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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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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일렁인다 -1-


BY 데미안 2011-11-12

 

 

1.

[형님 얼굴이 갈수록 좋아 보입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김준수. 그는 형인 김현수의 병실에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조만간 훌훌 털고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 오셔야지요]

[왜?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고 싶은 거냐?]

준수는 형의 말에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고 밖을 응시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느라 고생 한 건 안다. 하지만 마음같아선 난 ...호텔 일은 손떼고 싶다]

[약해지신 겁니까?]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지금 회복 단계에 있습니다.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형님은 강한 사람입니다. 나약한  말씀은 하지 마시고. 천천히 체력에 힘쓰십시요. 하지만 당분간...당분간입니다. 형님은 제자리로 돌아 오셔야 합니다. 나 또한 내 자리로 돌아가고......]

[도망치고 싶어 난리부루스를 치는구나!]

어느새 들어왔는지 신여사가 끼어들었다.

빌어먹을.....!

준수는 속으로 내뱉으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회복도 되지 않은 형 앞에서 잘 하는 소리다]

[어머니 오셨습니까?]

[오냐]

신여사는 잠시 침대에 걸터 앉아 큰아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네 동생이 말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널 살려내라고 이 병원 모든 사람들한테 협박을 했다]

[그런적 없습니다]

신여사는 준수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왜 그런줄 아느냐? 널 살려놔야 지가 빨리 도망칠 수 있을테니깐. 지 멋대로 살고 싶어서야]

[원래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놈이잖습니까?]

[그거야 젊었을 때 얘기지. 지금 쟤 나이가 몇인지 아니? 서른 다섯이야. 서른 다섯. 일찍 장가갔음 애가 서넛이야]

[강요마세요. 강요로 맺어져 실패한 결혼은  저 한 사람으로 만족하시고 준수는 알아서 하게 그냥 두세요]

[그냥 두면? 그냥 두면 머리 텅빈 것 데리고 올 놈이야. 얼마전에도 그...누구냐? 영화배우니 뭐니와 붙어가지고...원!]

[여자들이 준수를 가만둬야지요. 좀 잘난 놈입니까. 준수는 알아서 할 겁니다. 알잖습니까?]

[빨리 결혼시켜야 해! 그래야 자리잡지]

[제가 투명 인간입니까?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직접 하십시요]

준수는 우습다는 듯 창가에서 돌아섰다.

[내가 하고픈 말은.....]

신여사는 창가에 걸터 앉아 있는 둘째 아들을 건너다 보았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보고 있노라면 그 위압감에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무엇하나 나무랄데 없는 놈인데...

[니 형이 정상 컨디션을 찾을때까지 넌 어디든 갈 수 없다는거야. 한발자욱도! 알아들었지?]

[걱정마십시요. 지금은 저도 갈 마음이 없습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신여사님은 모르셔도 됩니다]

[뭐야? 이 녀석이!]

준수가 벌떡 일어났다.

[전 이만 나가봐야겠습니다. 볼일이 있어서...]

긴 다리로 단숨에 병실을 빠져 나가는 아들을 보며 신여사는 혀를 찼다.

[내 저 녀석을!]

신여사가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현수는 어머니가 저 멀대같이 크고 덩치도 큰, 냉정한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사실은 본인인 신여사가 더 잘 아는 일이다.

 

2.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아이들이 그리고 간 그림을 살펴보고 있었다.

모든게 어설프고 서툴어 보여도 설은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좋았다. 꾸밈도 없고 개성도 다양하고...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번졌다.

설은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열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현장 학습이 효과가 배는 된다는 걸 설은 안다.

또르르....

볼펜이 책상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잡으려 팔을 뻗었는데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 있던 커피를 건드리고 말았다.

[오, 이런.....!]

카페모카.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다.

[아까워라...]

휴지로 닦으면서 설은 중얼거렸다.

[내가 한 잔 사지]

조용한 교실에 깊이 있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퍼졌다.

고개를 돌린 설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심장이 쿵. 했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했다.

헌칠한 큰 키...이마 위로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말끔하게 차려 입은 검은색 양복...

뒷짐을 지고 자신에 찬 걸음으로 남자가 안으로, 그녀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홀린 듯 그저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준수는 우스웠다.

빌어먹을... 못 볼 걸 본 듯한 저 표정, 맘에 안들어...!

여자는 그를 보고는 너무나 놀라했다.

빌어먹을 김준수, 무엇을 기대한거냐...

저 여자가 너를 보고 반가워 해주길?

어쨌던 준수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그렇게까지 놀라워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가 많이 길었다. 곱슬곱슬...찰랑찰랑...윤기있게...

젠장...만져보고 싶잖아...

그리고....

살은 빠졌군, 싫은데...

