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진전도 없이 병석이의 가출은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웅주형이 병석이의 학교에 아버지와 함께 가서 일단,학교생활에 문제가 없이 말을 맞추어 놓고 왔지만 담임의 말대로 너무 길어지거나 연락이 계속 없으면 학교에서도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가게는 가게대로 어수선했다.
웅주형과 sunny누나의 커플탄생을 오래도록 축하해 줄 여유도 없을만큼 나는 피폐해갔고 차분하게 웅주형이 여러모로 병석이의 행방을 추척하고 있었다.
처음엔 엄마의 산소에도 가보았고, 예전에 우리가 살던 동네와 그 녀석이 쥐방울 드나들듯 가던 만화카페와 태권도장, 그리고 청소년 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른들을 흉내내는 10대들의 아지트를 샅샅이 뒤졌지만 병석이의 머리털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 녀석의 머리속에선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숨이 막혔다.
소강상태였던 나에게 전혀 예상치못한 소식은 등기우편을 받고서였다.
"임병근씨 계십니까?"
우체부의 손에 들려있었던건 누런 종이봉투였고 난 서명을 하고 우편물을 받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삐뚤게 찢어낸 봉투속에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병석이의 손으로 갈겨쓴 한 줄의 주소와 함께…
어의 없게도 그건 일주일전에 예매된 것이었고 병석이는 부산으로 간 모양이다.
일부러 그런건지는 모르지만 출발시간은 오늘 오후로 되어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내려가고 싶었지만 이렇게 날 부르는 건 이유가 있어서일거라는 생각에 그저 겉옷만을 걸치고는 역으로 달려갔다.
군대제대후에 정식으로 기차를 탄 건 이번이 처음인거 같았다.
게다가 부산이라니…
엉뚱하다는 생각도 들고 왜 하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부산에 갔는지 알길이 없었다.
한 순간에 억제하기 어려운 졸음이 쏟아져왔다.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수 없던 동생이 최소한 하나의 힌트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풀어졌던 모양이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꺼풀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잤을까?
안내방송이 나와서 눈을 떠보니 다음역이 최종 정착지인 부산이라는 말이 들렸다.
거짓말처럼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몇 시간을 잤다는 것이 믿어지지않았다.
"학상, 이제 정신좀 챙겨. 아고, 몇시간이고 그렇게 기차에서 자는 사람은 내 보다보다 첨 봐."
생수통을 내밀며 앞자리 아주머니가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이셨다.
머쓱하긴 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생각하지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병석이를 만나리라.
새벽의 바람은 조금은 날 서늘하게 만들었다.
부산역에 떨어지니 이미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병석이가 보내준 주소를 꺼내들었다.
택시승강장에는 이제 막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끄트머리쯤에 서서 머리를 긁적이는 나를 누군가 툭 친다.
"형?"
난 눈앞에 병석이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내 머리속에는 까칠하고 가출한 아이 표가 줄줄 흐르는 꼬맹이가 맴돌고있었는데 지금 나에게 형이라고 부른 이 아이는, 아니 솔직히 아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징그러운 사내냄새가 나는 병석이는 코밑이 살짝 검게 보이고, 짧게 자른 머리와 멋진 블루진, 그리고 비누향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이 녀석.."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불쑥 병석이는 날 껴안았다.
부산역광장에 이제막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방금 기차에서 하차한 많은 인파가 있었음에도 내 동생은 그 큰 키에도 불구하고 날 꼬옥 끌어안고는 있다.
"형, 미안해. 걱정했지? 맨."
코를 훌쩍거리는 것이 이 녀석이 우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얼굴을 들어올리니까 그래도 아이처럼 씨익하고 웃어보인다.
"너 어디있었던 거야? 혼자있었던 거야? 밥은 먹었어?"
"형, 내 얼굴이 밥 못먹은 얼굴이야?"
사실 여느 가출청소년과는 달리 병석이는 집에서 보다도 더 깔끔하고 건강해 보였다.
막상 병석이를 보는 순간 불안했던 지난 감정은 일순간 연소되었다.
동생녀석은 이미 익숙한 듯 역앞에서 가장 맛있는 오뎅집이라는 곳에 날 데리고 가서 오뎅을 사주고는 자신이 돈을 치뤘다.
어디서부터 물어봐야할지 잘 알 수가 없었지만 그저 이렇게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형? 많이 걱정했지? 그래도 내가 이렇게 사고치니까 부산에서 우리 형제가 만나기도 하고 멋지잖아. 안그래? 형은 얼굴이 왜 그렇게 엉망이야?"
오뎅국물을 먹고 있던 숟가락으로 병석이의 앞이마를 딱하고 때렸다.
"뭐? 임마? 너는 가족들 걱정시켜놓고 얼굴이 아주 뿌연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지만 난 너 걱정되서 잠도못자고 밥도 못먹고 그래서 이렇게 까칠하게 만들어 놓고는 뭐라고? 너 죽었어."
내게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뭐가 좋은지 병석이는 계속 히죽거렸고 그런 동생을 보고있자니 나도 웃음이 났다.
오뎅집을 나와서 우리는 병석이가 가르쳐준 주소지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
한참이나 간 후에 우리가 내린 곳은 어느 기와집앞이었다.
아파트나 익숙한 나에게 고궁이 아닌 개인집으로 지어진 기아집은 이곳이 부산임에도 불구하고 먼 어느 나라에 와있는 듯이 생경하면서도 그윽한 느낌이었다.
