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 조차도 없이 떠나 버린 친구..
민주가 오해를 했던 일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그게 아니라는 한마디는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날 이후로 그 친구에게선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악의에 가득찬 편지 한 통으로 그렇게 그 친구를 보내고 난 후, 짙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한 순간도 선명하지 않은 남겨진 시간들의 기억 중에 단 하나. 뚜렷하게 기억으로 남은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진로를 결정하는 일로 엄마와 크게 다툰 일... 바로 피아노에 대한 기억이다.
그 해 여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민주로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 준비를 해야 했다.
이것 저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왜 잠시 쉬어야 하는지 한 번도 명쾌한 답을 듣지 못한 상태로 접었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을 꺼냈던 것도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예술 고등학교...
민주가 다니던 중학교에선 예술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실기를 준비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개교 이래 처음으로 진학지도를 하는 학교 입장에서 조차도 상고나 공고, 아니면 인문계 고등학교의 진학지도를 할 뿐, 어느 누구도 예술 고등학교나 외국어 고등학교 처럼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고 민주는 아무 의미없이 학교와 집 만 오가는 생활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관심의 한 쪽으로 밀어 두었던 피아노에 대한 욕심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런 단순한 생활에 싫증을 느끼면서 였다.
멍해진 머리를 붙잡고 자율학습이라는 명목하에 저녁까지 학교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게 느껴질 그 즈음에 본격적인 진로 상담이 시작되었다.
하루에 다섯 명 씩 진학상담을 위해 교무실로 친구들이 불려 갔고, 상담을 마친 친구들이 교실에 들어 설때 마다 교실은 선생님과 무슨 얘기를 햇는지 그것을 궁금해 하는 대기자들로 인해 술렁거리기 일수였다.
민주도 상담 순서를 기다려 진학상담을 위해 교무실을 찾았던 그 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려면 실기 고사를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시험에 대한 어떤 내용도 알지 못하던 어린 나이에 접었던 피아노였기에 그저 학과 시험만 쳐서 합격을 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왜 학원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을까...
그런 내용을 모를 리 없는 원장 선생님이었을 텐데...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언니들이 많이 다니느 학원이어서 항상 시험에 대해서는 민감하셨던 선생님이셨는데...
민주는 상담이 있던 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도 내려 놓지 않고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짧은 신호음이 있었고 피아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진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민주는 아직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말씀을 아직 해주지 않으셨는가 보구나. 이제 피아노 그만 둔다고, 그저 취미로만 가르친 거라고 하시면서 네가 중학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네 책이랑 소지품을 다 갖고 가셨는데 ..'
취미라니...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치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달라고 했던건 그저 그걸 배우러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워서나 겉멋을 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어려서 민정이 먼저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는 민주에겐 동경의 대상 그 자체 였다.
어깨 너머로 배우는 실력이 정석으로 선생님께 배우는 민정보다 항상 앞서 갔던 것은 그저 남의 것에 대한 질투나 작은 호기심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었다.
적어도 민주에게 피아노는.. 호사를 누리기 위한 사치품이 아니라 억눌린 자신의 감정을 쏟아 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였는데..
그날 저녁 엄마는 계 모임이 있다며 늦게 돌아 오셨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민주는 줄 곧 같은 생각과 같은 말만 되뇌고 있었고, 해가 다 져서야 현관으로 들어서는 엄마에게 앞 뒤 부연설명없이 대뜸 화부터 내고 말았다.
"나 내일부터 피아노 다시 칠 꺼예요. 예술 고등학교 가려면 실기 시험을 따로 쳐야 한데요. 여태껏 몰랐잖아요. 오늘 학원에 전화했어요. 내일 부터 학원에 다시 갈래요."
한번도 그렇게 앞 뒤 가리지 않고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 그 날 민주의 행동에 엄마도 적잖게 놀라는 눈치였지만 딸을 가만히 잡아서 앞에 앉혀 놓았다.
엄마의 얼굴에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좋을지 난감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엄마를 마주보고 앉은 민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취미로 가르쳤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민주야, 엄마 말 잘 들어라... 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 여유가 있지 않단다. 아버지 혼자 벌어서는 너희들 셋 공부 시키는 것도 사실 힘이 드는 구나.
엄마가 집에서 부업을 한다고 해도 거기엔 한계가 있고..
