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완연한 가을 내음이 나는 것 같아]
경치좋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장여인이 유마담에게 말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갸름한 얼굴을 한 서글한 눈매의 유마담에 비해 장여인은 적당한 키에 제법 포만한 몸매를 했다.
그리고 눈은 유난히 큰 것이, 설이의 그 큰 눈이 누구에게서 온 것 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정수리에 털어 올린 모양새가 과거 사대부 집 마나님 같았다. 후덕한 인상이었다.
[그러게 말이우. 가을비가 이리도 복스럽게 보이기는 처음이네...참 신기하지, 언니. 장미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니]
[그러네... 빨간 장미가 원래 시샘이 많아 가장 오래 살아 남는다잖아...설이 아빠가 장미를 참 좋아했지]
[...아직도 많이 생각나우?]
유마담이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자 장여인은 그냥 담담한 얼굴로 미소만 지었다.
[원망도...그리움도 없어. 다만...설이나 우를 볼때면...마음이 아파. 그럴땐 그이가 생각나. 그이가 설이를 유달리 예쁘했다든 거 알지?]
[알지. 설이만 보면 입이 찢어졌잖우]
[그랬지...]
장여인의 입가가 사뭇 심각해졌다. 그러더니 조금은 흔들리는 듯한 눈빛으로 유마담을 건너다 보았다.
[미숙아. 난 가끔, 설이를 보면 가슴이 뜨끔해져. 내가...엄마로서의 본분을 잊고 모든걸 버리려 했었어. 죽고 싶었지. 그런데 깨어났을때...미숙아. 난 설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내가, 내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걸 알았어. 그 애의 눈빛이 많은 말을 하고 있었어. 난 엄마니깐 알 수 있었어]
순간, 유마담의 가슴이 철렁했다. 장여인을 바로 볼 수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난...물어볼 수가 없었어. 그 애의 눈이 아무것도 묻지말라고 하는 것 같았어. 난 말이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어느새 내려왔는지 설이가 그들 곁으로 다가오면서 밝은 얼굴로 물었다.
청바지에 얇은 블라우스와 가벼운 니트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무슨 얘기들이야?]
[아니야. 아무 얘기도. 그냥 비도 오고 하니깐 마음이 싱숭해서 그래]
유마담이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근데 어디 가?]
[내가 얘기 안했던가? 오늘 엄마 약 타는 날이잖아. 그래서 가는 길에 서점에도 들리고...]
[벌써 그렇게 되었어?]
유마담이 놀란 얼굴을 했다.
[넌 이렇게 좋은 가을 날 데이트 할 남자도 없니? 혜지는 곧 결혼한다며?]
장여인이 도끼눈을 하고 설이를 흘겨보았다. 속이 상한 것이다.
[에구, 일어나야겠다. 울 엄마 더 속상해 하기 전에...]
설은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혀를 속 내밀었다. 유마담이 덩달아 웃었다.
[어? 엄마 애인 오신다. 다녀올게요]
[아니, 얘가!]
장여인의 눈이 더욱 더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얼굴까지 발그래해졌다.
설이는 입구로 나가면서 입구로 들어오는 날씬한 노신사에게 인사를 했다.
2.
[그 부지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그 땅이 있어야만 니 아버지의 평생 염원이었던 양로원과 병원을 지을 수 있어]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흘러 나오는 신여사의 목소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사업 확장은 이제 그만 두시는게 어떻습니까?]
불쑥 들어서서 다짜고짜 냉정하게 내뱉는 준수의 말에 신여사는 가느다란 눈으로 째려보았다.
[지금 하시는 일도 벅차서 아들들한테 떠넘기고 계시잖습니까?]
준수는 신여사 앞에 놓인 서류를 대충 흝어보더니 소파로 가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신여사를 바라보았다.
[떠넘기긴 누가...! 저놈, 말뽄새가 누굴 닮았는지...]
신여인은 팔짱을 끼고서는 앞에 앉은 잘난 자신의 둘째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땅으로는 안된다는 겁니까? 충분히 넓지 않나?]
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넓은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부지는 우리 땅 코 앞에 있는데다 주변 경치를 다 쥐고 있어. 그곳이 있어야 휴식처도 되고 텃밭도 가꾸고... 앞에 호수도 있잖니. 그 영감탱이는 그걸 빌미로 땅을 쥐고 있더니 내로라하는 인간들이 군침을 흘리자 이제서야 내놓았어.]
[부르는게 값이겠군]
준수가 말했다.
[그래...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이 나라의 기름진 땅들은 죄다 골프장이니 쇼핑센타니 유흥업소로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신여사가 혀를 찼다. 그건 준수도 인정하는 바였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이 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준수는 신여사가 더이상 일을 벌리는 것은 반대다.
[이번 기회에 우리 땅을 팔 생각은 없으십니까?]
[뭬야?]
대번 신여사의 음성이 고음으로 치달으며 준수를 향해 도끼눈을 했다.
그런 신여사를 현수가 막았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어머니 걱정해서 준수가 그냥 해보는 말이잖습니까. 저 녀석, 가만 보니 어머니 혈압 올리는 그 낙으로 지금껏 버틴 것 같은데, 사실 팔자고 해도 저 놈이 반대할겁니다. 알잖습니까]
젠장, 저 놈의 형님이 내 머리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어머니께선 이제 노후를 준비하셔야 하는 건 맞잖습니까]
[그 양로원이 내 노후야]
[그럼 다른 사업은 누가 합니까?]
[너와 현수가 있잖니. 뭐가 걱정이야!]
신여사의 딱 부러지는 말에 준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잊지 마십시요. 저는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또 그 소리야?]
[네에. 제가 얻고자 하는 걸 ...얻게 되면 그땐 제 자리로 돌아 갑니다]
[또 그 애매한 소리! 도대체 그게 뭐니?]
