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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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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부르는 바람 -2-


BY 데미안 2012-01-12

 

1.

아무일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거, 설은 힘들었다.

자꾸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멍해 있기 일수라 그녀에게서 아무일 없다는 것을 기대하는 건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설은 혜지가 나오라는 데도 거절했다.

혜지는 이해하면서도 속상해했다. 툴툴 털어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만나면 조금은 기분 전환이 되지 않겠냐 했으나 설의 성격상 그게 쉽지 않았다.

 

[오늘은...우리들끼리 한잔하자]

[설에게...무슨 일 있니?]

선우의 말이다.

[일은 무슨 일! 오늘은 술이 고프네? 실컷 마시자. 내가 쏜다]

선우는 묻고 싶었으나 지원이까지 있는 자리라 입을 다물었다.

혜지 결혼식때 본 그 허우대 긴 남자가 누군지...혹시 혜지는 아는지...선우는 그게 궁금했다.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은 가만히 혜지의 표정을 살폈다.

잔뜩 어두워져 있는 혜지의 표정에서 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해 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원이 살짝 웃었다.

 

무겁고 암담한 심정으로 설은 바깥 테라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계속 쉬쉬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어차피 알 일이라면 하루빨리 얘기하는게 좋을텐데...

쉽지 않았다.

 

2.

유마담은 유리 너머로 홀로 앉아 있는 설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었다.

준수의 전화도 미심쩍었고 요즘 부쩍, 설이 혼자 멍하니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졌고 눈동자에 근심도 있었다.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는 유마담이 조심스레 설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하니?]

말문을 열자 설이 놀란듯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힘이 없는 미소다.

유마담이 옆에 앉았다.

둘은 그렇게 황량한 겨울 거리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방학인데...어디 여행도 다니고 해. 너 여태껏 너만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잘 없잖니?]

[그런가?...여행....그러고보니 나, 여행 다녀본적이 없네?]

하면서 설은 시니컬하게 한번 웃고 말았다.

유마담은 설이 굳이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때 같았음 눈 맞추며 밝게 웃고 얘기할 앤데 말이다.

[설아...무슨일있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마담은 설이 즉각적으로 긴장하는 걸 보았다.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은 무슨...그냥, 방학하니깐 기분이 그래서....]

[너는 거짓말이 안돼. 얼굴에 다 나타나. 모르지?  지금도 니 얼굴이, 나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하고 있다는 거 몰라?]

[......!]

[무슨 일이야? 이모한테는 할 수 있잖아. 이모가 궁금한 건 못참는 거 알지? 특히 니 일이라면. 얘기해봐]

[이모...]

[이모는 무조건 니 편이야. 알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이모야. 어떤 얘길해도 놀라지 않으니깐 말해]

그제야 설은 유마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각오하고 있다는 듯 비장해 보이는 유마담을 보면서 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든 시기에 힘든 일을 함께 겪어 오면서 어쩌면 엄마보다 더 의지가 되고 믿음이 가는 유마담이 아닌가.

언제나 든든한 멘토가 되어 준 유마담이었다.

[말해, 얼른]

[이모....나, 학교 관뒀어]

담담하게, 조용하게 설이 입을 열었다. 유마담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라고?]

[사표...냈어, 학교에. 봄방학까지만 선생님이야]

유마담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면서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사,사표?...왜?  왜 니가 학교에 사표를 내? 무슨 일인데? 뭘 잘못했다고?]

[누가 학교에 투고를 했어. 김준수씨와의 일...돈받고 그 사람과 하룻밤 잔 일...]

[너 지금!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일을...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설아?]

유마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매매를 한 교사라고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사표를 내라면서...]

[누,누가!...누,누가 그런 소리를...! 누가, 어떻게 알고....! 김사장이니?]

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분은 아니야. 익명의 학부모래. 나도 몰라]

[맙소사...! 우리 셋 밖에 모른 일인데...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없어. 설아, 니가 잘못 안거야]

[확실히 알고 올린 글이었어.  내가 어떻게 변명해볼 수도 없는...]

유마담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감추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설마...나쁜 일이 생겼다해도 그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함구하고 김준수가 입을 열었을리도 만무하고...그 외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인데...!

유마담은 떨리는 손으로 설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서...그래서 학교에서 너에게 사표를 쓰래? 그래서 사표를 썼어?]

[응, 이모...그게 맞는 것 같아서...일이 그렇게 됐는데 내가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봐?]

설이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걸 본 유마담의 눈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

생각조차 못한 일이 터져버렸다.

[미안해, 이모]

[미안해? 뭐가 미안해! 니가 왜 나한테 미안하니? 니가 왜! 어떡하니! 너 어떡해]

가슴이 미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누가, 누가 그런 짓을! 누가 너한테 그런 모진 짓을 했을꼬! 어쩌면 좋아. 설아 어쩌면 좋으니...?]

유마담의 닭똥같은 눈물에 설의 마음까지 상처를 입었다. 눈물이 삐쳐 올랐으나 자신까지 울수는 없는 노릇이라 설은 꾹.참아본다.

[내가 미친 년이야. 내가 죽일 년이야. 내가 그때 너를 끝까지 말렸어야 하는데...! 다리 모둥이라도 부려 뜨려서 주저앉혔어야 했는데...! 내가 죽일 년이야! 내가, 내가 나쁜 년이야!]

[이모. 그러지마. 이모 잘못 아니라고 했잖아. 난 괜찮아. 이보다 더한 일이 있어도 우린 견뎠잖아. 나 견딜 수 있어]

[너 불쌍해서 어쩌니! 어렵게 선생이 됐는데...나때문이야. 내가 죽일년이야! 그렇게 보낸 것도 나고 학교 사표 쓴 것도 결국 다 나 때문이야. 어떡하니?...우리 설이 어떡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나즈막한 장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마담과 설은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장여인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본 유마담과 설은 간담이 서늘했다.