너에게 말은 안 했지만 네 언니가 실업계 고등학교를 간 것도 다 집안 사정 생각하고 엄마 생각하느라 그런 거란다. 참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떡하겠니. 사실 네 아버지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민주 너는 피아노로 끝까지 공부를 시켜 주고 싶었는데 주위에 그 공부를 시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돈이 엄청나게 든다고 하더라. 그저 학원 비 정도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고 하는거야..
그래 너도 알고 있지? 너희 학원에 다니던 선경이라고...
시장에서 수예점하던 아주머니 딸 말이야. 그 애 피아노 공부 시키는데 고등학교 졸업 할 때 까지 든 돈이 집 한 채는 사고도 남는 돈이라고... 그렇게 들여도 대학교수 레슨 비는 따로 준비해야 하고 발표회 할 때는 그 준비 비용까지..
여하튼 그 아주머니가 그러던데 아예 끝까지 밀어 줄 능력이 없으면 그 정도에서 그만 두게 하는 게 더 나을 꺼라고...
선생님 께서는 네 실력이 아깝다고 하지만 어떻게 하겠니. 원장 선생님이 책임 지고 가르친다고 하시더라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는 돈이 더 많다고 하던데.."
민주는 마주 앉은 엄마가 하는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싫어. 나 피아노 할래. 엄마 나 피아노 할래. 돈 말고, 그런 이유 말고 다른 핑게를 대봐. 내가 피아노 실력이 떨어져서라거나 아니면 성적이 안 되서 라거나...
그래서 안 되는게 아니면 나 할래. 꼭 할꺼야.
대학교수 레슨 같은 거 안 받아도 잘 할 수 있어. 원장 선생님 한테 배우는 걸로도 잘 할 수 있다고,,,
내가 그 선경인가 뭔가 하는 언니, 대학 입시 곡 이라며 매일 연습하던 곡 나도 다 배웠어. 그 언니보다 내가 더 빨리 배웠다구. 쳐 볼까? 외워서 치라고 해도 지금 칠 수 있어.쳐 볼까?
오늘부터 매일 3시간씩 꼭 연습할께. 엄마 나 피아노 다시 하게 해줘요. 나더러 피아노 말고 뭐하라구.. 엄마 제발.. 제발.. "
미안해 하던 엄마의 얼굴도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할머니도 민주가 고집을 부리는 걸 지켜보고 계셨고 그 시선을 의식한 엄마는 더욱 완고한 태도가 되어서 민정에게 역정을 내었다.
엄마의 입장에선 피아노를 그만 두기에 충분한 이유가 민정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억지 밖에는 되지 않았다.
"얘가 왜 이렇게 말으 못 알아 듣지? 형편이 어렵다고 하잖아. 네 언니도 집안 사정 생각해서 실업계에 지원해서 갔다고 말하는데 못 들은 거야? 아니면 못들은 척 하는거야.
언니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언니라고 하지만 너 하고는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생각하는게 왜 그렇게 한참 어려. 이제껏 너만 피아노 가르친 것도 민정이 한테는 미안한 일인데 어떻게 너는 네 생각만 하니. 네가 계속 피아노를 한다고 하면 그 돈이 얼마나 드는지 민정이도 바보가 아닌 이상은 다 알게 될 텐데 ... 그럼 네 언니는 어떻게 하니. 그 만큼 양보해 줬으면 너도 양보를 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그렇게 앞 뒤 생각없이 고집을 피우니? "
엄마는 지금 언니가 피아노 배우는 걸 민주에게 양보를 해줬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능이라는 것이 양보를 한다고 같이 넘길 수 있는것이 아니지않은가.. 그리고 분명 먼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민정은 제발 그만 다니게 해달라며 엄마에게 애원을 했었다.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민주였다.
엄마가 자식들에게 부끄러워 하는 걸로 피아노를 계속 할 수 있다면 민주는 엄마를 계속 부끄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연령의 제한에 걸려 나중으로 미뤘던 수도권 콩쿨 대회를 나갈수 있을 때 까지만 이라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엄마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관 없다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 날 수 없다고 버티던 민주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다음날 터지고 말았다.
한번 금이 간 사람에 대한 믿음은 쉽게 회복 될 수 없다는 걸.. 상대를 얼마나 신의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배신감으로 느껴야 하는 그 파장 또한 얼마나 엄청난가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와 실갱이를 벌인 다음 날,
민주는 학교 보충수업도 빼먹은 채 피아노 학원의 원장 선생님을 찾아 갔었다. 어떻게 든 인정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기 위한 마지막 길이라고 믿으며 학원을 찾았었다. 선생님께서는 민주를 반색을 하고 맞아 주셨고 이번 실기 고사에 곡으로 지정된 곡 두곡도 모두 오래 전에 배우고 익혀 두었던 곡이라는 걸 알려 주셨다.
