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남이었다. 철저한 타인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건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자식까지 낳고 해로하였었건만 이제 남편은 등을 보인 채 떠나려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마저 가차없이 짓밟고 그는 타인의 품을 향해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수희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도,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남편도 잃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희는 부인할 수 없는 그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럽고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남편과 재회한 뒤부터 수희는 밤마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것을 사약처럼 입 안에 털어넣어 겨우겨우 잠이 들면, 이번에는 텅 빈 방안에 홀로 가위에 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못하고 매번 시커먼 악귀로부터 겁탈을 당하곤 했다. 그녀의 온몸을 붙잡고 씩씩 용을 쓰는 악귀의 숨소리는 얼마나 소름 끼치게 만들었던가.
수희는 부처님에게 간구하였다. 관세음보살님께도 두 손 모아 빌었다. 제발 즐거웠었던 시절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제발 행복했었던 과거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어서 이 가공할 절망의 구렁텅이로부터 헤어나게 해달라고.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의 의사가 분명해진 이상 이제 더 그에게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수희가 자포자기에 빠져버리자 시어머니가 뻔질나게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당신 아들과 며느리의 이혼 문제가 표면화 되면서, 그녀는 둘씩이나 되는 시누이들을 앞세워 구체적인 문제까지 일일이 간섭하였다.
제일 먼저 위자료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아파트는 원래 남성균의 명의로 돼 있었다. 몇 개의 은행통장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나, 하다못해 집 전화까지도 모두 남편의 명의로 돼 있었다. 수희의 이름으로 등록돼 있는 재산은 정말 바보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시어머니는 우선 아파트를 처분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 매도금을 삼등분 하여 그중 둘을 남편과 시어머니가 갖고, 나머지 한 덩어리를 수희에게 던져주겠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주장인 즉은, 애당초 두 사람이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차렸던 집은 자기가 장만해준 것이고, 그 집을 계속 크게 늘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자기에게도 한 몫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오히려 수희에게 말하길, 네가 어디 직장이라도 다녀 재산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적이 있느냐면서 침까지 튀기며 따졌다. 일테면 남편 내조하고 자식 키우면서 허구헌날 가사노동에 시달려온 것은 남들도 다 하는, 여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얘기였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며느리는 놀고 먹었다는 논리였다.
같은 여자로서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더구나 멀쩡하게 잘 살던 며느리에게 반강제적으로 이혼을 종용하면서 도저히 이럴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이나 가까운 친구들은 분개했다. 그들은 수희를 대신해서 얼마든지 시댁측의 부당한 처사를 따져보겠노라고 나섰다.
하지만 수희는 돈 문제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그녀는 싸울 힘도 없었다. 수희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녀는 어서 그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시댁측에선 서둘러 아파트를 부동산중개소에 매물로 내놓았다. 시세보다 다소 싸게 내놓자 매입을 희망하는 작자는 곧 나타났다. 시누이는 아파트를 처분하면서 받은 계약금을 정확히 삼등분 하여 그 중 하나를 봉투에 넣어 올케에게 주었다. 수희는 그 돈으로 서울 변두리 쪽에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한 채 전세로 계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일이 돌아왔다. 시누이는 매수자로부터 잔금을 받아 그것 역시 셋으로 나눈 뒤, 다시 한 번 엄지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정확히 헤아려선 수희에게 돈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삿짐을 꾸리며 수희는 많이 울었다. 자기 신세가 너무 슬프고 처량해서 하염없이 울었다. 라면상자나 과일박스에 어린 아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 등을 행여 깨질 새라 정성껏 꾸려넣다가도 눈물이 앞을 가려 그냥 주저앉아 흐느껴울었으며, 제 옷과 남편의 옷을 분리해 묶다가도 사랑이 허무하고 결혼생활이 덧없어 목놓아 울었다.
오 월이었다.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그 자태를 뽐내는 기막힌 계절이었다. 젊은 남녀들은 부지런히 짝을 지어 식장을 예약하고, 그래서 주말이 붐비면 평일도 좋다고 어서 이 환장할 계절에 영원히 추억에 남을 결혼식을 올리자며 숱한 하객들을 불러모아 한 쌍 두 쌍 부부로 결합하였건만, 그 오 월에, 그 좋은 계절에 수희는 덜컥 이혼을 했다. 벗꽃이 피었다가 눈발 같은 흰 꽃잎을 도심 곳곳에 흩뿌리며 지고, 라일락 향훈이 아련하게 코끝을 스쳐 그 황홀한 내음으로 온 도시 사람들을 혼미케 하는 계절에 수희는 끝내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야 말았다.
