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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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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근무


BY bebestar 2004-10-09

심야 지원자를 받는다는 공고는 벌써 일주일째 사무실 벽에 붙어 있었다.

민주는 하루가 다르게 힘들어하는 언니의 일과, 그런 언니와 같이 지내야 하는 수아와 수민이의 하루 일과가 맘에 걸렸지만 선뜻 지원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회사내의 그런 불미스런일로 인원을 교체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태환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러지 않아도 유통업쪽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하는 태환의 생각에 기름을 부어주는 꼴이 되어버리는게 싫어서 이렇다 할 구실을 찾을때 까지 좀 더 지켜 보기로 마음만 다잡고 있던 차였다.

추석연휴가 다가 오면서 매장은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고, 넘쳐나는 인파로 인해 출근을 해서 일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숨이 턱까지 차오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하루 하루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오늘 해야 할 일이 끝나고 나면 서로 수고했다며 다독여주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민주는 항상 웃는 얼굴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끔씩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수단으로 업무가 끝 난 후 시원한 맥주도 한 잔씩 하러 직원들과 호프집을 가는 날이 있었는데 항상 자리만 차지 하고 앉았을 뿐 맥주 한 잔을 제대로 비우지 않는 민주를 보며 동료들은

'언니는 무슨 재미로 살우?'

하며 묻는 날이 많았다.

술이라는거.. 기분이 딱 좋아 질 만큼만 마신다면이야 문제 될 것도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술만 한 잔 마시면 말투부터 꼬이고, 끝내는 크게든 작게든 언쟁이 되어서 서로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태환의 술버릇때문에 민주는 더욱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기에도 세상은 충분히 어지러운데..

한 쪽 눈만 뜨고 살아가도 될 정도로 민주가 지나온 시간이 호락호락한 것이었다면 그녀도 어느정도 적당히 술에 취해서 취기를 즐기며 살아 갈 수도 있었겠지만 어느 것 하나 맘 편히 기댈 곳 없었던 시간들로 인해,  벽에 조차도 기대 편하게 쉬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은 언제나 뻐근한 통증을 어깨에 더해 주고 있었다.

추석 연휴가 하루 이틀 다가올 수록 근무를 연장 하는 시간도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으로 급격히 늘어나 있었고, 벌써 5일째 거의 매장에서 하루를 보내다 시피 하는 날이 지속 되던 어느날 연장근무에대한 얘기를 미리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민주는 태환과 심하게 다투게 되었고 그일이 있은 직 후 심야근무를 지원하게 되었다.

시간이 갈 수록 자신이 해야 할 집안일이며 애들을 돌보는 일이 늘어난다는것에 강한 불만을 보이던 태환에게서 추석을 이틀 앞 둔 날 퇴근을 서두르는 민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이미 많이 마신 술의 기운이 느껴졌고, 지금 민정의 집에서 형부랑 술을 마시고 있으니 거기로 와서 애들을 데려가라는 내용이었다..

거의 녹초가 되어 지친 걸음으로 민정의 집에 들어서는 민주를 보며 태환은  눈이 반쯤 풀어진 상태로 그녀를 흘끔거리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돈버느라 매일 늦게 다니는 대단한 사람 들어오네.. 아이고 안녕하신가요?

얼굴 뵙기가 대통령보다 더 힘듭니다. 에~"

태환은 술에 취한 몸을 가누질 못해 휘청거렸다.

"술을 많이 마셨네.. "

민주는 그렇게 얘기하고는 눈으로 애들을 찾았다.

수아와 수민이는 언니네의 큰 방에 펴져있는 이불위에 조카 대훈이랑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낮에 밖에서 놀고 집에 들어와서 씻지를 않은 건지 수아와  수민이의 얼굴이며 손.. 옷이 모조리 거무죽죽한 얼룩으로 뒤덮혀있었다.

그렇게 잠든 두 아이의 얼굴은.. 말갛게 씻고 깨끗한 잠옷 차림으로 잠들어 있는 조카의 얼굴과 상반된 그림을 그리며 민주의 가슴에서 홧덩이를 끄집어 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꺼면 애들을 집에 재워놓고 나오지.

이렇게 자다가 깨면 애들도 고생이잖아. 밖에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려고 .."

민주는 자신의 지친 몸도 몸이지만 애들의 구질 구질한 모양새에 더 맥이 빠지며 화가 났다.

