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민이 엄마.. 그런일이 있었는지 몰랐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던거야? 어쩐지 좀 전에 전화 받을때 목소리가 별로 안좋은것 같더라."
민주는 아직 머리가 빙빙돌았지만 그녀들의 안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요. 그정도야 뭐 .. 애들 아빠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까.. 만약에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죠."
"그래 맞아 수민이 아빠가 그런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수민이 엄마를 볶아 대는거겠지. 알면 그렇게 하겠어?"
"그런데 문제는요. 그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일은 계속 모를꺼라는 거예요. 내가 말하지 않을테니까.. 중요한건 수민이 아빠도 내가 계속 싫다고만 하는걸 어떻게 이해해 줄지 ..걱정스럽네요."
조금전 집을 나올때 태환의 일그러진 얼굴이 기억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 다가오고있었고 그 기억이 민주를 걱정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말해버려. 까짓거. 그 일이 수민엄마 잘못은 아니잖아. 그건 어쩔수 없이 생긴 일이라고..
혼자 그렇게 끙끙 앓지 말고 이야기를 해. 어떻게 보면 수민엄마도 평생을 그일때문에 맘 고생하며 사는 피해자라고.. 말 못할게 뭐가 있어.."
술이라는 것..
아무리 많이 마셔서 판단능력이 흐려졌다고 해도..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셔서 천하가 발아래로 보일만큼 대담해 졌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는건 잊지말아야 했었다.
이해를 바라고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의외로 주위의 반응이 따뜻한것에 민주는 놀랐다.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해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번도 그 얘기를 태환에게 해야 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건 "여자는 .."으로 시작하는 그의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최 첨단 문명의 혜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누리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고 방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갖는 그것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던 탓에, 민주가 겪은 그 일을 얘기 한다는건 상상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
그가 이해를 해 줄 수도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술이라는 것.. 취한다는 것..
민주는 술을 더 마셨다. 아직 술이 다 깬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이 얘기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니 술이 확 깨버리는 것 같아서 자꾸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절대 온전한 정신으로는 그를 보며 말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꼭 그 말을 해야겠다면 술의 힘이라도 좀 빌려야 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을뿐..
한잔.. 두잔.. 세잔..
시간이 지나 식탁에 빈 맥주병이 늘어갈수록 민주는 취했고 주위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조금씩 술이 깨고 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그만 마셔. 이러다 일 나겠네.."
보다 못한 슬기 엄마가 재동을 하고 나섰다. 민주는 손에 있던 술잔을 놓고 일어섰다.
어지러웠지만 중심을 잡아야 할 시간..
이제 가서 그에게 말해야지. 내가 왜 당신에게 그렇게 매달렸는지..
5년을 같이 살아도 도저히 모르겠다던 내 머릿속 생각을 그가 알 수 있게 내가 말로 다 설명 해 줘야지..
그러면 그 사람도 나를 이해해 주겠지..
만약에 내가 운다면 .. 이제라도 내게 미안했다고 한마디만 해 준다면..
까짓거 다 용서해준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는 민주를 보고 친구들이 따라나왔지만 한사코 괜찮다는 말로 그들의 부축을 거절했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혼자였지만 이제 더 이상은 혼자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될꺼라는 기대가 그녀의 걸음에 속도를 더해주고 있었다.
싸늘한 밤 공기에 정신이 조금씩 드는걸 느끼며 집으로 들어섰다.
한시간만에 오겠다고 나갔었는데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엇다.
불은 모두 꺼져 깜깜했지만 열려있는 방문으로 TV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직 태환은 자지 않고 있었다.
대문 소리를 듣고도 말 한마디가 없다는 건 '화났다'는 그의 무언의 시위 였고, 다른 날 같으면 가슴부터 답답했을 민주였지만 오늘은 씩 웃음이 났다.
최대한 똑바른 걸음으로 걸어서 열려 있는 큰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 꺼져있던 방의 스위치를 올렸다.
'또깍'
잠시후 방이 밝아졌고 그때까지 모른 척 TV만 쳐다 보던 태환이 신경질 적으로 고개를 돌려 민주를 노려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뭐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여자가 밤 늦게 집을 나가질 않나, 한 시간만 있다가 온다더니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여기까지 말하던 태환은 말을 멈췄다.