병석이는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 대문을 밀었다.
시간이 잠깐 비켜간듯이 운치있는 마당이었다.
흙과 돌맹이가 조화롭게 놓여진 꽃길을 따라 또다른 나무문을 밀어내니 작은 연못이 있고 그 곳에 여러명의 사람이 먹을 갈고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동생녀석은 미소를 머금고 연못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낯선장소에서 내 동생을 낯선모습으로 마주대하고 앉았다.
"형, 사실은 나 가출한게 아니고, 여기 그림배우러 왔어. 여기는 동양화를 배우는 곳이야. 이 화방의 주인인 이곳 대학의 교수님이고 해마다 전국에서 동양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무료로 지도해주는데 올 해 동양화 공모에 그림냈었는데 덜컥 되버렸지모야.
교수님이 추천서랑 특별교육자료를 이미 다 만들어 주셨는데 학교에다 추천서내려면 학부모승락이 있어야하고 아직은 그러기가 좀 그래서 내가 아빠나 엄마한테 말을 안했어…. 그리고 형이 나보러 와주었음 해서 기차표 보낸거야. 그리고 보다시피 여기 사모님이 맛있느거 해주시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넘 재밌어, 그림도 실컷 그리고."
"가만,병석아. 그러니까 너 동양화를 공부하고 있단 말이야?
너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니? 힢합만 좋아하는 니가 동양화를 공부한다고? "
병석이는 잠깐 말이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은 사춘기 동생의 심리상태뿐이 아니고 어느새 훌쩍 커서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길을 준비하는 학생이기도 한 거였다.
"맨, 난 물론 음악도 좋아해. 그렇다고 동양화 좋아함 또 안됀다는 거 말도 안돼.
처음엔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시작했는데 나도 내가 이렇게 이 쪽으로 소질이 있을 줄 몰랐어. 나 짱 잘그린데, 교수님이.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음 맘이 편해져.
근데 난 아직 내가 그림을 전공하고 싶다는 것을 아빠한테 말하기가 좀 그래..형.
형도 하고싶은 거 있었지만 아빠가 반대해서 못했잖아. 난 그게 무서워.형."
"병석아, 그건… 그러면 너 선생님이 유산한 것 땜에 집을 나온게 아니었니?"
동생은 한쪽에 밀어놨던 자신의 배낭을 만지작 거리며 눈을 피했다.
"솔직히 전혀 관계없다곤 말 못해. 그거 때문에 말을 할 기회가 없었어. 형,난 엄마 좋아, 새엄마라고 부르지않는건 정말 엄마같아.선생님은.
그래도 나 동생이 생기면 좀 이상할꺼같아. 형이랑 나랑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함께 놀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이제 갓난쟁이 동생이 생기면 나랑 놀기가 어려울거 아니야?
난 그게 좀 싫었어. 졸라 이상하자나. 내가 형 나이됬을때 유치원생이 '형아 놀자' 하면...
그래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아빠가 원한다면 내가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쨋던 동생이 생기면 귀여울거는 같애. 형은? 차라리 여동생이라면 모를까, 그럼 내가 오빠가 되는 거니깐"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생긴다는 것보다 아버지에게 새로운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를 통해 뚜렸해지는 것이 두려웠던 거였을게다.
하지만 병석이 말대로 아버지가 원한다면, 나로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터였다.
한가지 가슴이 아팠던 것은 나의 진로에 대한 방황으로 인해 이다지도 확고하게 자신의 길을 다지고 있는 병석이가 쉽게 결정을 못하게만든 것이 미안해졌다.
롤모델로서, 형으로서 난 빵점짜리였다.
우리는 서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피식하고 웃었고 어릴때 그러했듯이 한 두대 툭툭건디리다가 레스링과 권투를 짬뽕한 듯한 힘겨루기를 끼득거리며 오래도록 했다.
"형아, 나 부탁하나만 들어주라."
"말해봐."
"있잖아, 나 동양화하고 싶다는 거 형이 아빠랑 엄마한테 해주면 안돼?
아빠가 안된다고 할까봐 난 말을 못하겠어. 이제 2주정도만 더 배우면 일차 레슨은 끝나는 거고 겨울방학때 한달 동안 또 레슨이 있거든... 지금 그냥 올라가 버리면 다시는 여기 못올거 같아서 그래. 도와줄거지? 나 정말 동양화 공부하고 싶어, 형."
결국 난 병석이의 학교에 제출할 서류와 그동안 병석이가 그린 동양화 몇점, 그리고 침을 튀기며 동생을 칭찬하던 교수님의 추천서와 함께 또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병석이는 애초에 내가 서울서 내려올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차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며 들판이며, 또 낯선사람들 속에 섞여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지만 , 온통 정신을 놓아버리며 보지못했던 그 광경들을 보기 위해 구지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다시선택했다.
동생녀석은 옳았다.
혼자서 기차의 차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른 이미지를 나에게 안겨주었다.
하늘에 색깔에 따라 조금씩 달라보이는 구름의 색, 또 끝이없이 이어진 철로들을 언제 이렇게 다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중. 역마다 새로이 내리고 타는 사람들, 사람들…
아버지를 만나서 내보이고 싶은 것은 병석이의 진로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의지와 꿈을 당당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의 이해와 허락을 얻어냄으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용기를 가지고 설 수 있는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치 이 기차의 끝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달리다 보면 뭔가 자신을 꽉 채워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믿어주길 바라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