부엌쪽에서 태환이 의자를 끌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주는 그쪽으로 쳐다 보지 않고 계속 얘기 했다.

"애들 얼굴이 너무 더럽다. 좀 씻기지 그랬어. 이렇게 더럽게 하고 있으면 감기에 걸려서 얼마나 고생하는데.. "

"그렇게 맘이 안좋으면 니가 씻기면 되잖아. 이젠 넌 하나도 신경안쓰고 나보고 다 하라는 거야? 그래?"

민주는 태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할 수 있다면 태환의 손에 애들을 맡겨 두지도 않을꺼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 저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그였다.

"난 애들이 집에 오기 전에 출근을 하잖아. 아침에야 씻겨서 학교며 학원을 보내지만, 저녁에는 깨어있는 애들을 볼 수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야. "

민주는 더 이상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이미 태환은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다.

마감근무가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태환의 불만들은 이런 술 자리에서 어김없이 화살이 되어 민주에게로 그 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말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한치의 기다림도 없이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그 화살을 피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날도 이틀 앞으로 다가온 추석으로 인해 매장은 아주 혼잡했었다.. 그로인해 5시간 연장을 포함한 근무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한 시간이 더 연장이 되어있던 상태라 원래 마감시간인 12시 30분 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겨우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시간까지 자기가 술을 마시고 있으니 일이 끝나는 대로 애들을 데리러 오라는 전화를 했다는 것부터가 '내가 너에게 불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태환의 무언의 시위라는 걸 민주가 눈치 챘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눈치가 빠른 민주라고해도 벌써 일주일째 하루 4시간도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일을 하다보니 태환에 대한 감각도 다소 무뎌져있던 상태였고, 눈치를 챘다고 하더라도 그날은 그저 집에 빨리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민정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고했다'는 말은 커녕 술에 취해 풀어진 눈으로 빈정거리기가 바쁜 태환을 보는게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었고, 그러지 않아도 저녁밥이며 학교 과제물을 봐 줄 시간이 없어 애들에게 항상 미안한 맘만 갖고있는 민주인데 ..

그날은 맑은 정신도 아니고 술에 취해서까지도 시누이의 예를 들어가며 민주를 몰아붙이는 태환에게 울컥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거봐. 내가 본가에 들어가서 살자고 했지. 네가 싫다며..

엄마가 애들도 다 봐주고 할텐데 니가 들어가기 싫다며. 덕분에 태희가 호성이를 엄마한테 맡겨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잘 살잖아. 우리가 들어갔으면 우리 엄마가 같이 맞벌이 하겠다는데 모르는 척 했을것 같으냐?

그리고 전기세며 수도세 같은것도 엄마가 다 같이 내어 주실꺼고, 저녁도 엄마가 다 해주실꺼고, 애들도 할머니가 집에 계시니까 니가 오늘처럼 연장을 하든 마감을 하든 애들 신경안쓰고 일 할 수 있으니까 너도 좋을꺼고, 나도 애들 때문에 병원에 모임이 있으도 잘 참석하지 못하는 그런 일도 없을테고..

참 머리가 나쁘면 잔머리라도 굴릴줄 알아야지,.

태희는 봐라. 여우같이 자기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잖아. 애기를 낳아도 제 손으로 기저귀 한번 안갈고 키우잖아. 너처럼 장모한테 애들 한번 맡기는 것도 미안해서 제대로 못하고 그러지 않잖아. 아니 처형도 마찬가지지.. 형님이랑 장사한다고 할때 창호를 장모님이 키워 주지 않았었냐?

부모님 맘은 다 그런거야. 자식이 먹고 살겠다는데 어느 부모님이 안도와 주시겠냐?

너는 애가 그래서 안되는거야. 무슨 융통성이 있어야지 .

이득이 되는 쪽으로는 그렇게 계산이 늦어서야 어떻게 돈 모으고 살겠냐고.."

언제 부턴가 태환은 부모님 댁에 들어가자고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게 주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맞벌이를 하는데 있어서 자녀양육이나 시덥잖은 집안일로 부터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기위해서 ..