정작 실력이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걸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주는 홀가분했다.
적어도 한가지 고민은 줄었기 때문에...
만약 지금부터 새로운 곡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두 달이라는 기간은 무리수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학원을 찾아가는 내내 민주의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제 적어도 시험을 칠 때 까지는 엄마께 학원비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 자신이 원하던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만 하고 나면 그 때 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원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 탓인 민주가 집에 도착했을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집 안은 컴컴했지만 거실에 불이 켜져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불 꺼진 거실엔 민정과 민수. 그리고 평소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 관심을 갖지 않으시던 할머니까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는 안방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민주가 들어 서자 곱지 않은 시선이 어둠속에서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그래서 그게 내 탓이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민주를 쥐잡듯이 하니까 내가 더 감쌌던 것 뿐이라구요.. 그럼 그 어린걸 그냥 당하게 가만히 내버려 뒀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딸로 낳아 놨으니 다 내 죄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께서 민주에게 너무 냉랭하게 대하는데는 나도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구요. 어머니가 얼마나 차가운 분인지 당신이 알기나 해요?"
엄마의 울음섞인 목소리에 이어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뒤이어 비명처럼 터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묻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어버렸다.
"아니 그럼 피아노 가르친 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못마땅 했으면 애초에 말을 했었어야죠. 4년씩이나 어떻게 그 꼴을 보고 참고 있었어요?
그리고 민주가 대회 나가서 대상 받고 할때는 당신도 분명히 좋아 했었잖아요. 나보다 더 흥분을 하면서 학원에 갔는지 어땠는지 체크를 할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어떻게 사람이 말을 뒤엎을 수 있어요? 나도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키지도 않았다구요. 그리고 저렇게 말귀를 못알아 듣고 고집을 피울꺼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때 까지만 해도 민주는 엄마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서 아버지께 항의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알아 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끝에 터진 엄마의 말들을 민주는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했었다.
"지금 우리 형편에 무슨 피아노예요. 민정이가 왜 상고를 갔는지 당신이 모르고 하는 말이예요? 큰 애는 저렇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민주에게는 그렇게 후 할 수 있어요.
우리 형편에 이만큼 해줬으면 됐어요. 더 이상은 저도 더 가르칠 수 없어요. 계속 가르칠 생각이 있었으면 2년 전에 뭣 하러 중도하차 시켜요? 계속 시키지.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건데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군요. 그렇게 민주가 피아노를 그만 두는게 안타까우면 당신이 따로 밤 일을 하던지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생활비에서는 단 한 푼도 레슨비로 쓸 수 없으니 저에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듣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말들..
그래서 민주는 피아노를 포기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는 엄마를 위해서 ..
그 일이 있은 후 어쩌다 한번씩 엄마는 엄마가 좋아하던 곡을 쳐 달라고 민주에게 부탁을 했었지만 , 단 한번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충분히 엄마의 맘을 이해 한다고 자신을 타이르고 있었지만 아직 다 성장하지 않은 이성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닫혀진 뚜껑 사이로 쌓인 먼지가 흰 건반을 누렇게 변색 시키고, 민주의 손끝에서 맑은 소리를 내던 피아노가 조율을 하지 않아 음정이 엉망이 된 채로 동생의 컴퓨터를 장만하는데 뭉칫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중고상에 팔려 나가던 그 날 까지도... 웃는 얼굴로 모른 척 외면을 해 버렸다.
언제나 처럼 나쁜 일은 항상 한꺼번에 생긴다는 징크스는 깨지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고, 좋아하던 친구가 떠나갔고, 내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래가 사라졌다.
또 다시 꿈 속...
작은 빛을 발하는 실 타래가 암흑 속 에 덩그러니 떠있다.
여느 때처럼 그 끝을 잡고 손가락 끝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고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 감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실패에 감겨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다시 구르기 시작하는 실패...
절박한 상황이 진행 되고 있었지만 민주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다.
실패에 감겨 이제 곧 깔려 버릴것 같은 민주를
너무 무심한 얼굴로 쳐다 보는 엄마가 실패의 진행 방향에서 옆으로 비켜 서있다.