큰 방의 문에 기대어 서있는 민주의 모습이 뭔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뭐야.지금 .. 너 술 마신거야? 그래?
이제 너 완전히 미쳤구나. 새벽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술까지 퍼마신 거야?
얼마나 마셨으면 제대로 섰지도 못해?
여자들끼리 있다고 하더니 다들 미쳤구나. 제정신들이 아니야.
남편들은 나가서 돈 버느라 저렇게 고생들을 하는데 집에서 돈도 안버는 여편네들이 하는일 없이 모여서 술이나 퍼마시고..
참 말세다. 말세야. "
태환의 감정은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은 시한 폭탄같다.
계속 가만히 있는다면 민주는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쓰러질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으려드는 태환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듣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깨질듯 마신 술이 다 깨기 전에,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을꺼라는 자신감이 알코올과 함께 다 사라지기 전에 그에게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자기야. 잠깐만..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건 내가 잘못했는데 오늘 할 말이 있거든 ..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좀 들어줄래요?"
"뭐. 무슨 할말이 있다는 거야?
너 술 주정하냐?"
"아니 .. 술 주정이 아니라 내가 왜 자기한테 매일 싫다고 하는지 .. 아니 자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게 왜 싫은지.. 얘기 해 줄께."
"그렇게 술이 되서 무슨얘기를 한다는 거야?
나중에 깨고 나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기억도 못할꺼면서 집어쳐. 할꺼면 내일 술 깨고 하던가.."
"아니.. 오늘 꼭 해야 되는데.. 나 말짱해..머리가 좀 아픈것 빼고는 .. 정신은 말짱한데..
...
동네 아줌마들이 나 보고 접촉기피증 환자래.. 재밌지..그러면서 당신이 나 데리고 산다고 고생많다고 나보고 좀 잘하라면서 막 그러더라.
사실은 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볼까하고 심각하게 생각도 했었어.
사람들이 너무 싫으니까.. 옆에 오는 것도 싫고, 살이 닿는 것도 싫고.. 무슨 정신병이 아닐까 생각했었다고..
결혼을 안했다면 혼자 살 면 되는데 당신이랑 결혼을 했잖아. 그리고 애들이 있으니까 그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럴려면 평생 부부관계를 해야 되는데 그게 그렇게 싫으니까 당신이나 나나 너무 괴로운거야.
그래서 .. 그래서.. 내가 갖고있는 문제가 뭔지 병원에가서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아볼까 생각도 했었거든..
그런데 오늘 자기가 내 얘기만 다 들어 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질 것 같아...
내가 노력해볼께. 사람들도 좋아하고 당신하고 관계도 음... 내가 힘껏 노력을 해보지..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내가 참 바보같다."
그리고 잠깐 할머니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그 차가운 미소가.. 하지만 이젠 말 할 수 있었다. 그때 말하지 못했던 걸..그래서 생긴 맘에 병을 그가 알아 줄 꺼라고 기대하며 민주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일을 덤덤하게 털어놨다.
그리고
"그 일 이후였던것 같아. 사람들이 옆에 오는게 무섭고 싫었어. 그게 친구든 어른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어. 그냥 싫었으니까..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완전히 그 때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나봐.
사실.. 사실은...
당신도 많이 미웠었다.
내가 이런일이 있었다는거..그래서 사람에대해, 특히 남자들에 대해 공포를 갖고 있었다는거 물론 당신도 몰랐을테지만 그 날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 그렇게 하지말라고 했는데 ..
당신도 내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좋은 관계를 유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많이 했었어.
이유야 어떻든 결국 이렇게 나랑 결혼 해 줬으니까..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 때 당신이 했던 말은 아직도 용서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자기도 왜 내게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
거짓말이라도 사랑해서라든가 좋아해서라고 말을 해줬더라면
나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텐데 말이야.
나도 왜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당신이 너무했다.
아무리 자기 마음을 이해 할려고 해도 잘 안돼.
왜 자기 맘도 잘 모르면서 내게 그랬느냐고..
그 사람이 너무 보고싶어서 그래서 아무나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면
그 사람이 꼭 내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다면 ..조금더 성적으로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있는 사람이 그때 당신 옆에 있었더라면..하고 가끔 실없는 생각도 했었는데..그랬다면
그런 사고가 있었다고 해서 당신의 발목을 잡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민주는 그때까지 아무말도 않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태환이 고마웠다.
