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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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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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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의 추억 ( 5 )


BY 비우기 2004-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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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혼인의 추억 >을 열심히 읽어주시는 분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 글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혼인 전의 삶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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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인 나는.....1949년 2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는데.....

위로는 형님이 있고....아래로....우리의 중신애비인 바로 아래 남동생.....

그 아래로 여동생이 줄줄이 3명.....또 그 아래로 막내 남동생.....

이렇게 7남매이다.

우리 집은......내가 선을 볼..... 당시에는.....정읍 내장사에서.....

조그만 식당을 얻어.....장사를 하였는데.....내리막 길을 가는.....

집안이 다 그러하듯이.....돈은 잘 벌리지 않고.....쓸 일만 많이 생긴다.....

********

 이러한 상황은.....내가 대학 4학년 여름 방학때에.....

군산에서......내장사로 이사한 이후로.....쭉 계속된 것이다.....

잘 나가던 우리 집안이 망한 것에는.. 나도 한 몫을 단단히 했는데..

우리 아버지의 명문 학교에 대한 한풀이로.. 내가 고등학교를..

서울의 명문고로 가고.. 아버지의 소원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력공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을 한 것까지는.. 대 성공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내 팔자에는 분에 넘치는 것이어서 인지..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은 바로 그 날 저녁..

나는 4년여 동안.. 말한마디 못 건네고.. 나홀로 짝사랑하던..

첫사랑의 여자에게.. 차이는.. 큰 수모를 받고..

그 것이 원인이 되어.. 나의 대학교 생활은.. 우울한 암흑의 나날이었는데..

그래서.. 남들이 4년 다니는 대학을.. 5년다니며..

공부는 하는둥마는둥.. 겨우겨우 턱걸이로.. 졸업을 하였으니..

그 동안.. 내가 헛되이 쓴 돈이.. 우리 집안이 망하는데..

크게 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나는 졸업을 하고.....군대에 입대를 하면서.....

결심을 한 것이 하나 있는데.....

......

앞으로는 집에서 돈을 타서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대학교까지 졸업한 남자가.....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야겠다고.....결심하는 것이.....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겠지만.....

이것을 잘 지키려면...제법 큰 노력이 필요하다.....

********

 나는 1973년 9월 28 일에.....전주에 있는 35사단 신병훈련대에......

입대를 하였는데.....첫날 오후.....옷을 군복으로 바꾸어 입는 순간부터.....

나는 완벽한 가난뱅이로..... 다시 태어 났다.

이 당시의 훈련대 조교들은 신병들이 가지고 온 돈을 털어 내는데.....

아주 노련한 솜씨를 보이는데.....나같이 어리버리한 친구는 ......

조교들의 명령에 따라.....앞으로 굴러...뒤로 굴러...몇번 하다보면......

여지없이.....자기가 가지고 온 돈을 다 털린다......

하기야 나는 별로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아.....털리고 말고 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

그리고 난 후에 군복으로 갈아 입고.....자기가 가지고 온 옷과 신발은.....

잘 포장을 한 후에.....사물꾸러미를 만들어.....집으로 부치는데.....

그 때에 주머니를 뒤져보니.....조금 남아있던 잔돈도.....

몇 번 구르는 사이에 다 없어지고 없다.....

하기야 앞으로는 돈을 안 쓰기로 했는데......잔돈은 몇푼 남아있어 뭐하랴.....

그런 생각을 하며.....포장한 사물 꾸러미에 주소를 쓰려는데.....

언 듯.....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

그것은 우리집이 지난 해에 내장사로 이사를 갔으니.....

부치는 주소를 내장사로 해야 하는데.....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장사 우리집 주소가 내 기억에 없다.....

하기야 정확한 주소가 없어도.......집에서 하고 있는 식당 이름을 적으면.....

되는데.....하는 생각을 하다가.....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신병들이 주소를 적으면서......두고온 부모 생각을 하는지.....

애인 생각을 하는지.....다들 눈물을 찔끔거린다......

그 광경을 보며....나도 절로 눈시울이 이상해 지면서.....

내가 일년전에 나홀로 청혼을 한..... 나의 작은 아가씨에게.....

군대에 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온 것이 생각이 났고.....

이것을 그리로 부치면......내가 군대에 갔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알 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정확한 주소를 모르는 우리집에 부치는  대신에.....

내가 아주 정확하게 주소를 기억하고 있는......

군산에 사는......나의 미래의 아내에게......그것을 부쳤다......

**********

그리고는 정신없이 몰아부치는 신변훈련대 특유의 분위기에 휩쓸려.....

일주일쯤 지났는데.....본부당번이 와서 중대 본부 서무 행정병이

나를 보잔다고 한다.....

나는 며칠전에도 그 행정병이 불러서 간 적이 있었는데.....

나의 신상기록표를 보면서.....

내가 이번 훈련병 중에서는 제일 좋은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면서.....

훈련병에게는 본부당번이 가장 좋은 특과라고 하며.....

나보고 그것을 하라고 권유를 하였는데.....내가 거절을 하자......

