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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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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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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BY bebestar 2004-10-20

심야 지원을 하던 날..

민주는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잘랐다.

큰 애를 가지고 한 번, 개월수가 찰수록 무거워지는 몸을 어떻게 주체할 수 가 없었던 민주는 앞으로 몸을 숙여 긴 머리를 감는게 너무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그 간 한번도 자르지 않았던 긴 생머리를 짧게 잘랐고.. 그 일로 몇날 몇일을 태환의  짜증을 듣고 나서는 긴 머리가 아무리 덥고 성가셔도 한 번도 자른 적이 없었는데..

남자가 .. 아니  태환이 좋아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불편을 감수하며 길렀던 머리가 더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느끼던 그날, 민주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소한 일에 조차도 자신의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미용실을 찾아 귀가 훤히 들어날 만큼이나 짧은 커트를 쳐버렸다. 

그날 태환은 민주의 파격적인 변신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술이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제 저녁 자신의 행동도 그렇고,

'심야 지원을 하면 너랑은 끝이다.'라는 으름장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데 대해 내심 태환은 많이 놀라고 있었던 거였다.

이번 심야 직원의 교체의 사유가 직장에서는 없었어야 할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것이었기에 지원을 하는 사람들 또한 조심스러울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가장 가정적인 이유를 내 건 민주가 낙점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가림이 심한 민주로서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얼굴을 익히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가는 태환과의 감정의 골을 조금이라도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심야에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꼭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그리고..

 

심야 근무가 확정이 되고 난 후에도 태환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는 말을 수시로 했었지만 민주의 귀에는 더 이상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애들 방학도 다 되어가고, 언니도 산달이 가까워서 예전처럼 애들 보기가 쉽지 않다고해요.

어떻게 우리들 편하자고 언니네 사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어요.

그저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언니도 몸 풀고 나면 그때 다시 애들을 부탁하더라도 지금은 내가 애들을 봐야 할 것 같아요.

길어봐야 3개월이라던데.... 

그동안 애들 보느라 당신도 고생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신경 안써도 돼요.

내가 애들도 챙기고 집 안 일도 예전처럼 하고 할테니까..

석 달 정도 고생하고 나면 답이 좀 나오겠지. 지금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네.

애들도 그렇고 내 생활도 그렇고.. '

이런 말들로 태환을 생활의 잡다한 일에서 해방을 시켜주는 것과 그로인해 자신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되면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해서 태환의 마음을 돌려 놓는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생각만 했었다.

남들도 아니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같이 살아온 시간이 벌써 9년을 지나고 있었지만 남들은 부부생활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잠자리에서 불만이 쌓여가는 동안 더욱 부담스러워지는 아내라는 자리는 민주에게 큰 짐일수 밖에 없었다.

부부가 아니라 그저 아주 편한 친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이상적인 부부는 오래된 친구처럼 같이 있어서 편한 사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듯도 한데 그런 말들은 그저 현실을 배제한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민주는 생각이 많았다.

살아가는 중간에 "큰 사고" 나  "죽을 병"이 아니면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새어질때까지 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남편이다.

어떤 통기타 가수의 노래 가사처럼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날에도 옆에서 지켜봐주고 힘 없는 손을 잡아 주며  '안녕히 잘 가시게'라는 말을 해 줄 사람도 남편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라는 말들도 가슴으로는 천번 만번 공감을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면 민주로서도 30년 뒤의 모습까지 그렇게 고울 것이라고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두 살 터울이 나는  민주의 남동생은 '누나가 사는 모습을 보면 결혼이 하고 싶어진다'며 입버릇처럼 말을 하곤 했었다.

그저 타인에게 보여지는 모습이란..

시부모님께 잘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애기들은 아무 탈 없이 잘 키우고, 공부시키고..

원래의 성격도 밝은 편이었지만 그보다 결혼한 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엄마께 보여드리면  그로 인해 친정엄마가 속상해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생활을 하면서 어지간히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내색을 잘 하지 않았던 것이 동생의 눈에 그렇게 보여졌었던 거였다.

결국, 민주의 동생은  '성격도 밝고, 피아노도 누나 처럼 잘 쳤으면 좋겠다'는 말에 맞춰서 지금의 올케와 결혼을 하게되었다.

