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래도 수영 배우겠다고 들러붙는 널 내치지는 않았다.
- 공현 -
한참을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공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훗! 천하의 채공현도 어쩔수 없구나~ 여자하고 헤어졌다고 한숨까지..그러게 복을 왜 걷어차는거냐?"
장준길...어째 옆에서 조용히 술친구가 되어주나 싶었다.
다시 한모금 술을 들이키자 꽤 이겨봐왔던 술에 점점 몸이 무거워지려고 했다.
" 일어나자.."
" 뭐? 난 이제 시작인데..??"
준길은 아랑곳없이 일어서는 공현을 따라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 그럼 2차가자..2차"
" 지금도 과했어"
" 너 그러는거 아니다..나같은 놈 불러냈으면 근사하게 한턱 쏘며 신세 한탄 해야지..내가 어떤 인력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 미친놈..근사하긴.."
" 야! 가끔 너같은 놈도 제대로 된 실연도 하고 그래야 나같은 놈도 세상의 공평함을 인정하고 살지"
"........."
" 정말 2차 안가? 그럼 우리집 가자."
" 거길 왜가?"
" 우리집이 뭐하는 집인지는 잊어버리지 않았냐? 난 술마시자 불러내길래 잊은줄 알았더니..쳇!"
궁시렁 거리는 준길의 집은 사실 근처의 삽겹살 집이다.
혼자서 아들 키우시며 고기냄새에 절어 사시는 어머니 얘기에 눈시울 붉어지는 효자 녀석,
술약속이 생기면 어김없이 친구들을 이끌로 집으로 가서 어머니한테 어울리지 않는 애교도 부리는 넉살좋은 녀석이 준길이다.
뭐 가끔 들러 인사드리고 고기좀 얻어먹고..넉살로 치자면 공현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오늘처럼 온전히 술생각만 나는 날은 피하고 싶었다.
" 야! 오늘같은 날이 또 언제 와? 안그래도 곧 기말 시험이고 그럼 우린 공부하느라 죽어날텐데.."
" 알았어. 2차 가면 되잖아. 가자 2차. 자식 더럽게 말많네."
자연스레 공현의 어깨를 감싸며 준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 공현은 빈 강의실에서 밝아오는 새벽을 향해 낮게 부르던 겸이의 노래가 생각났다.
'그날 이후로 난 늘 미안하게 지내요. 단 하루라도 난 그댈 잊을까 걱정하면서 그대 없이 숨을 쉬는게 미안해 한숨이 느는지 그날이후로 늘 이렇죠~~~'
" 무튼, 오빠랑 잘해봐~ 홍홍홍"
" 글쎄, 관심없는데.."
" 이번엔 네 맘처럼 잘 안될걸? 울 오빠 집념이 대단한 사람인데 너한테 필 꽂혔으니 아마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것이야."
후~ 은정이에게 다시는 그런 자리 만들지 말라고 몇번이고 다짐을 받았지만 계속 그 사촌이란 사람과 연결지으려 해서 걱정이다.
다만, 겸이나 그 사람이나 바쁜 사람들이길 기대할밖에...
은정이와의 긴~ 통화이후, 축 늘어져 있던 겸이는 슬그머니 오빠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 오빠~"
방문을 열어보니 침대에 누워 잠든 오빠가 보였다.
책이라도 읽다가 잠든 모양인듯 옆에 떨어뜨린 책 한권이 뒹굴고 있었다.
하긴, 오늘처럼 집안일에 아까운 노동력을 쏟아부었으니...
책을 정리하고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서던 겸이는 오빠 책상위의 액자에 잠시 눈길을 두었다.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의 사진..
거기엔 너무나도 앳된 중학생 시절의 오빠와 마냥 웃음이 개구지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자애로운 미소와 행복해보이는 분위기...
책상위로 손을 뻗어 액자를 덮어두고는 방을 나왔다.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억하고 버거운 자신을 깨닫는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오늘같은 날은 술이라도 한잔 해야 할듯 싶었다.
이미 오래전에 잊고 싶어도, 지우고 싶어도 술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걸 깨달았지만 그래도 나오는 한숨을 막아버리려면 쉬지 않고 밀어넣어야 할듯 싶다.
어차피 겸이에겐 밤은 길고 긴 시간이니까...
벌써 여러개 맥주캔이 비워지고 겸이는 갈수록 또렷해지는 정신을 TV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헉! 그 놈이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별 생각없이 받은 전화에 겸이는 순간 당황했다.
