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말 미처 매듭도 짓지 못하고 엄마하고의 통화는 엉거주춤하게 끝을 냈지만 오금이 저려와서 앉은 자리에 송곳이 박힌 듯 퉁기듯이 일어났다.
이 여우의 묘한 웃음에 나의 덜미가 잡혔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앞이 노랬다.
재수 없으려면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옴 오르고, 자빠져도 개똥에 코 박는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다.
"언제왔어?"
억지로 입자위 밀어내며 웃는척 했지만 가슴은 두 방망이질로 펄덕 거렸다.
"으~~응.............아까 왔어"
아까??...........
'아까'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는게 또한번 나의 멱살을 움켜쥐는것 같이 불안하고 입속에 가시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도둑놈 제 발 저리다고 애써 눈길을 피하고 죄없는 씽크대 문만 요란 스럽게 여닫기를 반복하다가 커피 통을 끄집어 냈다.
"커피줄까?"
내가 언제부터 이 여우에게 이렇게 겨울배 같이 야들야들 나긋나긋했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의 글귀가 생각났다.
'나의 약점을 쥐고 있는자는 언제나 나의 지배자이다'
지배자(?)에게 커피를 타는 나의 손은 가볍게 떨렸다.
이번에는 쥐약이 아니고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약이라도 있으면 쏟아붓고 싶은 심정이다.
내 귀는 온통 여우 입에 쏠려 있었고, 여우가 뱉는 가시 냉큼 받아서 뭉개버릴 각본만 머릿속에 굴리고 있자니 안 넣어도 될 프림을 두 스푼이나 넣었다.
여우는 살 찐다고 프림 든 커피는 마시지 않고 블랙만 마신다.
이번 한번만 마시라고 필요 이상의 너스레를 떨며 마주 앉아서 자세히 보니 여우의 눈자위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입자위가 실룩거리는게 건드리면 터질 기세였다.
분명히 무슨일이 있을것 같아서 내 약점도 상쇄 시킬겸 은근한 투로 아주 걱정스럽게 물었다.
"얼굴이 안좋네........무슨일 있어?"
아군인척, 갖은 아첨이 다 실린 내 아부성 물음 끝에 기다렸다는듯이 던지는 여우의 말 뽄새가 예사롭질 않았다.
"빌어 쳐 묵을 년............"
순간 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 되어 옴을 느꼈다.
입속에 든 커피를 미처 삼키지도 못한채 넋잃고 여우의 입을 쳐다 보았다.
아무리....아무려면 날보고.....
"아니........아니..........우리 애들 고모년......."
뭔가 잘못되었다는걸 알았는지 황급히 뱉은말 수정하면서 낯이 벌게진다.
난 하마터면 입속의 커피 앞으로 뿜어 낼 뻔 했다.
"그 빌어쳐 묵을년이 어디서 간섭이야....출가외인이..........."
미처 식지도 않은 커피 입속에 쏟아 부으며 입에 담지도 못할 육두문자는 아는대로 배운대로 다 써먹는다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 간신히 삼키면서 정색을 하고 물었다.
"왜?......새경이 고모가 뭐래?"
"그년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지랄 뻐들잖아...친정일에......."
쿡쿡...
지 말을 하고 있는거 이 여우는 알랑가.....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전화로 대판 싸웠잖아........백여시 같은년........"
그러면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질금질금 눈물을 쏟는게 가관이다.
나에게 하소연 할겸 위로도 받을겸 온게 분명하다보니 정작 내가 걱정 하는 일은 은근슬쩍 묻혀 지는 듯 했지만 지뢰를 밟고 있는 느낌은 떨쳐지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그 새경이 고모 점잖더구먼......"
새경이 돐날 처음 본 새경이 고모의 조금은 고집스러운 면이 보이는 넓적한 얼굴과 느릿한 말투가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여우하고 게임이 안될 것 같은 순하디 순한 시골 아낙 같아 보였는데 여우와 맞섰다면 잠재적인 싸움닭 기질은 가지고 있었나 보다.
불난집에 휘발유 드럼채 쏟아붓고 있는 내 뼈있는 말에 여우는 발칵 거린다.
"씨발........잠잖은거 다 디졌뿟나.....내가 손위인데......지가 막말을 해?"
자꾸만 달싹거리고 싶은 내 칼날 같은 입이 그냥 있을것 같지 않아서 슬며시 일어났다.
계속 염장 지를 말만 골라서 해 주고 싶은데 덜미가 잡혀 있는 상태에 자중을 해야 했다.
꼬시다........저만 여우의 특권 있는 줄 아나......
새경이 고모가 좀 더 할퀴고 물어 뜯지 않고 막을 내렸다는게 영 재미가 없다.
일단 재미없이 일막을 내리긴 했어도 입가로 미어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수가 없어서 솟기지도 않는 마른 기침을 요란스러이 해댔다.
이럴땐 조금 더 고명을 뿌리고 쥐약을 치고 싶어진다.....까짖거 엎어진김에 쉬어간다고.....
"그래..맞어..친정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년은 그저 주리를 틀어야 돼"
은근히 여우의 편을 드는 척 내가 더 입에 거품을 물었다.
얕은 속알머리만 굴리는 이 여우는 나의 뼈 있는 말이 미끼인줄도 모르고 덥석 물었다.
""주리만 틀어??...그냥.....엎어놓고 밟아도 시원찮어...."
"그냥 밟아서 속이 풀리나?......안 디질 만큼 밟고 귀싸대기 곶감분이 나도록 왕복으로 두들겨 패야돼.."
이 시간만큼은 희안하게 둘이 주거니 받거니 죽이 맞았다.
내가 씹는건 여우였고, 여우가 씹는건 여우의 백여시였다.
그런데 여우는 정작 씹히는줄 모르고 내 장단에 신이나서 평양 판수 가얏고 따라 춤추는 꼴이었다.
일석이조...
난 돌 하나 던지고 두마리 새를 잡았다.
은근히 편 들어 주는척 하면서 그동안 잃은 점수 만회도 시키고 시누이라는 벼슬 무서워서 꼬랑지 내리고 와신상담 벼르던 뼈속에 박힌 곪아 터진 말 쏟아내어서 좋았다.
네가 여우면 난 구미호다........등신 같은기.....
한편으로는 장단맞추는 내 꼴이 한심했고 속 얕은 여우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최면에 걸려든 여우는 엄마의 전화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렸는지 내 전화건에 대해선 일언반구 꺼내지도 않고 한참을 입에 거품물다가 돌아 갔지만 오늘밤에 걸려올 시어머니의 전화를 어떻게 감당할지 해답이 안나온다.
입 가볍기는 과부집 종년보다도 더 날렵한 파발마 여우의 입이 조용히 무게잡고 있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어머니의 전화는 밤이 늦도록 걸려 오질 않았다.
방아쇠를 당겼을때보다 총구를 겨누고 있을때가 더 불안 한 법인데...
단두대에 목 들이밀고 있으면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쉰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언제까지 총구앞에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점점 불안했다...머리가 돌고 쉴 지경이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일찌감치 맞는게 낫지만 그렇다고 미리 형틀메고 형장으로 들어서기엔 뭔가 넌센스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전화기를 몇번이나 주물렀다.
먼저 자수해서 광명 찾을까.
아니면 화장실 고쳐 드린다고 미리 약을 써 볼까..
그것도 아니면 죽여 주십쇼 하고 머리 들이밀고 처분을 기다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