우연인지 아님 인연이 될려고 그랬던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민주의 올케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재원이었다.

동생의 기대에 부흥 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 예쁜 상냥한 며느리 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동생 내외를 보는 민주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둘의 사는 모습은 참 예뻤었다.

하지만 민주의 친정 아버지께서 혈압으로 쓰러지던 그 즈음에 동생의 회사가 서울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모셔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결국 부모님 곁에 남게된 민주와 민정이 아버지를 돌보게 되었는데, 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병간호야 친정 엄마가 다 하신다고 하지만 입원해 계시는 병원이 태환의 직장이었던 탓에 태환을 보는 민주의 마음은 단 하루도 편 할 날이 없었다.

"뻔히 아들 자식이 있는데 왜 서울에 안가십니까?

그렇다면 민석이가 만사 다 제쳐놓고 내려 와서 부모님 곁에 있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아무리 제 살기도 바쁘다지만 어떻게 몸도 성치 않은 부모님을 이렇게 방치해 둡니까?

저는 그저 사위일 뿐이지 자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식이 옆에 있어야 든든하지요. 사위는 말짱 필요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

장모님을 위한다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든든한 아들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태환의 말솜씨는 그런 그의 맘을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로 인한 오해가 생기는 날이 다반사였다.

어쩌다 술자리라도 갖는 날은 옆에서 아침 저녁으로 병실을 찾아가 문안을 드는 자신에 비해 부모님을 저렇게 방치해 두고 서울로 간 맏아들 민석이가 안주감이 되어 그 자리에서 만신창이가 될때까지 비난을 하는 것이었다..

같이 술을 시작해도 항상 먼저 취하고마는 태환이었다.

장인이 건겅 하실때는 자신의 맏아들 보다 더 믿고 의지하던 태환이라서 그런지 장인에 대한 태환의 감정또한 특별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불쌍한 장인 어른으로 시작된 태환의 넋두리는 민주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서울에 떨어져서 부모도 돌보지 않는 무신경한 처남에게로..결국엔 처갓집 가족 모두를 싸잡아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들로 내몰고  비난을 하는  태환의 이상한 논리에는 가족 모두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세상의 시계는 아무일도 없는 듯 무심히 흘러갔다.

11월부터 시작된 심야 근무로 태환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던 민주는 최근 들어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져 있었다.

밤 낮이 뒤바뀐 생활도 각오는 했으되 그리 쉽게 적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민주의 신경을 긁는데 한 몫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신변의 사소한 일 보다는 병원에 계시는 친정 아버지의 증세가 나빠질수록  태환의 히스테리 또한 그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복병이 나타난 형상이었다.

 

2년 전 여름.

휴가철이 되어서 언제나 처럼 언니네와 같이 휴가를 보낼 계획을 궁리를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을 선호하다 보니 자연히 의견은 수영장쪽으로 모이게 되었고,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 후 한번도 집을 벗어나는 휴가는 꿈도 못꾸던 민주였지만 그해 만큼은 태환의 동조의사에 힘입어 시간을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계획을 잡고 출발하기 하루 전 날 친정에 모여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해 뜨기가 바쁘게 집을 나섰지만 한참 휴가철 성수기에 들어있는 고속도로는 새벽부터 몸살을 앓고 있었다.

차에서 보낸 시간이 세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을 하게 되었고, 모두들 들뜬 마음에 수영복을 갈아 입고 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애들보다 어른들이 더 들떠있었던게 사실이었다.

그 동안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는 핑게로 휴가라는건 없었다.

태환이 받은 휴가 기간동안 집에서 죽치고 앉아 TV를 보거나, 기껏해야 동네 목욕탕에 애들을 데리고 가는게 다였으니까..

하지만 그 해에는 휴가때 조금 기분나게 놀아보자는 형부의 말에 태환이 먼저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는 통에 가족들이 적잖이 놀랐었다.

그리고 떠난 휴가.

하지만 수영장에 있는 내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셨던 아버지께는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여행이 되실꺼라는 걸 알지 못하고 계셨다.