이미 지나간 일로 그가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조금은 걱정 되었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말을해서 풀기로 했다면 나중에 화근이 될만한 불씨도 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민주는 그 일이 있은 후 줄곧 그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그 얘기를 꺼냈다.
눈을 보고 말 할 자신이 없어서 바닥만 쳐다 보고 얘기를 하고 있었던 터라 민주는 태환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얼굴을 하고 듣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싫다는 얘기를 하는거야?
내가 옆에 가는게 벌레보다 싫어서 그렇게 매일 사람만 가면 놀라는 거냐고..
너 정신병 맞네. 니가 무슨 천사쯤 된다고 착각을 하는가 본데 ..
니가 그렇게 깨끗하냐? 살면서 한번도 그런일이 없었다는 거야 뭐야.
그거 정신병이다. 그것도 심각한거야.. 병원에 가지 왜 안갔어.
여덟 살이면 뭣도 모르는 나이구만 무슨 기억이 생생하다는 거야.
그때 일 때문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싫었으면 결혼은 왜 못해서 안달이었냐?
애는 어떻게 둘씩이나 낳고..
술은 뭣때문에 그렇게 많이 마신거며 술을 마셨으면 곱게 와서 잠이나 잘 일이지
뭐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거야?"
민주는 고개를 들었다. 태환의 얼굴은 비웃음과 경멸로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 다 잊은것 처럼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그 일을 이제와서 얘기하는 민주가 아무래도 술 주정을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민주는 술이 확 깨었다. 이상하다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자기가 무슨말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크게 실수 한 건 없었다. 그저 그동안 한번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속내를 말로 풀어 내었을 뿐인데 태환의 반응은 그녀를 너무 당황스럽게 했다.
'... 나 ..내가 언제 천사라고 했어?
그리고 니가 그렇게 깨끗하냐니?
그건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더럽다는 거야? 왜? 그일 때문에?
그 일? 그래? 지금 내게 그말이 하고 싶은거야?
그날 그 인간이 날 막더듬었던것 말고는 아무일도 없었어.
그저 그런 느낌들이 너무 싫어서 .. 싫었는데 힘이 없어서 당한게 그게 더럽다는 거야?
그일 이후로 사람들이 싫었다구.. 옆에 오는 것도 싫고, 닿는 것도 싫고..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돼?
누구라도 내 옆에 오는게 싫었다구..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어.
당신도 예외가 아니었다구..
당신이 나랑 무슨 사이였었지?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결혼을 약속했어도 내가 싫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런데 당신이랑 나랑 무슨 사이였었지?
동아리 선후배 말고..나랑 무슨 상관이 있었냐고..
당신은 그날 술도 안마셨었어. 그냥 술이라도 많이 마셔서 정신이라도 못 차릴 정도였다면 나도 이렇게 힘들진 않다고...
술때문에 그랬을 꺼라고 적어도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을테니까 ..
그런데 그 말짱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내가 왜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정확히 내게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지?
그 짓이 하고 싶었다면 좀 더 맘이 맞는 사람을 찾았어야지.
입 속이 다터지고, 팔목에 가슴에 멍이 들도록 싫다는 사람을 힘으로 재지해서 당신 기분을 풀었다면 적어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는 했었어야지.
내가 어떤 맘으로 당신을 보고 살겠어. 내가 다 잊고 사는 것 처럼 행동해도 언젠가는 당신이 먼저 말을 꺼내서 미안했었다고 말해줄꺼라고 믿었는데..
내가 정신병자야? 미쳤다고?'
목까지 차고 오르는 그 말은 단 한마디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러내렸다.
시야갸 흐려지고 다시 왼쪽 가슴이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왔다.
민주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우는 자신의 모습을, 저게 그런 일이 있어서 예민하구나 하는 눈으로 보는게 너무 싫었다. 그의 시선만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상관없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나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처음 태어나서도 잘 울지 않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니가 딸이라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걸 알았는지 하루종일 잘 울지도 않았어..'
