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은이도 돌아오고, 병석이도 집으로 돌아와 정상적으로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곧 겨울 방학이 오면 다시 그 동양화 선생님 집으로 가서 수업을 계속할 수 있게 아버지가 마음을 열어주신 덕에, 모처럼 병석이 스스로 정말 즐거운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스스로'
이 말처럼 자신의 현실을 원하는 대로 즐기는 것은 정말 환상적인 기분일거였다.
이제는 나역시 슬슬 나의 미래와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학교로 돌아가야 했지만 쉽게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늘 어려운 숙제인 나의 진로.
어쩌면 다른 사람의 문제와 고민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분노가 사그러지지않아서 였을지도...
역설적이게도 난 내 자신의 분노를 통해 타인들의 아픔이나 선택의 기로에서 보다 냉정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내 자신의 고통이 가장 처절할거라는 자기 합리화에서 출발한 조금은 이기적인 타자에 대한 배려인지도 몰랐다.
와인잔의 물기를 닥으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 졌다.
바텐에 앉아서 하루 매상을 정리하고 있던 웅주형이 날 부른다.
"병근아. 니 와그리 머리를 도리질 치노?"
"아니에요, 형."
"자슥은.. 아니긴 뭐가 아인데? 니 이리 좀 안거봐라."
형은 바스툴 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 번 쳤다.
한참이나 뚤어지게 내 얼굴을 바라보던 형은,
"니 담배있제? 나 하나만 도고."
"형? 또요?"
웅주형은 머쓱히 날 바라보더니만 내 코를 살짝 잡아 비튼다.
"니 내가 담배하나 달랠 때마다 토를 다노? 자슥이. 치사스럽게."
"그러니까 피지마세요. 치사하담서요?"
형은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다가 다시 담배를 피면 얼마나 나쁘노? 니도 내가 옆에서 자꾸 담배 꾸어서 피워줘야만이 그 넘의 몹쓸 것 빨리 끊을 거 아이가? 엉? 니 어린 자슥이 너무 많이 피는거 아니가? 니 그거 아나? 담배를 많이 피면 뇌세포가 파괴 된데이.
나야 이제 뭐 공부할 사람도 아이고 이젠 그렇게 많이 피우는 거도 아니니까네 괘안치만.
널 보그레이. 니야 앞날 창창하고 앞으로 해야할 일도 많고 그런아가 담배 그케 많이 피우면 우짜자는 거고? 응?"
"형?"
"와?"
"그냥 피고싶다고 말씀하세요. 사소한 것에 무슨 그렇게 열변을 토하세요? 저도 이제 끊을거니까 형도 이 담배가 마지막 이라고 생각하고 즐기시라구요."
담배갑위로 불쑥 올라는 담배를 집으며 웅주형은 진짜 무안해 했다.
서로 불을 붙여주고 우리는 위로 피어 올라가는 희푸르스름한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근아."
"네."
"니 고민되지?"
"뭐가요?"
"니 말안해도 내 안다. "
대화는 다시 거기서 끊겼다.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 나서야 형의 말은 이어졌다.
"고민하지말그레이. 고민해봤자 변하는게 없는기라. 니가 원하고 생각하는 거가 있으믄 그냥 해보거레이. 인생을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실패나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 거든.
그건 내 몫이 아닌기라. 어떤 일의 결과까정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절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신인기라. 하지만서도 전에도 말 안했나? 어떤 일이던 간에 최선을 함 다해보거레이. 최선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 일을 시작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라.
시작을 안했는데 어케 끝이 나겠노? 안그러나? 니가 무슨 범죄를 꿈꾸는 것도 아이고, 망나니 되가가 민심을 흉흉하게 하려는 것도 아이고, 앞으로 니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는거 아이가?
처음에 말이다. 니 말만 들었을때는 느그 아버지가 잘 이해가 안되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하려는 것도 아인데 자신이 원하는 걸 공부하는 것에 뭘 그리 갈등을 빚어내야하는지 잘 몰랐데. 근데 그거 니 아나?
그게 바로 아버지의 최선인기라.
그 어른이 생각할때 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속에 나왔을때 실패의 확률을 줄여주고 싶은 그 마음인거를 내도 이제사 느그 아버지가 병석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안 느꼈나?"
아버지는 병석이가 돌아왔을때 그 녀석과 한 시간 동안 독대를 하셨다.
한참후에 아버지 방에서 나온 동생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지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은 이랬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석이에게 평생을 동양화에 걸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단다.
그리고 만약 평생을 걸지않을거라면 대학선택까지 특별활동으로만 끝내라고 하셨단거였다.