마침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이 구내 매점이 있던 곳의 바로 옆이었다.

음식을 사려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보니 닭튀김을 만들면서 나는 기름냄새가 그늘을 만들기 위해 처 둔 천막 속에서 후끈한 열기와 합쳐져서 민주의 신경을 건들고 있었다.

민주의 아버지는 닭요리를 아주 좋아하셨다. 가끔씩 닭도리탕을 직접 요리하셔서는 자식들에게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하실 정도였으니까..

"민주야. 저 옆에 닭강정이 맛있겠네."

"네?"

"아니, 돈 가진거 있으면 저것 하나만 사오라고. 난 옷을 갈아 입느라 지갑을 사물함에 맡기고 와서 돈이 없어서 그런다."

"아빠 어떻게 하죠? 저도 사물함에 돈을 다 두고 왔는데..

아무도 짐을 지킬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다 두고 왔느데..

가서 돈 갖고 올까요?"

"아니다. 난 네가 돈이 있는 줄 알았지..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나중에 사물함에 갈 일 있으면 그때 사다오."

원래 차를 오래타면 심하게 멀미를 하는 민주였다.

그날도 더운 열기가 가득한 차에 세 시간씩 시달려 목적지에 도착을 했을때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땅이 울렁거릴 정도로 머리가 아팠고 속도 좋지 않았었다. 

때마침 옆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민주의 두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촌스런 멀미를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아버지께서 만류를 하셨어도 사물함에 갔다가 왔었을테지만 정신도 못차린채로 언니 손에 이끌려 갔었던 사물함까지의 길도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던 탓에 민주는 그냥 아버지의 부탁을 모른척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친정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버지의 병세보다도 어제 자신이 무시해버리고 잊고있었던 부탁이었다. 가슴에 와서 못으로 박혔다.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아무 경황이 없으면서도 눈물이 흘렀다. 제발 괜찮아야 될텐데..

이제부터라도  아버지께 잘 하겠노라고 마음먹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셨는데... 나쁜 딸년..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민주가 그 친구를 알게 된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민주가 중학생이던 그때 당시만해도 중학교가 남녀공학인 곳은 한 도시에 두 세곳 정도밖엔 없었다.

민주가 다니던 학교도 민주 학년이 첫 입학생이 되는 신축 학교 였던 탓에 학교에 발령을 받는 선생님들도 모두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분들이 대다수였다.

한참 마을 자체가 개발의 붐을 타고 있던 때이기도 했지만 공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태로 입학을 하게 된 학교는 규모도 아주 작고 어수선한 분위기 였다.

초등학교..

겨우 어린이티를 벗고 중학교라고 입학을 했지만 작은 키 때문에 민주의 자리는 항상 앞자리를 지정석으로 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 할 즈음 민주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치던 피아노를 쉬게 되었다.

엄마가 내세우던 표면적인 이유야 학업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특별히 성적이 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이유를 내거는 엄마에게 굳이 반항하지 않았던건 그 당시에 조금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학교 개교 기념일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날, 엄마가 울면서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내용을 민주가 우연찮게 엿듣게 되었다.

얼핏 들은 얘기로 회사에서 노조일을 맡아 보시던 아버지께서 사고로 죽은 동료의 가족을 돌봐 주다가 그쪽 미망인과 눈이 맞았다는 얘기 였다.

연민의 정..

'그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겠거니.. 했었는데 그게 아닌가봐...'

엄마가 울고 있었다. 절대 울지 않기를 바라던 엄마가 아버지로 인해서 ..

그 뒤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지만 집안 공기가 흘러 가는 양상을 봐서는 분명 그 일이 끝이 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 또한 엄마의 편은 아니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식인 아들이 분명 잘못했다고 느끼셨겠지만

"남자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집에서 그러면 남자가 밖에가서 큰 일 못하는 법이니까 조용히 있어라.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어있다. "

민주는 그런 할머니가 미웠다. 같은 여자이면서, 어른이면서 한번도 엄마를 다독여주지 않는 할머니가 너무 미웠다. 그리고 민주의 그 미움은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에게로 뻗어갔다.