[어,언니...]

눈물 범벅된 얼굴로 유마담은 지옥에 끌려 온 사람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설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무슨...소리야?]

[엄마...]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사표는 또 무슨 소리야?]

[엄마. 그,그게...!]

[나몰래 둘이 무슨 짓을 저지른거니?  나만 모르는 일이 도대체 뭐냐구?]

급기야 장여인이 소리를 지르더니 비틀거렸다.

[엄마!]

[언니!]

유마담과 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더니 급히 장여인을 부축했다.

그러나 장여인은 두 사람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사나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둘다 따라 들어와]

장여인이 앞장서서 들어갔다.

[언니...]

절망적으로 유마담이 소리쳤다.

 

장여인은 냉수를 한사발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맞은 편에 다소곳이 앉았다.

[내가...아파서 누워 있을때 무슨 일이 있었지?  어느 누구 한 명, 땡전 한푼 빌려 주지 않은 상태였어. 그런데 깨어나보니 최고급 병실에서 멀쩡히 살아서 누워있더군. 꿈인가 했어. 죽어 천당에 있나...생각도 했었지...그때 많은 생각을 했어. 별별생각 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왜...! 내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깐. 염치가 없으니깐. 나쁜 일이야 있었을라구...그렇게 위로를 했지. 그러나 너희 둘...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니깐...이제 얘기해. 그 돈.]

장여인이 유마담을 바라보았다. 유마담이 뜨금하면서 눈을 피했다.

[미숙이 네가 아는 사람이 빌려 주었다는 거 맞아?]

유마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니깐.

[그래...그런데 그 돈 빌리는 과정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니?]

[언니...흥분하지 말고, 제발! 몸 생각해서라도...!]

[말해. 내 몸,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깐 사실대로 말해. 무슨 거래를 했니?]

[거래같은 거 없었어요]

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유마담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언니. 내가 죽일 년이야. 언니한테 맞아죽어도 좋아. 내가 죽일 년이야]

[이모 잘못없어]

설이 옆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맞아요. 엄마는 목숨이 경각에 있지, 누구 한사람 우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피해 다니더라. 이모와 내가 미친듯 뛰어다녔어요.  덕분에 이모가 전에 일하던 그 호텔 사장님...김준수씨가 사정을 듣고, 이모를 믿고 수술비며 모든 경비 일체를 빌려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것도 무이자로...!]

[그런데...?]

[그런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언제 갚을지도 모를...그 많은 돈을 그냥 쓰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어요.  내내 따라다닐 것 같아서 내가 그 사람을...찾아갔어요. 이자대신...나를 주겠다고...]

[......!]

장여인의 얼굴이 파랗게질렸고 유마담은 외마디 소리를 내며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 수술 편하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모가 그렇게 붙들고 늘어져도 내가 뿌리치고 갔어요]

[네가...네가 뭐, 뭘 해?]

믿을수 없다는 어조로 장여인이 더듬거렸다.

[그 사람은...내게 돌아가라고 했어요. 이자는 필요없다고...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돈을 편하게 쓸 수없다고...내가 고집을 부렸어요. 나를...이자라고 생각하라고.... 죄송하지만...다시 그 때로 돌아가도 난 그렇게 했을 거예요]

[너,너를...팔았다는 얘기니? 수,수술비 때문에?]

[네에...죄송합니다,엄마]

[죄송? 죄송!!!!]

장여인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쳤다.

[고작 수술비 때문에 몸을 팔았다고? 그 돈으로 날 살렸다고? 누가! 누가 그런 짓 하랬어? 누가 살려달라고 했어? 죽게 내버려두지...뭐? 뭐...라고? 네가 지금...!]

장여인이 가슴을 움켜쥐자 이번에는 설과 유마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버려둬!]

장여인이 차갑게 내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설마...해도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비참하면서도 가슴이 미어졌다.  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시켰는지...

심장을 도려내고 싶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딸을 혼내야하는건지...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건지...

유마담을 한 대 후려쳐야할지...

장여인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사표...는...그건 무슨 소리야?]

[...누군가가 ...그 일을 알고 학교에...!]

거기가지 들은 장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잡아 먹을 듯 설을 쳐다보았다.

주먹을 불끈 쥔 장여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엄마...]

설은 죄스러운 마음에 그렇게 애절하게 불러 보았다.

용서는 안되더라도 장여인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나를...나를...죽게 내버려둬야했어...]

[엄마. 어떻게 그런 말씀을...!]

장여인은 딸을 무섭게 노려보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마담이 얼른 부축하려 다가가자 장여인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런데 설이 막아섰다.

[그러지마... 엄마, 저를 때리세요. 이모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이모는 협박까지 하면서 날 막았어요. 알잖아요. 이모가 아니었음 우린...모두 죽었어요]

장여인의 번쩍 든 손이 벌벌 떨렸다.

딸이 유마담을 막아서자 가슴 한 쪽이 싸-하니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돈독한 정이 있다는 걸 깨닫는 건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놔둬.]

유마담이 설을 옆으로 밀치고 장여인 앞에 섰다.

[때려, 언니. 각오는 했어. 맞아 죽어도 괜찮아, 난. 나라도 그럴거야. 때려서 언니 속이 조금이라도 시원하다면...내가 얼마든지 맞아줄께. 마음껏 때려, 언니]

유마담은 그것이 오히려 속 편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마음의 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 같았다.

장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내리더니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걷는 장여인을 보며 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마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내어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설은 그런 유마담을 감싸안았다.

밤이...

겨울 밤이 유난히...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