실패는 그대로 굴러 갈 것이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민주는 필시 그대로 사라질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민주가 그 친구를 기억함에 있어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태환을 알게 되면서 부터 였다.
그를 알기 전까지는 그저 친하게 지내며 맘이 잘 맞았던 남자 친구라던가, 끝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해서 안타까운 친구 정도였는데...
대학에 가기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이성의 기억이 그 친구 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친구의 이름 앞에 '첫사랑'이라는 낯 간지러운 단어를 붙이기엔
서로가 상대에게 가졌던 감정이 순수하던 시절에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동지애'가 더 강했던 탓에
누군가가 '너의 첫사랑은 누구냐?'라고 물어온다면 선뜻 그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입학하며 자신의 소심한 성격이 싫어서 셩격을 바꿀 생각으로 가입한 테니스 동아리에서 태환을 알게 된 후...
아니 정확히 그 사고가 있던 날 부터 경훈이는 민주의 첫사랑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태환의 판단 기준에 의거해서...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내가 참 많이 힘들다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떠나 버린 사람을 대신할 누군가가 있으면 그 사람을 잊기가 훨씬 쉬워진다고 하던데...
어때 누구라도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우리 후배 중에 누가 좋을까?"
태환은 술이 많이 취한 상태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한 지 이제 한 달 남짓 지났지만 나이가 네 살이나 많아서 그런지 민주로서는 대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선배 중에 한명이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있고 난 후 줄 곧 학과 공부가 끝나면 학교 뒷산 아래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 모여 훈련이 있었고,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동아리 후배를 가르치는 훈련이다 보니 한시간 남짓 훈련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지는 날이 많았다.
한참 배우는 재미에 빠져 코트에서는 늦게까지 남아 있는 날이 많았던 민주였지만 술좌석에는 참석을 하지 않기로 선배나 동기들간에 소문이 나 있었다.
대학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던 7월의 어느날, 유난히 더웠던 그날의 훈련을 마감하며 학교 밑에 있는 통닭집에서 시원하게 호프나 한잔 하자는 제의에 동아리사람들은 100%찬성을 하게되었고,
'오늘 만큼은 절대 중간에 도망 칠 생각 하지 마라'는 선배들의 으름장에 민주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은 맨정신으로 술에 만취한 일행을 따라 3차까지 가게되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태환은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태환 보다 아랫 기수지만 민주보다는 윗 기수인 선배들이 "선배 선배" 해가며 억지로 술잔의 술을 권하면 맥주로 겨우 두 세잔 정도 마시는게 고작이었고, 그런 태환의 행동은 그의 외모와 딱 맞아 떨어지면서 후배들 사이에선 꾀 깐깐한 선배로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태환은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많이 마신 술로 눈의 촛점까지 흐려져 있었는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맞은 편에 앉은 민주와 다른 한명의 여자 후배에게 벌써 한 시간째 군대 제대 후 한 달만에 자신을 떠나버린 여자에 대한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보름 전 쯤에 태환은 3일간 학교에도 코트장에도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선배의 성격에 강의를 빼먹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동아리 선후배들은 다들 태환의 종적을 궁금하게 여겼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
제대하고 복학 하기 전에 같이 공부하게 될 후배들에게 인사를 하겠다며 동아리 방에 들렀던 태환을 그 날 처음 보게 된 민주는 태환의 약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커플반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태환의 외모를 가지고 농담을 하며 손가락에 낀 반지가 결혼 반지고, 애들도 있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에 민주도 첫 대면에서 적어도 나이가 서른 살은 족히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술에 만취했던 그 날, 태환의 손가락엔 반지가 없었다.
그저 한참을 빛을 보지 못해 하얗게 반지선이 뚜렷이 구분 지어진 손가락만이 예전에 그 자리에 끼워져 있었을 반지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을뿐이다.
그 날,
말짱한 정신으로 3차 까지 따라 갔었던 것이 민주가 태환에게 잘못된 인상을 갖게 한 첫번째 실수였다.
아니 같이 술자리에 동참을 할 생각이었으면 만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위의 분위기에 맞춰 몇 잔 정도는 마셨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도 하고 있는 민주였다.
선배들이나 동기들은 코트장에서 보는 모습과 술좌석에서 보는 모습이 사뭇 달랐다.
간단하게 한 잔 하자는 술 좌석이었다면 몰랐겠지만 그 날은 전체적으로 술이 과하게 취한 상태였었다.