하지만 병석이, 그 어린 동생 입에서는 당돌하게도 이런 말이 쏟아졌다.
"난 당연히 평생을 건다고 했지, 나도 생각이 있는데 열심히 하지도, 평생을 걸지도 않을 일때문에 집을 나가서 고생할 만큼은 바보가 아니라고 했어. 형, 안그래?"
사실 그 때 나 보다도 확고히 자신의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그 녀석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 스스로 성인이 되었을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 같다고 나 스스로 느낀 터였다.
과연 나는 아버지가 그런 질문을 하셨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웅주형은 생각에 잠긴 나를 내버려 두어줬다.
말없이 한참이 지났을 무렵 먼저 입을 연건 역시 형이였다.
"아버지가 니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지말아라. 니도 이제 군대도 갔다왔고 점점 나이를 먹어갈 수록 느낄 수 있을기다. 니가 원하던 원하지않던 널 지금의 자리에 있겐 한 건 아버지도 누구도 아이고 너 자신이란 말이다. 막말로 병근이 니가 지금 고민하는건 다시 복학할 것이냐 다시 니가 원하는 공부를 할 것이냐의 방황이지 네 인생을 통째로 고민하는거 아니잖아? 난 솔직히 때가 있다는 말을 그리 믿지는 않지만 서도 너한테 지금은 때인거 같다.
그리고 진짜 니가 좋아서 할 수 있는 공부를 찾아봐라. 아버지는 당신 뜻을 거스르면 많이 노하시고 여러가지 도움도 안주실 수 있으시겠지만. 병근이 니 한텐 내가 있잖아.
내가 김회장님을 통해서 나를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너한테도 내가 있다 이말이다. 무슨말인지 아나?"
"네… 알아요. 웅주형. 사실… 난 말이에요. 미은이한테만 바보처럼 군게 아니라 제 자신 한테도 정말 어리석게 굴었어요. 인정하기가 이렇게 어려울줄 몰랐지만. 이젠 말할게요.
형 말이 맞아요. 아버지가 원하셨어도 제가 병석이처럼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면 끝까지 설득해봤을거에요. 근데 전 아버지와 맞서기가 겁났나봐요. 그래서 아버지가 담임선생님과 결혼하신다는 것에 모든 것을 합리화 했었던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런 일은 가정내에 큰 일이고 고3인 수험생의 심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동정표를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심 너무 쉽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버린건 그래도 컴퓨터 쪽 전공을 하는 것이 나중에 사회에 나갔을때 더 쓸모있을거라는 계산적인 결정이었던 모양이에요.
그 걸 내 자신이 내 입으로 시인하기가 어려우니까 세상에 대한, 아니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자꾸만 형식화 되어 간 거였죠. 의지만 있었다면 복수전공을 할 수 도 있고, 아니면 아버지를 잘 설득해서 전과할 수 도 있었는데 그 어떤 가능성과 타협안보다는 정면대결에서 칼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끙끙앓기만 한 비겁자였어요.
형,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더 부끄러워요…"
웅주형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후 담뱃재가 필터까지 타드러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껏다.
"형."
"병근아. 이제 오늘은 그만 말해라. 모든 생각을 한꺼번에 털어놓으면 다음 생각에 너무 무리가 안되나? 중요한 건 내가 처음부터 널 우리집에 오게하고,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했던 마지막 제안. 니가 꿈을 이루기 위한 뒷받침을 하겠다는 거고, 또 그렇게 해서 니가 성공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 꿈을 또 이루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늦었데이.
아직 시간이 있고 너도 오늘 그렇게 속아픈 야그하느라 욕봤다. 그라고…
이런 말을 나란 사람을 믿고 해준 니가 난 더 고마운 기라.
병근아. 나 먼저 자러 올라간다. 잘 자그레이."
CD플레이어의 음악이 끊어졌다.
한동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날 기력이 없었다.
벌거벗기운 채의 자신을 마주대하는 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하는지 난 처음 알았다.
늘상 마음속에서만 생각했던 나의 감정들을 입밖으로 토해내고 나니 탈진되는 모양이었다.
비겁한 건 나였어…
형이 말한 나의 꿈, 그리고 아버지… 마음을 열어놓을 때만이 갈길을 갈 수 있음을 알고도 그 동안은 아무렇게나 방치해왔는지도 몰랐다.
혼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희끄무레 동이 틀 무렵이여다.
이 곳에 처음 형을 따라 왔을때도 저렇게 여명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형을 만난것처럼 이번에도 난 형을 떠날때가 되었다는걸 자연스레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