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일어나기 힘들었다.
어젯밤 무리하게 술을 마신 탓이다.
나의 출근기념과 함께 [쿡앤라이프]의 회식이 이루어졌고 난 간만에
느껴보는 소속감에 조금 무리하게 술을 마셨다.
아직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생기진 않았지만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시각 6시…
술을 마신 다음날은 언제나 일찍 일어난다.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랴~ 콩나물국이라도 끓여볼 심산으로
잠옷에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밤새 소나기라도 내렸는지 길가엔 물기가 가득하다.
내 걸음 탓인지, 항상 발걸음에 빗물이 튀겨 내 하의는 온통
빗물투성이로 변한다. 그렇기에 난 아주 조심스레 걷는다.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 수 있게~
나도 모르게 어제 홍작가가 부른 하림의 ‘출국’ 이란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아…노래 부르는 그의 모습은 날 사랑의 포로(아…느끼느끼~~
하지만 지금 어떤 단어로도 설명이 될 수 없음)가 되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포로 :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정신이 팔리거나 매여서
꼼짝 못하는 상태.
동네 앞(난 이 집 단골이다^^) 슈퍼
-아줌마, 콩나물 500원어치도 팔죠?”^^;
항상 콩나물을 살 때마다 이렇게 물어본다. 그러면 아줌마도
-그럼, 500원어치도 팔지~
하면서 좋은 인상대로 넉넉하게 주신다.
콩나물봉지를 받아 든 나는 또 살게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너구리라면을 살까? 무파마를 살까 고민하는데
“드르륵~”
누군가 들어온다.
-어이구~ 어제도 술 했구먼~
하면서 아줌마는 그에게 우유 500ml를 건넨다.
(어머, 술 마시고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네…?)
난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고래를 돌렸다.
헉~ 난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 회사 정팀장이다.
(저 사람 날 알아봤을까? 잠옷에 가디건…어머어머…나 화장도
안했자나!!!)
-저어…혹시, 박선경씨?
내 등뒤에서 그가 물어본다.
-아뇨, 사람 잘 못 보셨나봐요!
난 후다닥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난 절대 거짓말 안 했다.
그는 나더러 이선경이가 아닌 박선경이라 물었다.--
난 이선경인데…-.-;
(저 사람 이 동네 사람이야? 오늘 화영선배한테 물어봐야겠다.)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서 김치에 한그릇 뚝딱 먹었다.
원래 먹성이 좋은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타입이다.^^v
캐주얼하게 입고 기분 좋은 맘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아침에 정팀장을 만난게 좀 찝찝했지만 이내 코너를 돌면서
오늘도 홍작가가 사무실에 나와 있을까?…란 생각으로
금새 기분은 밝아졌다. 그리고 역쉬^^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그가 오늘도 사무실 앞에 서있다. ^----^
-아..네, 인표씨도 어제 잘 들어가셨지요?
발그레 홍조를 띤 내 얼굴은 그에게 미소를 띄운다.
-어제, 노래 넘 잘하시던데요?…
-에이..제가 뭘~
그는 어제와 같은 차림이다. 어제 안 들어간 모양이다.
내가 조금 우물쭈물 하자,
-그럼, 수고하세요! 선경씨한테 인사하려고 여기 들린 거에요”
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다.
나의 동그란 눈은 그의 시선이 사라질 때까지 멈춰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타났다.
-저녁에 식사나 같이하죠?
-네?
-제가 오후에 여기 다시 올거거든요, 오늘 선경씨랑 촬영있을 거에요
이 사람, 내 스케줄을 꽉 차고 있다.
(나한테 관심 있는 가봐~^^)
-그럼, 이따 보죠~
오전 내내 그 사람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실 난 내가 관심 있는 사람과 한번도 사귀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라질 거 같았다. 이선경, 파이팅!!!
-이선경씨~
화영선배가 날 찾는다.
-오늘, 오후 2시쯤에 청담쪽으로 나가봐. 위치는 홍작가가
잘 알거야. 아참, 박혜경이라고 알지?
-네?
-어머
그 만큼만…얼마만큼이란 거지? 사실, 난 학교 다닐 때에도 별로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날 무얼 보고 알아봤다는 거지…--
아주 무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는 순정씨가 내게 커피를 권한다.
-어제 보니까 술을 잘 마시나 봐요?
하긴…어딜가나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관심의 레이다가 켜지기
마련이다.
상냥함을 가장해서 나의 사생활들을 캐내고는 이러쿵저러쿵…
난 내게 금방 친한척하는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아..네…
그냥, 대답했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술을 많이 마셔서 오늘 늦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참, 어디 살아요?