매우 이상한 놈이라는 듯이 쳐다본 적이 있었다.....

사실 훈련병에게는 본부당번이라는 직책이.....훈련을 편하게.....

받는 것을 보장하는 아주 좋은 자리이다.

훈련병 시절에 가장 힘든 순간의 하나가 바로 저녁 점호인데.....

본부당번은.....그 시간에 본부 행정요원들의 보좌를 해야하기 때문에.....

저녁 점호에서 열외를 한다.....그 이외에 힘든 훈련이 예상이 되면.....

적당한 구실을 부쳐 열외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본부당번이다.....

그래서 훈련대에 입대를 하는 훈련병 중에는 미리 손을 써서.....

본부당번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그러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그 당시의 우리 중대 서무병은.....공정 인사를 주장하며......

가장 좋은 대학교를..... 졸업한 친구가....

본부당번 일을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나를 본부당번으로 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나는 군대에 들어와 고생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가장 편한 자리로 가면.....나머지 군대 생활을......

내가 원하는 대로.....어떻게 고생..... 또 고생을.....할 수 있겠는가..

*********

서무병 앞으로 불려간 나는.....책상위에.....내가 부친.....

사물 보따리가 회송되어 온 것을 보고.....역시.....

이것이 문제이구나.....

나의 과거가 미래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 버렸구나......

하는 절망감이 스치는데.....서무병이.....사물보따리가.....

집에서 군대에 간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주소를 잘못 적어 되돌아 오게 만들었냐고......

다그친다.....내가 주소는 맞게 적었는데....왜 되돌아 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래...하면서...다시 인사 기록표를 들여다 본다.....

그런데 인사기록표 상의 주소와.....

내가 사물 보따리에 적은 주소가 정확하게 같자.....

고개를 갸우뚱하며......이것을 부칠 만한 다른 주소가 없냐고 묻는데.....

없다고 하자.....그러면 이 사물보따리를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라고 하고...다시 내무반으로 돌아 왔다.....

*********

나의 사물보따리를 폐기처분하는 것은......

바로 나의 과거를 폐기처분하는 것이었는데.....나는 군대가 알아서.....

나의 과거를 폐기처분하고.....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만들어 주길 바랬다.

*******

군대는 인간 개조를 하기 위하여.....가장 좋은 장소중의 하나이며.....

나는 이러한 군대의 특성을 잘 이용하여.....내 자신의 인간 개조에.....

어느 정도 성공을 하고 제대를 했다.....

그리고 나의 복무기록표 상의 주소는.....예전의 군산 집 주소로 되어 있었고.....

나의 작은 아가씨의 집이 우리 집 옆집이어서.....같은 주소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사물보따리를..... 나의 작은 아가씨에게 보내기 위해서는.....

다만.....내가 사물보따리의 주소 뒤에....괄호를 하고....

그 여자의 아버지 이름을 적고 그 뒤에...방이라고 쓰고.....

괄호 닫고를 하고.....를 추가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그 것이 나의 작은 연인 집에 갔다가 되돌아 온 것으로.....

그 사물보따리는 자기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

 

 *********

이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인..... 

나의 집사람의 혼인 전의 삶은 어떠했는지.....잠간 살펴보자.....

물론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것이며.....

결혼을 하고 살 면서.....또는 최근에 이 회고록을 쓰기 위하여.....

집사람에게.....그 녀의 과거에 대하여.....

이것저것...물어 보아 알아 낸 것을 종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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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사람은 1954년 11월 생으로.....말띠이며.....

위로 시집을 가서...아들 하나.....딸 하나를 둔...나랑 동갑의 언니와.....

우리의 중신 아비이며..... 그 당시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오빠.....아래로.....그 당시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그리고.....막내 여동생.....이렇게.....5남매의 한 가운데이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목포에서 고등학교...서무과장을 하셨고.....

어머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

집사람의 고향은 전남 무안군 몽탄면.....이며.....

어린 시절에는 주로...고향에서.....할머니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 마을의 한가운데에는 아주 커다란 당산나무가 두 그루가 있고.....

그 옆으로는...조그만 개천이 흐르는데.....

집사람이 어렸을 때에는 물이 아주 맑아서.....

여름에는 그 곳에 들어가 동내 아이들과 함께.....물놀이를 하는 것이.....

하루의 주요 일과이었고.....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온 몸이 쌔까맣게 반짝거리는 흑진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 마을에서.....1 킬로쯤 동쪽으로 나오면.....

몽탄면 소재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작로가 있고.....

또 거기에서 논길을 따라 동쪽으로 1킬로쯤 가면.....

바로 영산강의 중하류가 되는데..그 곳은 강폭이..거의 100미터나 된다.....

지금은 영산강에 하구언이 설치가 되어..장어들이 회귀하지 못하지만......

집사람이 어렸을 때에는.....마을 앞...개천에도.....

장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집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중의 하나가.....바로 이 장어인데.....

그 당시에 아버지가.....가끔 무슨 나무의 잎과 뿌리를 찧어서.....