하지만 젊어서 하시던 공장에서 폐병이 생겨 지금껏 병원과 집만 오가시는 아버님때문에 그 병원비며 생활비를 자식에게 손내밀기 싫으시다며 힘든 내색 한번 안하시고 억척스레 점치는 일을 하시던 어머님께 아가씨가 이제 겨우 눈만 뜬 신생아를 맡기고 일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는 힘이 많이 부친다는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젊은 나이에 아기를 낳아도 하루 종일 애들의 수발을 들다보면 밤엔 누가 엎어가도 모를 만큼 힘드는 일이 갓난애기를 보는 일이다.

하루종일 집 청소도 제대로 못하게 울며 보채는 애들은 육체적인 피로 뿐만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쌓이게 만들어 사람의 성격까지 변하게 만들정도 인데, 오죽하면 노인들에게 애기를 보겠느냐, 힘든 농사일을 하겠느냐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농사를 하겠다고 한다는 우스겟소리가 나왔을까?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계시던 어머니의 얼굴에서 편안함이 사라진 것이 아마 호성이를 어머니께서 맡아서 키우기 시작하면서 부터 였던것같다.

그런데 태환은 그런 어머님의 속 사정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이제 자신의 애들까지 어머니에게 봐달라고 할 생각인게다.

홀애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

민주는 어머님께 자신의 애들을 부탁하는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식이 부탁을 하면 분명 거절을 못하실꺼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당장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민주 입장을 그랬다.

"난 엄마처럼 절대 그렇게는 안 살아. 뭐야. 남편에게 대우도 못받고 고생만 하고.. 이제부터라도 인생을 즐기며 살아요. 자식들이 다 컸는데 아직도 뒷바라지 하느라 허리도 한번 못 펴고 뭐하는 거야. "

어려서 부터 어머니의 하시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시누이가 하는 말이었다.

몇 년 전 가업으로 물려받은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이어받아서 공장을 경영하던 작은 아주버님네가 거의 길거리로 내 쫒겼던 적이 있었다.

벌써부터 사양길을 걷고 있던 공장에 미련은 못 버렸던게 그런 끝을 보게 만든거였다.

마침 민주와 태환이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않아 생긴 일이라 방 한칸을 완전히 비워 작은 형님네 식구들이 같이 와서 4개월정도를 생활했었다.

새롭게 시작할 일을 물색한 끝에 자본을 적게 들여서 시작할 수 있는 길거리 포장마차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작은 형님네의 8살, 5살 짜리 두 조카는 어머니댁으로 와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에 세번 씩 .. 다른 집들은 일년에 한번 김장을 할때나 담을만한 50포기의 김치를 담아내는 일 또한 어머니의 몫으로 맡겨지게 되었는데 옆에서 김치를 담을때 마다 큰형님과 민주가 가서 도와 드린다고 하더라도 다듬고, 절이고, 씻어내고 하는 그 일이라는 건 환갑을 넘긴 어머니께서 하시기엔 한겨울의 추위에도 등짝에 땀이 날 만큼 힘든 것이었다.

그렇게 자식들의 일에 치여 허리 한 번 펴질 못하고 지내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강변하던 시누이가 자신의 애기까지 어머니에게 갖다 안길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민주는 상상도 못했었다.

갓난애기는 힘들어서 못 봐준다며 민주에게 '네가 나중에 태희가 애를 낳으면 맡아서 키워주면 안되겠느냐'고 물으시는 어머님의 말씀 끝에 

"작은 오빠는 애들도 둘이나 봐주고, 한달에 한 번 50포기씩 김치도 담아주면서 내가 애를 낳으면 왜 못봐 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용돈을 드린다고 하잖아요. 오빠는 공짜로도 다 해주면서 나는 왜 안해주겠다는 건데.. 엄마 정말 너무 한거 아니예요? 나도 내가 하고 싶은일이 있는데 애 때문에 못해서 되겠냐고.. 가만히 누워 있는 애, 우유주고 기저귀만 갈아주면 되는데.. 그러면 내가 용돈도 많이 드릴텐데  왜 안해주겠다는 거냐구."

하며 발끈 화를 내는 시누이였다.

자기의 사정에 따라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태환과 참 많이 닮았다는 걸.. 그래서 남매구나 하는 생각까지 민주는 생각이 복잡했다.

만약에 호성이를 자신이 돌보게 된다면 수민이와 수아는 분명 뒷전으로 밀려나야 할테고..