아무것도 확실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지만 엄마에게 했을 부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가 싫었다. 집에와서 큰 소리 한번 내지 않던 분이었다. 다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민주의  눈에는 그저 약속하나 못 지키는 못난 졸장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즈음..

그렇게 마음이 복잡한 엄마에게 계속 피아노를 치겠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엄마가 좀 괜찮아 지면 그때 다시 치면 되지 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을 했었다.

중학교를 입학 하던 그 해, 학교에서는 반 대항 합창 대회가 있었다.

학교의 규모도 작고 학생수도 8학급. 32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다 보니 얼굴만 보면 이름까지는 몰라도 저 친구가 몇반인지 알 수 있었다.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었다. 이제 겨우 학교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는데 그런 행사가 있었고 민주는 자기 반의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다.

하루는 연습이 있는 날이라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음악실로 갔었다.

악보를 들고 막 음악실로 들어서려는 순간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분명 우리반이 처음 이라고 했는데..'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음악실 안을 들여다 보았다.

학교내에서도 가장 햇살이 바로 드는 교실이 음악실이었고, 학교 공부가 막 끝난 그 시간은 하루중에서도 햇볕이 가장 따사로운 시간이었다.

음악실은 큰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인해 눈이 부셨다. 조금 열려있는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새하얀 커텐이 바람에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다.

음악실의 구석에 피아노가 한대 놓여 있었고, 그곳에 앉아 누군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귀에 익은 선율..

윤곽만 있으되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민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동공이 차츰 빛에 익숙해 지면서 사람의 모습도 조금씩 뚜렸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 친구의 얼굴이, 평온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것이 늘어난 필름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아노의 선율은 계속 같은 곳만 반복해서 들리고, 바람결에 나부끼던 커텐도, 이리저리 흩날리던 창 밖의 벗꽃도 모두 모두 늘어지기 시작했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뒤에서 누군가 툭 치며 이름을 불렀다.

친구 수진이였다.

"너 뭐해. 안들어 가고.. 반주 연습한다고 먼저 가더니. 왜 문이 잠겼어?"

하며 수진이가 음악실 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이제껏 튀는 판처럼 같은 곳만 들리던 피아노 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 경훈이네.. 너희반은 네가 맡은거야? 역시.."

수진이가 아는 채를 했다.

'경훈이라..'

그 날 이후로 민주는 경훈을 지켜보게 되었다.

학교 선도부를 하던 친구라 굳이 찾아 다니지 않아도 항상 눈에 띄는 곳에 그 친구가 있었지만 한번도 직접적으로 부딪히거나 말을 건 적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된 그 친구에 대한 관심은 2학년때 같은 반이 되면서 우연찮은 일로 서로 말다툼을 하게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오히려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2학년이 되어서 새로 반 편성이 있던날..

민주는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모두 흩어져 다른반이 되어버렸다.

서운한 마음도 잠시.. 새로 배정받은 반으로 이동을 하는데 배정받은 반의 복도에 서있는 그 친구가 눈에 띄었다.

'설마..'

그렇지만 같은반이었다. 민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같은 반이라..

그 친구는 키가 커서 맨 뒷 자리에 앉았다. 키가 작아서 항상 앞자리만 차지하는 민주에게는 그 친구의 큰 키가 부럽기만 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민주의 제일 친한 친구 유경이가 경훈이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하기까지는 민주가 자신과 같은 반이라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1학년때부터 경훈이를 좋아했었다. 이제야 그 기회가 온것 같다.'

며 두툼한 편지봉투를 같은 반이라는 이유만으로 민주에게 안겨주며 경훈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유경의 청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게 화근이 되어

'너 다시는 이런 심부름 하지 마라'며 건넨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도로 민정에게 되돌려 주던 그 친구의 냉냉한 모습을 보고는 철 없는 마음에 그 친구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었다.

친구인 유경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민주는 1년간 같은 반에서 임원생활을 하며 방과후에도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았었고, 협력해서 해결해가는 일들이 하나 둘 쌓여 갈수록 그 친구에 대한 민주의 감정도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 이틀 뒤가 경훈이의 생일이었다.

민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선물은 싫었다. 흔한 초콜렛은 더욱...