-양재요~
-어..그럼 정팀장님하고 같이 다녀도 되겠다. 정팀장님도 양재에 사는데…
(그래요…오늘 새벽에 봤어요…우리동네 슈퍼에서…--v)
-아..그래요…
난 그냥 예의상 대답을 한 후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내 수화기를 들었다. 화영선배처럼…
순정씨도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자리로 돌아간다.
막상, 수화기를 들었지만 전화할 때가 없었다.
점심식사 하기전 화영선배는 내게 박선배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011-259-05**
take 5의 재즈가 흐른다. 선배의 칼라링 인가보다.
-박혜경입니다.
목소리가 아주 정갈하다.
-저어…안녕하세요? 우리대학교 95학번 이선경인데요…
-아..네…이선경씨?…아하~선경이~
-화영선배랑 같이 일하게 되었어요, 선배 잘 계셨죠?
-어…보고싶다…오늘 2시에 온다고 했지? 나 그래서 지금
청소중이야~ㅋㅋ
여자들만의 길어지는 수다는 만나서 하기로 했다.
박선배는 스파게티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난 그것에
필요한 자료를 찾다 보니 어느새 2시가 되어버렸다.
-선경씨~ 우리 나가죠~
난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뒤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찍고 있었다.
”찰칵~”
-어머!
나의 놀란 탄식에 옆의 순정씨가 말한다.
-홍작가님은 언제나, 새로 들어오는 여자분을 그런 식으로
찍어준답니다.~
마치, 나에게 너한테만 홍작가가 그런거 아니니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라고 못을 박는 듯 하다.
(치이~ 그건 그렇고 이를 어째…준비도 안되어 있을 때
사진을 찍다니…)
난 준비를 해야 잘 나오는데….걱정걱정….-o-
그는 운동화에 청바지…그리고 아주 샛노란 폴로티를 입었다.
그리고 난 핑크색 폴로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어머머..두 분이 커플티 입은거 같네요~
(어머머, 순정씨, 이제야 눈치 챘어요?)
분명히 그는 아침의 내 차림을 보고 나갔다. 아마도 그는 날
좋아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의 차를 타고 청담동 도시빌라에 왔다.
꽤 호화로운 빌라다.
주차를 하면서 그는 나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
-선경씨, 나 빠뜨리고 온 게 있는데, 먼저 들어갈래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요?
-한…10여 분쯤…
-그렇게나 빨리 올 수 있어요?
이 남자, 고른 치아를 보이면 씩~ 웃는다.
-나도 여기 살아요~
박선배가 사는 203호 바로 위, 303호에 산다고 한다.
난 아는 선배이니 먼저 가서 인사나 하고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빨리 오겠다며, 단숨에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 자기집 아래층에 사는 사람 촬영이었음 그냥, 여기서
만나자고 하지…일부러 잡지사까지 왔을까? 바보….이선경, 넌
그걸 모르냐…^^알징~ 날 좋아하는게 틀림없어~ ㅋㅋ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사실은 소리내어 웃고 싶었지마는 참았다.^^
“띵똥~”
-누구세요?
-쿡앤라이프입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3년 만에 만난 박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어머, 이게 얼마 만이니?
선배는 예전과 다름없이 예쁘고 당당해 보였다. 특히, 가슴이
좀 파인 그녀의 감색 원피스는 그녀의 매력을 한층 높여주고
있었다.
-선배도 잘 있었죠? 간간히 신문과 잡지에서 선배의 활약상을
보고 있었어요, 어찌나 부럽던지…선배님 넘 반가워요~
난 사실 선배를 동경했었다. 예쁘기도 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지적인 면모까지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여성이었다.
-나 오늘 선배 만났다고 은진이랑 선아한테 자랑해야겠어요~
-얘는~ 넌 아직도 순수해 보이네…
-선배, 그거 칭찬인거죠?
모처럼 만난 우린 수다를 떨었다.
사수까지 하고 들어간 나의 대학입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보다 한, 두살 많은 선배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선 어김없이
부딪치곤 했다. 그리고 그때 날 도와준 선배가 화영선배랑 박선배이다.
-선배, 그때 고마웠었어요..
-지지배…뜬금없이…
아참, 내가 너무 반가워서 차를 내오는걸 깜박했네~
선배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난 거실의 인테리어를 살폈다.
큰 창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거실엔 화이트를 주조로
더욱 화사해 보였다. 특히 내 눈길을 끄는 세르지오 칼라트로니가
디자인한 다른 형상의 램프 3개…추상적이긴 하지만
선배의 모던한 감각에 알맞은 조형적인 감각의 스탠드였다.
마침,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이 열렸네요?
그의 목소리에 선배가 주방에서 바로 나온다.
-오랜만이에요….
(뭐야..둘이 아는 사이야?)
선배의 인사에 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