어쩌다 작은 상처라도 하나 생기게 되면 애를 어떻게 봤냐는 그 원망을 태환과 태희 둘에게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답답했다.

한 명도 모자라 둘에게 당해도 좋을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민주에겐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산후 조리 내내 간곡히 부탁하는 태희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해 버렸다.

애초에 기쁜 마음으로 해 줄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것만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슨일이건 어머니께서 부탁을 하면 거절을 하는 법이 없었던 며느리가 가장 고된일을 거절해버린 까닭에 그 일을 고스란히 떠맡게되면서 저렇게 힘들어 하시고 계시는 어머니께, 민주가 좀 편하게 사회생활을 하기위해 자신의 애들까지 봐 달라고 말한다는건 세상이 다 뒤집어진다고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태환은 다시 그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난 민주가 첨엔 천사인줄 알았어요. 깜빡 속았지만..

부모님도 모시고 살 수 있다고 그러고 내 말도 참 잘 듣고해서 진짜 천사인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아니야.. 완전 저 밖에 몰라요. 부모님도 안 모시고 살고 나 한테 과거도 숨기고.. "]

"과거라니.. 처제는 동생말고는 남자 없었는데.."

과거..

무슨 과거를 얘기 하는 걸까..

그 기억?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겼던 그 일을 그가 지금 취중에 민정과 형부앞에서 말하려고 하는 거였다.

분명 민주에 대한 태환의 불만 중 80%는 그 일이 원인이 되어서 시작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저렇게 취중에 아무에게나 말해버려도 좋을 만큼 민주는 덤덤해지지 못했었기에 그것 만은 막아야 했었다.

"그만해요. 술이 많이 됐네. 무슨 소릴 하려고 그러는 거야.

벌써 새벽 2신에 언제가서 자고 출근할래요. 그만 마시고 올라가요.

이리로 와서 수아 엎는 거나 좀 도와주라. 무거워서 혼자는 못 엎겠네."

그말에 민정이 방으로 들어와서는 수아를 등에 엎혀 주었다. 태환도 방에 들어와서 서 있었지만 자신의 몸도 못가눌 만큼 마신 술로 인해 비틀 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다들 고생이잖아. 애들은 애들대로. 나는 나대로.."

"뭐야?"

태환이 갑자기 언성을 높여서 고함을 질렀다.

"니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지금이 몇신데 이제 들어와? 또 걸어왔냐? 내가 애들 데리러 오라고 전화까지 했는데 일부러 더 늦게 온거지?"

그제서야 민주는 근무시간이 한 시간 연장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게 태환을 화나게 했다는 걸 알게되었다.

먼저 말하지 않은 잘못은 있었지만 그날은 민주도 태환의 그런 심정을 헤어려 주기엔 너무 피곤에 지쳐 있었던 탓에 불쑥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만 좀 해요. 지금 이시간까지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고, 애들이 이렇게 거지꼴을 하고 있는것도 그렇고 너무 싫다. 나도 지금껏 일하고 왔잖아. 불편한 한복입고 사람들한테 치어서 정말 피곤하다고.. 나도 하루 쯤 쉬고 싶은데 하루 13시간씩 근무해도 사람이 모자라서 근무를 못 빼준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 당신이 나 좀 이해해 주면 안되겠어? 나도 힘들다고.."

"그래 힘들다면서 맨날 그렇게 웃고 들어오냐?

오늘도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들어왔잖아..

넌 놀러 다니는 거야. 사람들 보고 하니까 재밌는거지. 애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집안 살림이야 어떻게 된든 말든.. "

태환이 이제서야 말 상대가 된다는 것처럼 민주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민주가 맞벌이를 하기 전, 태환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서며 웃는 얼굴을 보이는 적이 한번도 없었다. 밖에서 별 일이 있었건 없었건 현관을 열고 들어설 때면 얼굴이 항상 굳어서는 밝은 얼굴로 반겨주는 애들에게 까지 냉냉하게 대하는 그 모습이 너무 싫었던 민주는 만약에 자기가 일을 다니게 된다면 밖에서 무슨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 설때 만큼은 웃는 얼굴로 들어서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했을 뿐인데 태환의 눈에 민주의 모습이 그렇게 비칠꺼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아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태환의 말처럼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면 그건 적어도 비난 받아야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태환은 그것 조차도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 이유도 한 가지 원인에서 시작됐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민주는 등에 엎었던 수아가 자꾸 미끄러지는 걸 느끼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아무 답도 없는 그런 말장난으로 시간을 지체하기엔 12시간을 꼬박 서서 일했던 다리도 너무 아팠고 수아를 엎고 있는 팔에 힘도 없었던 탓에 그냥 태환의 말에 수긍을 했다.