그 것을 시냇물에 풀면.....장어가 많이 잡혔고.....

그 것을 구어서 맛있게 먹은 가락이 있어서.....

아직도 그 맛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또 한가지.....

집사람이 가끔 기분이 좋을 때에 꺼내는 이야기가.....

자기가 어느 날 신작로 옆에 있는.....초등학교까지 혼자서 갔는데.....

물놀이를 하다가.....길을 따라 혼자서 간 것이어서.....

홀랑 벗고 있엇는데.....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 보더란다.....

그래서 학교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웅쿠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어둑어둑 해 질 무렵.....할머니가 거기까지 찾아와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 왔다고 한다.....

그 외에 할머니와 연관된 추억들을 가끔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 분을 직접 뵌 적이 없어서인지.....집사람의 이야기에.....

응응...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 고작이다.......

********

집사람은 초등학교는...목포 산정초등학교를 나왔고.....

중고등학교는 광주 중앙 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것은....목포 중학교를 졸업한 오빠가....광주일고에 입학을 하였는데.....

집사람이 꼭 3년 터울인 관계로.....같이 광주로 유학을 갔다는 것이다.....

이 두 남매는 광주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다행히 살림을 해주는 식모언니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부모 슬하를 떠나.....두 남매만 객지에 나와 자취를 한다는 것이.....

수시로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고.....이러한 것을 둘이서 헤쳐나가다보니.....

두 남매사이가 특히 가까워 졌을 것이다.....

********

우리 집사람은 중학교 때에 키가 다 커서.....그 당시에는.....반에서.....

큰 키에 속했고.....그래서 짝궁들이 키가 크고.....또 친한 친구들이.....

다 키가 크다.....특히 중학교 때에는.....광주 일고에 다니는 큰 키에.....

얼굴이 하얗고 단정한 용모의 멋쟁이 오빠를 친구들이 은근히 좋아하여.....

친구들이 우리 집사람을 자기들 모임의 마스코트로 대우해 주었다.....

********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자.....

혼자 남게 된 집사람을.....친한 친구중의 하나가 자기의 집에서.....

같이 지내도록 배려를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의 외모는 거의 정반대이지만.....

성격과 취향이 같아서.....친자매같이 사이좋게 지낸 모양이다.....

나도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서....몇년 얹혀 산 적이 있지만.....

남의 집에서 산다는 것이.....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3년간......둘이서 같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공통점.....다른 점.....등이 잘 조화가 되어서일 것이다.....

*********

두 사람은 다 성당에 다녔는데....집사람은 소피아.....친구는 스텔라가 .....

세례명이다.

또 두 사람은 모두 음악반에서.....바이올린을 연주하였고.....일년에 한 두 번

연주회에도 나갔다.

이렇게 해서....객지에서 6년을 지내며...중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가.....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인 1973년 초에.....목포에 있는.....

교육청에 임시직 비서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 후로 6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자기가 벌은 돈은...

일부는 시집갈 밑천으로 저축을 하고.....일부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있어서.....

철철이.....광주 충장로에 가서.....자기가 좋아하는 옷도 사고.....특히

구두나 부츠는 집사람의 발이 아주 작아서.....

일반 기성화는 그 당시에는 맞는 것이 없어서 거의 다  맞추어 신고.....

휴가 때면...명산 대천으로 친구들과 함께.....놀러가고.....

교양을 쌓기 위하여.....목포 문화원에 가서 가야금도 배우고.....

유행을 하는 것이라면.....모두 최첨단을 걸었는데.....그래서.....내가 선 볼

때에는.....집사람의 온 몸이.....그냥 그대로.....뉴 페션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인생을 사는데.....별로 시집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이..... 나하고 짝이 될려고 그래서인지......

엉뚱하게 1978년도에 몰아친 제 2차 석유파동의 전초전으로.....

관공서의 임시직에 대한...해고 바람이 불었고...그래서.....

그 때까지도 그냥 임시직으로 있던 집사람도.....1978년 12월 말 부로.....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해고가 된 집사람은 12월 초까지만 직장에 나갔는데.....

그래서.....나하고 선을 보던 날이 공식적으로는.....

직장생활 마지막 날이었지만..벌써..한달 가까이 실업자 노릇을 했으니....

무언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집사람이 해고가 된 원인이.....임시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 것은.....그 전에 장인 영감이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정식 직원으로 돌릴 수 있었을 텐데..그걸 안해서..딸이 해고가 되었다고.....

장모님이 수시로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장인 영감이 근 한달간 곤욕을 치루고 있었는데.....다행히.....

딸이 나하고 만난 후에....바로 시집을 간다고 하자.....

장인 영감은.....곤경에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여.....

선본 다음날 나와 겸상을 하면서.....겨우 두 마디만 체면치레로.....

물어 보았던 것이다......

*********

이와같이 집사람은 나한테 시집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나의 형편이 많이 나빴어도.....우리의 혼인은 순풍에 돗 달 듯이.....

아주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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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공 : 비우기 ( http://www.beug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