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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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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오늘을 지우다.


BY 데미안 2010-12-17

 

8.

여자는 모든걸 내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훨훨 날아 보고 싶었다.

그렇게 했다.

여자는 남자의 리더 아래 마음껏 날아 올랐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남자와 함께 손을 맞잡고 날았다.

 

처음엔 여자를 위한 절정이었다면

이번엔 남자 자신을 위한 절정이었다.

남자의 거친. 환희에 찬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축. 늘어졌고 이윽고,

남자가 여자 위로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온 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간 느낌이었다.

완전한, 그야말로 완전한 해방감과 완벽한 절정을 경험한 것이다.

남자의 입가에  나른하고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네가...나를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어]

만족감에 찬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여자를 다시 품안으로 끌어 안으며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좀더 자 두는 게 좋겠군...어쩌면 너와 할 얘기가 있을 것도 같아...]

남자는 긴 숨을 토해 내며 눈을 감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남자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까마득이었다.

그렇게 자고 일어 났을 때 밖은 햇살로 가득차 있었고 남자의 팔은 비어 있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직감적으로 남자는 여자가 떠났다는 걸 알았다.

베개 위에 하얀 메모지가 곱게 접혀 있었다.

 

<아저씨라고 하기엔 너무 젊어서...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으로선 그 말 밖에....

저와 저의 가족을 살려 주셨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언젠가는 반드시 그 돈을 꼭 갚겠습니다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돈은 갚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안녕히......>

 

남자는 편지를 구겨 버렸다.

벌거벗은 것도 잊은 채 창가에 섰다.

대단한 여자다.

모든걸 아낌없이 주고도 여자는 떠났다.

심지어...

여자는 두번 다시 남자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못박고 있었다.

편지에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오히려 반가와 해야 하는데도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여태 남자가 만났던 여자들은 어떡하든 그의 시선을 잡아 두려 했는데 여자는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했다.

남자는 여자가 그렇게 쉽게 자신을 떠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입술에, 그리고 그곳엔 아직도 여자의 짙은 향기가 베어 있는데 말이다.

 

물줄기 아래에서 생각을 정리하려 해 보았으나 남자의 한쪽 가슴에서 여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지웠다.

아니, 어쩌면 여자는 오늘을 지우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9.

며칠이 흐른 후 남자는 호텔 까페로 내려갔다.

유마담이 남자를 알아 보고 호젓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사장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지...나를 채찍질 해야 할지...솔직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와주신 거, 잊지는 않을게요]

유마담이 시니컬하게 웃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생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의 눈매는 참으로 서글서글했다.

가을빛 같은 여인이었다.

새삼, 남자는 그 여자가 그리웠다.

묻고 싶었다.

 

[그 소리 듣고자 온 건 아니오. 그 돈은, 받지 않겠소. 받을 수가 없소. 그...아가씨에게 분명히 전해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그래, 모친은 어떻게 되었소?]

ㅡ그 여자, 이름이 뭐요?....남자는 정작 그렇게 묻고 싶었다.

[내일 수술이에요]

[다행이오]

ㅡ어느 대학교 학생이오?...

[김사장 덕분이지요]

ㅡ어디에 살고 있는지?...

[음...]

남자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여자와의 인연은 하룻밤이 전부였다.

그 하룻밤마져 여자는 바람과 함께 지워버리길 원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된 거래였다.

빌어먹을......!

 

10.

어둡던 하늘은 다시 개임이다.

끈적끈적 달라 붙던 무더위도 이제 사라지고 그 자리엔 순식간에 가을이 오고 있었다.

거리는 가을 바람과 함께 베낭을 메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분주하다.

더불어 아이들 또한 활기를 되찾은 듯 조잘거리며 학교 안을 가을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 모두들 다 그렸죠?]

[네에!!!!!!]

[그럼, 그림은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가방을 메고 의자를 밀어 놓고 집으로 돌아 가면 됩니다.]

[네에!!!!]

아이들은 목청껏 대답을 하고 선생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윤설.

그녀가 초등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게 벌써 2년이 넘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같이 웃고 떠드는 게 행복했다.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 안을 청소하는 건 설의 몫이었다.

가끔 아이들과 함께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청소는 그녀가 하고 있었다.

[똑똑...]

설의 동료 교사이자 친구인 혜지가 교실로 들어왔다.

[넌 청소를 하면서도 웃고 싶니?  그렇게 좋아?]

[그럼, 아이들 보고 있음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하여튼 넌 딱 체질이다. 커피 마시자]

혜지는 자신이 손수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내밀었다.

[너 내일 모임 있는 거 알지?  같이 가는 거다?]

[알았어]

 

 

[참, 어머니 가게는 어때? 잘되지?]

[그럼. 단골 손님이 많아.  엄마 볼려고 매일 오시는 분도 계시는 걸]

[아! 그 노신사? 어머, 대단하다]

혜지는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 했다.

설은 웃었다.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설의 어머니는 건강해졌고 유마담과 작은 커피샵도 열었다.

성공적이지는 않아도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설은 원하던대로 선생님이 되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간혹...때때로 설은 그 남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어쨌던 그에게 빚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