사랑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남녀간의 맹세는 얼마나 헛되고 맹랑한 것인가. 사랑한다고, 그래서 뜨겁게 애무하며 영원을 약속하였었건만 이제 한 여자가 버림을 받았다.
사랑은 신기루가 아닐까. 죽을 듯 목을 죄어오는 갈증에 괴로워할 때 그 고독한 여행자들의 분별 잃은 의식 속에 가물가물 떠오르는 환영.
사랑한다는 말로 유혹하지 말라. 또 사랑한다는 속삭임에 넘어가지도 말라.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시누이가 건네준 돈을 받아쥐고 이제껏 정 들었던 아파트 단지를 떠나면서 수희는 허탈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근래에 자기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언뜻 실감이 나질 않았다. 마치 긴 악몽 속을 헤맨 듯 느껴지기만 했다.
친구의 승용차 조수석에 올라, 단촐하게 이삿짐을 실은 화물차의 뒤를 따르면서 수희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망연히 차창 밖을 응시했다. 답답한 기분이 들어 차창 문을 조금 열자 신선한 봄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희는 조수석 시트에 편안하게 기대앉아 두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놓기 시작했다.
안녕, 하고 수희는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껏 살아왔던 아파트 단지 내 모든 것들에게 그녀는 이별을 고하였다. 길가의 나무들아, 너희들도 잘 있어. 지난 겨울은 무척 추웠었지. 이제 봄이 되어 푸른 싹이 돋는구나. 그래, 잘 있어. 아주머니들도 안녕히 계세요. 어머, 시장에들 다녀오세요. 그래요. 전 떠난답니다. 어디로 가느냐구요. 멀리 가요. 아주 멀리. 부디 행복하게들 사세요. 꼬마들아, 너희들도 잘 있어. 그 강아지 참 귀엽게 생겼구나. 그래, 강아지야. 너도 주인 말 잘 듣고 잘 있어. 빠이 빠이. 경비 아저씨, 그 동안 추위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봄이 왔으니까 지낼 만하실 거에요. 안녕히 계세요. 모두들 안녕히.....
그때 어디선가 엄마, 하는 어린애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때렸다. 수희는 자기도 모르게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엄마아!]
현이 올 리 없었다. 그러나 수희는 미친 듯 차창 밖을 둘러보았다. 과연 어떤 어린애가 자전거를 타고 막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현이었다. 아니, 현이와 비슷하게 생긴 애였다. 현이와 같은 또래의, 전혀 낯선 어린애였다. 분명 현은 아니었다.
허리를 틀어 그 광경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던 수희는 갑자기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가 하나 가슴에 푹 꽂힌 듯 목이 메어왔다.
그래, 현아. 너도 잘 있어. 이 엄마는 너와 오손도손 살던 정 들었던 집을 떠난단다. 너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구석구석 서려 있는 집을 팔고 이제 엄마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간단다. 네 친구 민규네 집은 그대로 있어. 또 지혜네도 당분간 이사 갈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 네가 원하면 언제든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엄마는, 이 엄마는 네가 다시 찾아와도 아마 볼 수 없을 거야. 네가 쓰던 장난감은 깨지지 않게, 부서지지 않게 과일상자에 넣어 튼튼하게 꾸려놓았단다. 고모가 갖다줄 거야. 현아, 잘 있어. 아빠 말씀 잘 듣고, 새 엄마 말씀도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야 돼. 엄마는 멀리서나마 네 모습을 지켜보겠단다. 현아, 잘 있어. 밥도 잘 먹고 튼튼하게 커야 해. 그래야 씩씩한 사내지. 현아, 현아.....
수희는 오열하였다.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엉엉 울었다.
부처님. 우리 현이 잘 크도록 보살펴주십시요. 밥도 잘 먹고 뭐든지 잘 먹어 씩씩하고 튼튼하게 성장하도록 굽어살펴주십시요. 행여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도록, 밝고 명랑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세요. 부처님, 우리 현이를 제발 지켜주십시요. 제발.....
이삿짐을 실은 화물차는 이제 막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넓은 차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던 승용차는 서서히 속력을 내 화물차 앞으로 나아갔다. 두 대의 차량은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밀려오고 밀려가는 많은 차량들 속으로 뉘엿뉘엿 사라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