 아니예요]

장희가 손사례를 하며 히죽거렸다.

 

2.

밤이 깊었다.

장여인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천갈래 만갈래 흩어져 있는 마음을 추스릴수가 없었다.

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

무어라 위로해줄수도 없었다.

[나도 줘]

불쑥 나타난 유마담이 장여인 앞에 잔을 내밀며 말했다.

[언니가 이렇게 자책하는 거 더이상 볼수가 없어. 나도 한잔 줘]

장여인은 유마담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유마담을 탓하고 싶었다. 유마담 잘못이라고 퍼붓고 싶었다.

유마담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또한 부질없었다.

유마담인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막말로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나몰라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여인을 대신해 아이들을 챙기고 대신 울어주고 대신 절망하고...

설이가 그렇게 유마담을 챙기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장여인은 유마담의 잔을 채워 주었다.

쭉. 들이킨 유마담이 다시 잔을 내밀었고...그렇게 연거푸 세잔을 내리 마셨다.

[마셔, 언니. 내가 한잔 올릴께]

유마담이 장여인의 잔을 채웠다.  장여인이 조심스레 받아 마셨다.

[설이 탓하지도 말고 설에게 미안해하지도 말고 언니 스스로를 책망하지도 마. 나에게 다 돌려. 내가 다 받아줄께.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해도 참을수 있고 잡아 죽인다해도  가만히 있을테니깐 나한테 다 풀어. 언니 딸 고집, 누구보다 언니가 더 잘 알지?  설이는 다 잊고 다 묻어버리고 돌아올거야. 그러니깐 언니도 오늘 다 풀고  가슴속에 묻어. 그게 언니를 위하고 설이를 위하는 거야]

유마담은 스스로 잔을 채워 마셨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언니. 난 언니만큼 설이를 아끼고 사랑해. 형부 그렇게 가고 언니 쓰러지고...솔직히 나까지 정신이 없었어. 혼란스런 그 와중에 제정신이었던 건 설이뿐이었어.  나조차도 설이에게 의지했으니깐...다 괜찮아질거라고 하더라....]

이번에는 장여인이 술잔을 비웠다.

[언니가 이러면...설이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겟지. 난...그런 거 보고싶지 않아. 부탁이야, 언니.  설이가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보듬어주면 안될까? 그대신 나한테는 어떻게 하든 상관안할께...]

애원조로 유마담은 장여인에게 빌었다.

그러자 장여인이 갑자기 통곡을 했다.

어엉...어엉...가슴을 치며 울었다.

[언니...]

유마담은 장여인이 울게 내버려 두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자신 또한 그러했다.  하물면 친모인 장여인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내가...내가 무슨 자격으로 엄마를 해!...내가 어떻게 엄마야!!!...내가,내가...무슨 낯으로 설이를 보니? 내가...!]

장여인은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모든걸 잃은 자신의 딸이 가여워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길 수백번이었다.

[내가 이러고도 엄마니? 내가 무슨 엄마야...미숙아, 나좀 때려줘!...내가...내가 설이를 탓할 자격이나 되니?]

미치지 않으려면 그렇게 울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통곡이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문드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언니...울어...실컷 울어. 울고나면 ...울고나면  혼란스런 감정들이 정리될거야...

유마담은 장여인의 울음을 지켜보면서 소리없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3.

바닷가로 나왔다.

하얗게 쌓인 눈위로 다시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눈길을 설은 준수와 함께 걷고 있었다.

[누군지...진짜 몰라?]

메일을 보낸 사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설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학교 홈페이지가 아니라 교장선생님 개인 메일로 보냈어요]

[내용은 확실해?]

[네에...정확히...]

설은 그 내용을 떠올리며 두손으로 자신의 몸을 꼭 죄었다.

[왜 내게 바로 얘기하지 않았지?]

나무라는 투였다.

설은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에게 의지하고 의논하고 싶었다. 하지만...!

준수는 혀를 찼다.

[그래. 혼자서 또 온만가지 생각을 했겠지. 할까말까...물어볼까 말까...]

뜨끔했다.

준수는 바닷 바람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전화를 했더라면 내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던...사실은 사실이니깐...]

저 고집...!

준수는 앙다문 고집스런 그녀의 입매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닷바람이 차다.

준수는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웃었다.

[꿈이 선생이라며?  쉽게 포기가 돼?  내가 어떻게 해볼수 있다고 한다면...!]

[싫어요...이미 끝난 일이예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그럴까봐 전화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 그랬겠지...

준수는 마음이 가는대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너를...어쩌면 좋을까...]

그녀의 입술위에서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포개었다. 사람들이 보든말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런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설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것을 아는지 준수는 달래듯 가만히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달콤한 커피향이 묻어났다. 그의 나머지 한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야,김준수! 풍기문란죄다, 임마!]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준수가 신음을 삼키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그를 멈추게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의 또다른 친구 황보 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