자자~~ 릴렉스..침착하자...
숨을 고르며 계속 전화기를 들고있었지만 상대방은 여전한 침묵속에 일관중이시다.
" 저..."
"......."
" 누구 찾으시나요?"
"......."
"......."
"......."
"......."
이씨! 끊지도 않고 지금 뭐하는 짓이야?
겸이는 슬슬 화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었으면 뭔 말이 있어야 할것 아냐?
이거 정말 변태아냐?
" 당신 변태야?"
"......."
" 우리집에 무서운 남자 있는데 바꿀까? 그럼 다신 이런 짓 안할래? 엉?"
"......."
뭐야..이거...
" 끊는다. 다시 전화하면 경찰에 신고할거야."
뚝!
원래 겁이 많지도 않고 여학생들이 한번쯤 만나봤다는 바바리 맨을 봐도 별 반응이 없는 겸이었다. 단지, 열을 좀 받았을 뿐...
남은 맥주를 벌컥이며 별 미친놈이 다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아씨~ 이거 정말..
" 여보세요!"
"........"
" 아..정말...이봐요..아저씨! 나 애 셋 딸린 아줌마야. 아줌마~ 뭐 이런다고 겁먹는 아가씨가 아니라고. 좋게 말할때 다신 이런짓 하지마쇼.알았엉?"
뚝!
술을 들이부어도 술기운이 오르지 않아 그렇잖아도 열받는데..왜 이런전화가...
랄랄라~ 랄랄라~ 어라? 휴대폰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아까 그 번호다. 이번엔...죽었어....
" 야!!!!!!!!!"
아주 시원하게 소리를 질러주었으니 놈도 찔끔 했겠지...음하하하...
" ....왜?"
엉? 상대방이 대답을 한다???
오히려 깜짝 놀란 겸이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
" 왜 불러놓고 말이없어?"
".....누구야?"
" 이제야 내가 아는 사람같네.."
" 너..나 알아?"
" 그러니까 전화했지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하는 미친놈도 있냐?"
엉...여기 미친놈 있거덩?
" 말섞기 전에 누군지 좀 밝히지?"
" 벌써 내목소리도 잊었냐? 섭하네~"
도대체 누군지..술기운에 더욱 재빠르게 회전하는 겸이의 머리로도 도통 누군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미안...누군지 정말 모르겠다. 아님, 거기가 잘못 전화 걸었을지도 모르고..."
" 00 의과대학 1학년 황겸. 아니라구?"
" ........도대체 누구야? 너 내 스토커야?"
" 하하하하."
갑자기 정말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헉..큭..큭..미안, 미안..난 네가 그렇게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녀석인지 몰랐어.큭..큭!"
간신히 웃음을 참아가며 말하는 녀석...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말투인듯도 하고...
" 난 그렇게 재미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상황을 즐길 만큼 여유있는 사람도 아니고..그래. 날 알고 있다니 하는 말인데..왜 전화했어?"
" 좀 보자."
" 네가 누군데 보자 말자 하는데?"
" 거참 까칠하네..난 그래도 수영 배우겠다고 들러붙는 널 내치지는 않았다."
수영? 배워? 그럼...혹시...
" 채..공..현? 너 채공현이야?"
" 낼 아침 강의실로 와~ 빚진 커피 갚는다."
뚝!
뭐? 뭐야..이게..
갑자기 끊어진 휴대폰을 쥐고 한참을 멍~하게 있던 겸이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녀석의 갑작스런 전화도 이상했지만 왜 만나자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알수 없었다.
거기다 제법 머리가 회전한다 싶으니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녀석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왜 만나자는 거야? 그럼, 저번에 그 전화도 녀석이 걸었던 거야? 왜 처음부터 자기라고 밝히지 않은건데? 빚진 커피? 그건 또 뭐야? 아이씨~ 뭐가 어떻다는 거야?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며 아무것도 이해할수 없는 상황이 되버린 겸이는 밤새 맥주캔을 옆에 끼고 여러가지 추측을 해봤지만 결론을 얻을수 없었다.
그래...만나서 얘길 들으면 되지..아~ 머리 복잡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를 혹사시킨 탓인지, 맥주를 오랜만에 많이 마신탓인지..겸이는 스스르 잠이 들었다. 오랫만에 잠속으로 빠져들면서도 채공현에 대한 궁금증이 현실로의 끈을 붙잡았다.
근데...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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