20년전 그 일이 있었던 그 다음날도 민주는 많이 아팠지만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조그만게 꾀만 늘어서 학교 가기 싫으니까 아프다는 핑게를 하는거다'라며 마침 집에 놀러오셨던 할머니 동네 친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돌아 누워서 베갯잇이 다 젖도록 소리 죽여 울었었다.
'혹시 애기가 생기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하지마라.'
그 일이 있은 후 결혼을 하기 전까지 관계를 하고 난 다음엔 항상 그가 하던 말이었다.
'임신 중절'에 필요한 돈도 자신이 준비할 꺼고. 같이 병원에 갈 사람이 없으면 자기 형수에게 얘기 할테니까 같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라는 말..
결혼 전이든 이후든 한번도 낙태를 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아직 생기지도 않은 생명이라지만 '중절'이라는 말을 저렇게 쉽게 내뱉으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민주 자신도 칼로 애기를 도려내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으로 부터 잘라낼 수 있을꺼라는 불안감..
하지만 민주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었다.
순결 이라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것..하지만 민주에게는 전부일 수밖에 없었던 그것..
비록 원해서 주었던 건 아니지만 이미 그가 그걸 가졌으니 자신도 그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다른 어떤 길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모든걸 맞추었다. 태환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었고, 무슨 말이든 '싫다'거나 '안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모든것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
한 번 터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앉아서 모아쥔 그녀의 무릎이 다 젖고 볼을 타고 내린 눈물로 소매가 다 젖어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
여태껏 그렇게 살면서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
그녀를 이해해 주는 이도 없었지만 이렇게 궁지로 몰던 사람도 없었다.
단지 누구든 대화 할 상대가 없다는 것만 참으면 그런대로 지낼만 한 생활이엇는데..
그가 떠날꺼라는 불안한 마음을 접고 결혼을 했지만 결혼후에도 단 한번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생활.
이제는 정말 잘 할 수 있을꺼라는 기대가 무너졌고, 든든한 울타리도 무너졌다.
죽는다면 편해질까..
생각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눈이 부어 제대로 뜰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무엇이든 찾기 위해 눈을 떴다. 끈이든 칼이든..
그때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야 문열어. 너 안에서 뭐하냐?"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태환도 못내 불안한 눈치였다.
한번도 그렇게 소리내어 우는 것을 본적이 없었던 탓에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쾅쾅쾅. 야 문열라니까 . 민주야..쾅쾅쾅"
민주는 더 빠르게 눈을 돌렸다. 어떻게 된게 아무것도 없다. 문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았다.
'나는 다 용서하고 살았는데.. 할머니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당신도 미안하다 그랬으면 용서 해줄 수 있었는데.. 왜 나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거지..'
그때 였다. 꽉 막고 있는 고막으로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아야...
민주는 반사적으로 불을 켜고 시계를 봤다. 수아가 새벽에 우유를 먹을 시간이었다.
민주는 아무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 밖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서 있던 태환을 밀치고 부엌에서 우유를 따뜻하게 타서 큰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일어나도 겨우 낑낑거리기만 하던 수아가 배가 고프다며 울고 있었다. 자기의 의사표현을 엄마에게 울음으로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민주는 퉁퉁부은 눈으로 수아를 안아서 젖병을 물렸다.
작고 귀여운 눈으로 민주를 보고 방긋이 웃어주는 수아.
민주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수아를 보고 방긋이 웃었다.
'그래 사랑하는 수아가 있었구나.
엄마가 널 잊고 있었어. 용서해라..'
우유 한 통을 다 먹은 수아는 어느새 새근 새근 잠으로 빠져 들었다.
많이 마신 술과 너무 오래동안 울었던 탓에 민주도 수아 옆에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어두운 꿈 속.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아무도 없다.
실패도 없다.
민주만 그 속에 서있다.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다.
꿈속에서도 민주의 눈은 부어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굴까..
조금씩 사람이 다가온다. 한걸음 .. 두걸음..
그 걸음이 얼마나 큰지 두어 걸음 땠을 뿐인데 벌써 닿을 듯 바로 앞에서 뒤 돌아 서있다.
참 하게 쪽진머리, 자그마한 체형.
할머니..
민주가 불렀다..
천천히 그 사람이 돌아 선다.
천천히..
할머니였다.
생전의 모습은 그대로 인데 얼굴엔 너무 따뜻한 미소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판다.