"그래 나 하나도 안힘들어. 놀러 다니는 거 맞아.. 이제 됐죠? 그만하고 집에 올라가자.."

그때 였다.

순간 태환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거였다.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들였다고 생각을 한건지 옆으로 맥없이 넘어지는 수아로 인해  몸의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 휘청거리던 민정을 사정없이 밀어 버린 거였다. 

"어머-"

어정쩡한 자세로 뒷 걸음질 치던 민정의 발에 수민이의 팔이 느꺼지면서 밟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발을 더 뒤로 빼려고 하다가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바람에 수아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며 놀라서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민정도 뒤로 넘어지며 화장대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일..

고의로 한 일은 아니었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수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멍한 상태로 민주는 몸을 일으켰다.

무방비상태로 넘어져서 심하게 머리를 부딪혔지만 그때는 아프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한 발자욱 떨어진 곳에 수아가 민정에게 안겨 울고 있었다.

민주는 멍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수아가 바닥에 떨어지며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저 자기 몸만 겨우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때 태환이 한번 더 민주를 힘껏 밀었다. 다시 맥없이 넘어지며 머리가 화장대에 부딪히고..

민정이 옆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수아와 민정의 목소리가 뒤섞여 민주는 더욱 정신이 없었다.

그제서야 민주의 형부가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다시 민정을 밀어붙이는 태환을 저지시켰다.

그러고도 한참을 민주에게 퍼부어대던 태환을 끌고 대문 밖으로 형부가 사라지기까지 민정은 멍하게 땅만 보고 앉아있었다.

태환이 집 밖으로 나가자 민정이 그제서야 수아를 안은채로 민주에게 다가왔다.

괜찮은 거야? 재부가 왜 저러니? 평소에도 술 마시면 저렇게 해?

민주는 고개만 저었다. 아무리 화가 나거나 싸우는 일이 있어도 민주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결혼 직 후 태환은 작은 아주버님의 권유로 아마추어 야구클럽에 가입을 했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마다 시댁에 민주를 데려다 놓고는 시댁에 머무는 이틀 동안 클럽일로 술자리를 가지네, 게임을 하네, 연습을 하네하며 단 한시간도 같이 있어주지 않았었다.

벌써 결혼을 하고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야 태환이 시댁에 같이 있건 없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처음 시집을 가서 분위기 파악도 잘 안되는 시댁에.. 그것도 어머님의 손님들로 항상 북적대는 그런 곳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던져 두듯 데려다 놓고선

"여기 있으면서 부모님이랑 친하게 지내야 된다. 엄마 일도 좀 도와드리고 아버님 심부름도 좀 해라. 조카들도 여기 같이 있으니까 좀 봐주고..이렇게 익혀 둬야 나중에 서로 편하지 .."

하면서 태환은 휑하니 나가 버리는 거였다.

그렇게 두어달이 지나면서 평일에는 집들이를 하느라.. 주말에는 아직 서먹한 시댁에서 집안일을 하느라 몸살이 난 어느 주말..

그날도 태환은 시댁에 민주만 데려다 놓고는 저녁 모임이 있다고 아주버님을 따라 나가버렸다. 저녁을 먹고 9시 뉴스를 보고 심야의 영화가 끝이난 시간이 되었는데도 태환은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다음날 새벽 6시가 넘어서야 술이 적당히 취한 채로 집으로 들어서는 거였다. 

몸살기운이 있어 저녁에 들어올때 약 좀 사다 달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것 조차도 까맣게 잊고는 민주옆에 와서 턱 하니 누워 코를 고는 거였다.

그리고 오전 9시경에 일어나서는 중요한 시합이 있다며 다시 집을 나서는 태환에게

'오늘은 좀 일찍 들어와요. 몸이  좀 안좋아요.'라고 부탁을 했었는데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또 술이 한잔 되어서는 아주버님과 함께 들어서는 거였다.