그래서 민주가 가장 아끼는 시집을 선물로 주었다. 여러 신인들의 대표작품들만 실려있던 시집이었는데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읽고 너무 좋아서 항상 품에 품고 다녔던 시집을..

그리고 3월.. 사탕을 받았다.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는 사탕이었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준 선물이라는것 만큼 큰 의미는 없었기에 다른 친한 남자 친구들에게서 온 사탕은 여자친구들과 다 나눠먹었어도 그 사탕은 하나도 먹지 않고 민주의 책상 서랍속에 넣어 두었었다.

그때 즈음에도 아버지의 그 일은 결말이 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엄마가 오해를 하셨거나 아니면 정말 아버지가 바람이 나셨다는 두가지 결론 밖엔 없었는데도 어느것 하나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없이 그런 감정 싸움을 벌써 2년째 해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민주의 가슴에는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엄마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그녀의 건강하지 못한 집착이 원인이 되어 그런 감정은 끝을 모르고 악화되어 갔다.   

남자들.. 그 이중적인 얼굴.. 세상의 남자는 내 아버지 조차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만..

타인들이 보기엔 더 없는 호인노릇을 하면서 어떻게 가족들은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어릴적 민주를 덥쳐왔던 그 인간도 분명 남자였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때는 세상에서 둘 도 없이 착한 얼굴을 하고 있던..

왜... 무엇때문에...라는 질문을 수백번도 더 했지만 결론은 하나..

남자니까.. 였다.

하지만 민주의 그렇게 어지럽던 생각의 끝에 서 있던 그 친구는 명확했다.

처음과 끝이 같았고 그것이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그런것이건 아니면 단순히 일이 그렇게 될려고 민주에게 보여졌던 모습이 그런것이건 상관없었다.

그저 거짓이 없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주위의 다른 것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으니까..  그래서 경훈이는 민주에게 주위의 친구들이 말하는 남자 친구 정도가 아니었다.

경훈이가 민주에게 갖는 감정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한번도 좋아 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민주에게 있어서 그 친구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믿을수 있는 큰 산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분별력 없는 아버지보다도 그 친구의 존재를 더 믿는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그랬는데..

여름이 다가오는 교정은 푸른잎이 무성한 벗꽃나무에 붙은 매미의 울음소리에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하루의 수업이 끝나고 민주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방과후 청소를 하고있었다. 학교 뒷뜰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고 교실로 돌아오면서 운동장쪽으로 난 창으로 농구를 하고 있는 경훈이를 확인하고는 씩 웃으며 교실로 돌아왔다.

뒷문으로 민정이 막 들어서려고 할 때 2학년 여학생 세 명이 교실로 들어서며 아주 도도한 태도로 민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반에 김민주라는 언니가 있다는데 혹시 누군가요?"

그중에 제일 힘이 없어 보이는 여학생이 막 교실에 들어서는 민주를 불러 세워 물어보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이름표를 내려 보던 민주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똑바로 쳐다 봤다.

"뭐야, 아무것도 아니네. 키도 이렇게 작아'

도대체 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지..

그런 알수 없는 말만 남기고 2학년 여학생은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 듣게된 유경이의 말에 민주는 앞뒤 가리지 않고 경훈에게 절교선언을 하고 말았는데..

'민주야. 선도부내에서 경훈이를 찍은 여자애들이 여자친구를 보고왔는데 별것 아니더라고 그러면서 막 웃더라는거야. 경훈이도 같이 .. '

상대를 믿는다고 했으면 더 확실히 믿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던 나이였다.

믿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한번은 직접 확인을 했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던 나이였다.

분별이 없던 나이였고,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나이였고, 상처받는걸 두려워하던 나이였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애초에 없었던건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동네 삼촌, 아빠, 그리고 경훈이..

그저 나도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그래서 편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경훈이는 더 이상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절교 편지를 써 보내던 날.. 여우비가 내려 점퍼를 벗어 겨우 비를 피하며 하교를 하던 민주를 교문 밖 저쪽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있던 그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잘가라는 인사 한마디.. 악수 한 번 하지 못한채로 그 친구는 전학을 가 버렸다.

그 날 이후로  

그 친구가 없는 민주의 학창시절은 하얀 백지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