꿈에 나타나실 꺼면 생전의 모습처럼 차가운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
그래야 그때 왜 그렇게 자기에게 모질게 대했느냐고 울고 소리라도 지를텐데 ..
지금의 할머니 모습은 민주가 단 한마디도 원망의 말을 할 수 없게 너무도 따뜻한 모습이다..
임종하시기 몇일 전 잡아보았던 할머니 손이 너무 앙상하게 말라서
'할머니 좀 잘 드세요. 손이 뼈밖에 안남았잖아.'며 말하던 민주를 보고 웃던 그 모습이다.
민주도 가슴이 아프다.
할머니 말하지 말걸 그랬죠? 할머니가 가르쳐 준대로 입 닫고 살껄 ..
내가 잘못한거지? 그래서 혼낼려고 이렇게 온거지?
올꺼면 어제 저녁에 오지.. 하루만 일찍 오지..
또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프고 목이 아프다.
민주는 이미 잠이 깼지만 불꺼진 방 구석에 앉아 울음이 멈출때까지 한참을 울고 있다.
그리고 ..
다시는 울지 않을꺼야.. 그게 누가 되었든 절대 사람때문엔 울지 않을꺼야..
맘 속에 날을 새운 칼을 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벌써 5년이 지났다.
그동안 아이들이 자라고, IMF를 지나면서 태환의 성화도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지만 민주는 고집을 꺽지 않았고 그로인한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골이 패여가고 있었다.
그저 애써 외면만 하면 아무일 없을것처럼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벌써 5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그 문제가 고개를 들고 악의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그날 태환은 민주를 곱게 재워주지 않을 눈치다. 민주도 그걸 잘 알지만.. 예전처럼 자신이 먼저 숙이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하기가 싫었다.
5년전 그 일이 있은 후 태환은 가끔씩 민주의 얘기를 꺼내 되씹곤 했었다.
"이젠 완전히 내놓고 싫다고 그러는구나. 그래 너도 돈을 번다 이거지? 그래서 내가 우습냐?
니가 벌면 얼마나 버는데.. 겨우 백만원도 안되는 월급이나 받고 다니면서 생색은 한 기백씩 버는 사람처럼 낸다니까.."
"내가 무슨 생색을 냈다는 거야. 그저 좀 피곤하다고 했을 뿐인데."
"그래.. 그러니까 80만원도 안되는 월급받느라 피곤하시니까 한 이백쯤 벌면 사람을 완전 X취급 할꺼 아니냐고.. 너보다 능력있는 여자들도 너처럼 그렇게 튕기지는 않겠다.
아니지 내가 돈을 몇 백씩 갖다 주면 아마 좋아서 네가 같이 자자고 하지 않겠냐?
내가 갖다 주는 돈이 적다는 소리 아냐."
민주는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 입을 닫아 버렸다.
이쯤이 되면 항상 태환이 빈정대며 하는 말..
'넌 돈 주면 잘 할꺼다. 어릴때 기억이니 뭐니 해가며 사람 약올리지 말고 아예 돈을 많이 벌어오라고 해라. 너 돈 좋아하잖아..'
태환의 말은 녹음기에서 나오는 말처럼 똑같다.
어조도.. 어순도.. 어필하는 내용까지..
아무리 듣기 싫다고,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인정할때까지 집요한 성격.. 더 이상 그의 말에 대꾸도 부정도 하기 싫어서 민주는 입을 닫아버렸다.
"어.. 말이 없는 거 보니까 맞구나. 내가 돈을 못벌어서 싫다 이거네. 그럼 어디 나가서 돈 잘버는 사내 놈 한번 데려 와봐라. 네 능력껏 데려와봐."
민주는 한숨만 나왔다.
어쩌면 태환이 저렇게 오해를 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건 민주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더이상 변명을 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항상 혼자 벌면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였기에 사회에 나가 사람과 섞이는 것이 죽기 보다 싫었던 민주는 그의 월급날 만큼을 그를 위해서 거부를 하지않기로 마음 먹었었다.
적어도 월급을 받는 날 만큼은 그도 대접을 받기를 원했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야만 하다못해 몇 일이라도 그의 의도 섞인 농담에서 편히 지낼수 있었기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태환은 민주의 그런 행동을 돈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오해를 한다고 해도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태환은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계속 빈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