살랑거리는  연보라빛 치마에 블라우스 차림의 그녀는 활기차보였다.

우아하고 단정하니...딱, 선생이군...!

그런데 그 보수적인 모습이 준수를 더 들뜨게 했다.

그의 몸이 그녀를 보자 저절로 반응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젠장...!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3.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닌건 윤 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남자는 과거의 망령이다.

두번 다시 만나서는 안될, 마주쳐서도 안될 과거였다.

그런데 그 과거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생생하게, 그리고... 그리고 너무 멋진 모습으로....!

그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거...!

아니야, 아니야...이건 너무 놀라서 그런거야....

어찌되었던 그의 존재는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건...꿈이야. 꿈...!

심호흡을 하고.....

[여, 여기는 어떻게...? 아, 아저씨가...아니 아니, 사,사장님이 여긴 왜?.....무엇때문에 여길...그러니깐...제 말은....!]

[우선은...]

준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티슈를 뽐았다.

[우선은 이 엎질러진 커피부터 마져 닦는 게 좋겠군...]

손수,준수가 엎질러진 커피를 닦으려 하자 설이 그것을 낚아챘다.

[왜 사장님이 여기 있는거죠? 절... 절 찾아온건가요? 그게...아,아니길 바래요]

자신의 목소리가 많이 침착해진 것에 설은 감사했다.

[아니길...바란다?]

준수가 느릿하게 말했다.

설은 재빠르게 치우고 그와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았다.

그가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설은 그곳이 교실임을 알고 당황했다.

학교에서 그녀의 과거와 마주하고 있다는 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여긴...교,교실이고 전 선생이에요. 나,나가주셨으면...?]

[걱정돼?]

그가 가소롭다는 듯 입가를 치켜올렸다.

[걱정도 팔자...난 당당히 윤설이란 선생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다고 했소. 그러니깐 친절하게 가르쳐주던걸?]

[왜,왜 저를...?]

설은 불안한 마음과 긴장감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가 웃었다.

쯧쯧...

[내...기억속의 너는...]

준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너는.....

그녀는 이제 더이상 그때의 그 여리고 순수하기만 한 여대생이 아니다. 성숙한 여인이다.

[내 기억속의 당신은 두려움을 모르는 당돌한 여자였어. 그런데 왜 지금, 당신은 날보고 어쩔줄 몰라하지? 무엇때문에?]

준수는 손끝으로 교탁위에 놓인 스킨다빈스의 잎을 쓰다듬었다.

그 단순한 동작에 설은 숨을 죽였다.

그날밤이 떠올랐다.

저 손길...!

저 손길이 나의 몸을...!

설의 숨을 쉴수가 없었다.

잊고 싶었던, 잊어야하는, 잊고자 노력했던 저 남자와의 하룻밤...!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띵.했다.

그래서 설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준수는 설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저 작은 머리속으로 지금 무엇을 상상하는지...알겠군...!

잊지는 않았군, 윤설...그래, 잊지마! 절대로!

준수는 그녀 앞 책상위에 걸터앉았다.

[무엇이 두렵지? 내가? 아니면... 당신?]

준수는 그녀가 지금 아주 혼란상태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사장님도 저도 두렵지 않아요! 다만, 다만 사장님이 왜 여,여기에 있냐는 거예요!]

[저런...그새 말더듬는 버릇도 생겼소?]

[......!]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건망증도 있는 거 같고...내가 얘기했잖소. 윤설, 당신 보러 왔다고]

[그러니깐, 왜요? 왜 저를...?]

그가 일어섰다. 그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설도 따라 일어섰다.

그게 실수였다.

마주보는 꼴이라니...

그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그래...그 눈빛은 그대로군...

설의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즈끈...저려왔다.

빌어먹을...스물 일곱에 저런 눈빛이라니... 환장하겠군...

[흠...이제 얘기할 준비가 되었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하지만...여기선 아니오. 오늘은...그냥 당신을 보려고 온거요]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안에 쥐어주었다.

[전화하시오. 할 얘기가 있으니 반드시...! 일주일안에 하지 않으면  내가...수업중에 찾아올 수도 있소]

그녀의 눈이 설마 하듯 커졌다.

그가 메마르게 웃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그녀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는 게 느껴졌다.

재밌는 반응이군...!

[전화하시오,반드시!]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내 이름은 김준수요. 기억해두는게 좋을거요, 윤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연기처럼...조용히...

 

설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비몽사몽...어질어질...

잠시 꿈을 꾼 듯도 하다...

예상치, 전혀 예상치 못해던 사람과의 만남.

그는 아무렇지 않은 반면에 자신은 너무 놀라하는 꼴이 기관이었다.

돌이켜보니 자신은 마치 어리숙한 여학생같이 얼빠져 보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은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명함의 감촉따위는 안중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