몸이 아프다는 걸 떠나서 민주는 그런 태환의 무신경이 너무 서운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자 태환이 집에 들어서며 민주에게 왜그러냐고 다그치며 물었고..

"그렇게 선배 혼자 볼 일 보러 다닐꺼면 나는 왜 데리고 가요. 집에 놔뒀으면 쉬기라도 하지..

어머님은 손님들 보느라 정신없으셔서 집안 일은 하지도 못하시고, 아가씨는 집에 있어도 자기 공부한다며 방에 들어 앉아서 차려주는 밥만 먹을려고 들지, 잘때 말고는 항상 집에 내려와있는 작은 형님네 애들까지 같이 볼려면 나는 잠깐도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요.

다른 날 이라면 몰라도 오늘은 내가 몸살끼가 있다고 그랫었잖아요. "

"뭐야. 지금 그것때문에 한마디도 안하고 온거야?

우리 엄마는 집에서 그 일하시면서도 애들보고 살림하고 아버지 수발도 다 하는데 뭐가 힘들다고 엄살이야. 그리고 서방님이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좀 하겠다는데 여자가 어디서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건강이 안좋아지면 니가 책임 질꺼야? 니가 돈 벌어 올래?

이 가정의 주인은 나라고.. 니가 아니고 .. 주인이 잘 되야지 무슨 말이 많아?

그리고 너 나중에 같이 모시고 산다며.. 그정도 일도 못하면서 무슨 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거야? 나한테 거짓말 한거야?  우리 엄마가 그런일 한다고 우습게 보는 거야?

난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엄마 그런일 한다고 깔보는 인간들 절대 용서 못해. 절대로.."

분명 그런뜻으로 한 말이 아니였는데 이상한 쪽으로 말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하다는 걸..

'오빠 애인, 우리 엄마가 저런일 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헤어졌어요. 참 나쁜 년이지..

혼자서 오빠 면회까지 몇번씩 가고, 우리집에 와서 놀기도 하고 했으면서 어째 인간이 그럴 수 있는지.. 민주씨 궁금한 거 있으면 내가 다 말해 줄께. 나한테 물어봐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했던 상태에서 사고는 터졌었다.

그 이후로 줄곧 태환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고 있었던 민주에게 들려주던 시누이의 얘기는 약 보다는 독이 되는 말이 더 많았지만 어느것 하나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기에 민주는 태환에게 투정이나 화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은 민주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화가났다.

"지금 어머니 얘기를 하는게 아니잖아요. 아직은 낯서니까 선배가 같이 있어달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힘드는 일은 아니잖아요.."

퍽!!

어느틈엔가 태환은 손목에 있던 예물 시계를 풀어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유리가 깨지며  사방으로 튀었고 민주를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름 물건도 아니고 결혼 선물로 해준 예물시계를 ..

다음 날, 민주에게 있었던 몸살기운이 수민이의 임신에서 기인한 것인줄 알고는 태환이 손이 발이 되도록 잘못을 빌었고 그날 이후로는 물건 하나도 던지거나 하는 법이 없었던 태환이었는데 오늘은 민주에게 손을 대었다. 그냥 홧김에 밀어 버리는 게 아니었다는 걸 민주는 느낄 수 있었다.  

5년 전 그 일이 있고난 후..

민주가 태환과 대화 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그 순간 부터 태환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애써 서로 모른척 하고 있었던 것일수도..

 

다음날 민주는 사무실에 가서 벽에 붙어있는 심야직원 모집공고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는 핑게는 " 방학이 다가오는 아이들 때문" 이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태환과의 관계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돌려 보자는데 있었다.

서로 같은 잠자리에 누울 일이 없으면 그로 인해 다투고, 실갱이을 벌이는 일이 줄어들꺼라는 생각에 ..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민주의 거부에 의해서가 아닌 심야근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서 서로 감정만 상하는 그런 일들이 현저히 줄어들테고, 기본적인 욕구가 막히면서 생긴 모든 일상에 대한 불만들이 조금은 사라질꺼라는..

민주는 한 달이건 두 달이건 자신이 다가 설 수 있으때까지 기다려 달라던 자신의 말을

"무슨 쉰소리냐. 넌 1년,아니 10년을 가만히 놔둬도 내 옆에 안 올 여자다."

라며 빈정거리던 태환에게 강제적으로라도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 없다면...

적어도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자신에게도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