낯 설은 모습... 하지만 인간적인 모습들... 그리고 첫번째 실수..
"후배는 이름이 뭐지?"
한참을 자신의 얘기만 하던 태환이 그제서야 앞에 앉아있던 민주와 다른 후배를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이렇게 물어봤다.
"예. 김민줍니다."
"김민주"
"그럼 자네는.."
"예 저는 이현미 인데요.."
"이현미라.."
"이제껏 내 얘기만 해서 미안하구만. 후배들은 혹시 군대에 보낸 애인이 있는가?"
그게 어째서 궁금한지 민주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럼요, 요즘 애인 없는 애들이 어딨어요. 군인 애인 하나 없으면 바보지.."
라고 대답하던 현미 때문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앉아 있던 민주까지도 그 대답에 동의 한 것이 되어 군인 애인이 없으면 바보인 요즘 애들이 되어 도매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민주가 애인이 있건 없건 ... 거짓말을 했건 하지 않았건 ... 이미 태환은 기억을 하지 못할꺼라는 생각을 했다.
"아 그렇구만. 군인 애인을 두는게 요즘 유행인가? 대단들 하시네..
그럼 제대 할때 까지 잘 기다려 주는건 어떤가? 기다리는게 유행인가 아니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게 유행인가?"
이야기는 다시 태환 자신의 얘기로 돌아가 있었다.
'어지간히 힘이 드는가 보군..'
그 날 술자리가 끝이 날때까지 민주와 현미는 태환을 책임지라는 선배들의 강요에 못이겨 잠깐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대학가의 여름 방학은 두 달이 훨씬 넘는 긴 기간동안 계속 되었고, 여지껏 다니던 초, 중, 고등학교처럼 방학 과제물이라는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민주가 속해 있던 테니스 동아리에선 한 달 이라는 기간동안 매일 하계훈련이 있었다.
그늘 하나 찾을 수 없는 여름 한 낮을 테니스 코트장 위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고스란히 지내고 나면 어스름 지는 저녁 무렵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녹초가 되어버렸다.
민주가 살아가면서 가끔씩 생각해도 '참 젊고 예뻤다'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는 그런 시간이 지나 계절은 가을로 접어 들고 있었다...
취미와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
연습을 하면서 코트에서 흘린 땀방울 수 만큼이나 선, 후배와의 유대관계도 아주 친밀해져있었다...
신입생들에게 어렵기만하던 태환도 하계훈련 기간을 지나면서 대하기 편하고 레슨을 잘 해주시는 선배님 중의 한 명이 되어있었고, 처음 가졌던 술자리가 인연이 되어 태환도 민주에게는 다른 후배들 보다 조금 더 친절히 대해주었다.
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심어진 벗꽃들의 나뭇잎들이 하나 둘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는 동안 학교에선 중간고사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고.. 학과는 달랐지만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준다는 명분하에 태환과 민주는 같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날이 많아졌다.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이 생기면 어김없이 라켓을 들고 코트로 달려가던 두 사람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은 과 별로 조금씩 차이가 났었지만 그 해 가을에 있었던 중간고사 기간은 민주네 학과와 태환의 학과가 같은 일자로 진행이 되었었다.
'이틀만 더 버티면 끝이다. 조금만 힘내자..'
민주는 그 전날 낮에 엉망으로 망친 과목을 생각하고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제 남은 과목은 3과목 이었고 그나마 민주가 자신있어하는 화공분야 과목이었다.
평소엔 항상 텅 비었다가도 시험기간만 되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차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보다는 자신의 방에서 공부하는게 더 좋았던 민주였지만 새벽부터 아침잠을 설쳐가며 도서관 자리를 잡아 뒀다고 자랑스러워하던 태환의 성의를 무시할가 수 없었다.
밤새 차가워지는 방 안의 공기를 느끼며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을 걷고 일어나는게 쉽지가 않았지만 민주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제 이틀이다.'
엄마는 벌써 일어나 계셨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참 부지런하시다는 생각을 하며 민주는 욕실로 향했다.
엄마랑 이야기를 해본게 최근에 언제 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따뜻한 물을 틀어서 세면기에 받으며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에 물었다.
'따르릉 따르릉..'
'아침부터 왠 전화지?'
비누를 막 얼굴에 묻히려고 하는데 밖에서 민주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부터 울리던 전화는 뜻밖에도 유경이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