[나도 궁금하군. 너 한번씩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했어. 혼잣말처럼...]
[......!]
준수는 침묵을 지켰다.
[너, 누구랑 원수졌지?]
신여사가 준수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히, 조사하듯 물었다.
[아니면, 뭘 잃어버린거냐? 아니면...그, 그 배운가 하는 애가 네 애라도...!]
[신여사님. 넘겨집지 마십시요. 그리고 제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꺼십시요]
[하여간 인간미라곤 없는 놈이야.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여자가 있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이놈아]
신여사의 툴툴거리는 말투에도 준수는 어깨만 으쓱했고 현수는 우습다는 듯 그냥 피식 웃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작은 아들에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사실 힘들때 곁에서 묵묵히 서 있어줘서 고맙고 자랑스러워 하는 신여사다.
준수는 벌떡 일어났다.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야겠습니다]
[뭬야, 이 벌건 대낮부터 술이라니...!]
신여사의 말은 듣는둥 마는둥 준수는 들어올때처럼 그렇게,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가 버렸다.
2.
병원 올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설은, 병원 냄새가 싫었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절망적인 기분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얼른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숨통이 터이는 듯 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비에 젖어 물기를 똑똑. 떨어뜨리는 플라타너스 길을 빠져나와 설은 시내로 차를 몰았다.
한적한 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5분이면 되는 서점으로 향하면서 설은 가을비 내리는 거리를 정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 발끝에 간혹 차이는 은행잎을 살포시 밟아봄으로서 가을도 느껴보았다.
그런 그녀를...
3.
건너편, 신호대기중이던 준수의 눈에 그런 그녀가 포착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무엇이 좋은지 혼자 미소짓는 그녀를 발견한 준수는 어이없어했다.
뭐냐...무엇이 좋아서 혼자 실실거리는거지...?
야무지게 우산을 쥐고 걸어면서 그녀는 발밑의 나뭇잎을 살며시 밟으면서도 웃고 우산 너머 빼곰이 얼굴을 내밀며 하늘을 보면서도 실실 웃고...그런데 그 잔잔한 미소에 가슴 한쪽이 꽉. 조이는 건 또 뭘까...
[어딜 가는가야? 실실거리며 ...]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눈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뒤에서 빵빵거렸다.
젠장...!
차를 달리다 준수는 불법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가까운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가 왜 시내를 나왔을까? 데이...트? 글쎄,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준수는 건물들을 훑어보았다. 비를 맞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리고 준수는 한 건물앞에 섰다. 서점이다. 그가 양미간을 좁혔다.
4.
1층을 지나 설은 2층으로 향했다. 1층만큼 사람이 많지 않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설은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점에 오는 걸 좋아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 저 책 보다보면 마음이 잔잔해지고 그만큼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오늘은...엄마 책도, 이모 책도 사야겠다]
하면서 설은 아동심리코너가 있는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요즘 그녀의 관심사다.
초등학생들과 생활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아이들과 관련된 책을 고르게 된 것이다.
책장에 기대어 열심히 보고 있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의 손이 뻗어오더니 대신 그 책을 잡아다 꽂는게 아닌가!
섬찟한 기분에 옆으로 비켜나려던 설은 익숙하진 않지만 독특한 그 향기를 기억해 내고는 그 상태에서 얼어버렸다.
그...다! 분, 분명히... 그 사람이야...
그러자 고요하던 심장이 갑자기 펌프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 가까이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거의 닿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개를 치켜들면 분명 그가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준수는 엷게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말초신경이 제대로 발달했군 그래...
준수는 설이 금방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채고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뻗은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얼어 있었다.
그 손이, 그 가녀린 몸이 살짝 전율한 것 또한 준수는 알아차렸다.
준수는 자신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그녀 손에 닿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 또한 가만히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예전의 그 향이 느껴졌다. 잔잔하고 은은한...
순간,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 반응이 그는 못마땅해 얼굴을 찡그렸다.
찰나, 그녀가 천천히 팔을 내리더니 가만히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그녀는 그와 너무 가까이 닿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놀람이 진정되었는지 의구심만 가득한 눈빛이 되어 그를 보고 있었다.
[이 놈이 여기 왜 왔을까...어떻게 여길 왔을까...하는 눈빛이군]
그가 바로 맞혔는지 그녀의 눈빛이 살작 흔들렸다.
그까짓것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준수는 입가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손을 내리면서 준수는 일부러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손끝에 느껴져 오는 그 매끄러움이 준수는 좋았다.
가만히 두려움없이 자신을 올려다 보는 그 눈빛도 좋았다.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옆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그도 그럴것이 남들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흡사 곧 끌어안고 키스라도 할 자세로 보였을 것이다.
그 소리나는 쪽을 그가 사납게 한번 쳐다보았다.
그 틈을 타 설은 한쪽으로 얼른 비켜섰다.
심호흡을 했다.
까만 바지에 까만 외이셔츠를 입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나온 악마같았다.
그 악마같은 남자가 자신을 한눈에 삼켜 버릴듯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일주일중...사흘 남았는데 알고 있소?]
그녀가 입을 앙 다무는게 보였다. 그가 픽 웃었다.
[알고는 있나 보군...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저 놈이 과연 학교에 찾아올까 안올까...하는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난 한다면 하니깐...사흘이오, 잊지마, 윤설...]
협박하듯 그렇게 말을 흘리더니 준수는 몸을 돌렸다.
바람처럼 왔다가 진짜 바람처럼 가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그제야 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책장에 기대었다.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게 벌써 두번... 두번 모두 불시에 당했기에 설은 어찌 방어해 볼 요량이 없었다.
멍하니...
[진짜...이러다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