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근오빠, 좀 웃어봐봐. 응?"
"형이 없으니까 웃어지지가 않는다. 이러면 안되는데."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미은이가 갑자기 아무말도 없다.
여자가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여자의 마음이 뭔가 불편해졌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던 형의 말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난 오빠한텐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봐, 그쵸?"
뾰로통해서 서있는 미은이를 내려다보았다.
미은이는 다른 어떤 곳보다 눈썹이 매혹적이었다.
징그럽게 다뽑은 일자눈썹도 아니고 끝에만 밀려있는 반쪽 눈썹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무지하게 노력한 것도 아닌 그저 미은이의 눈썹이었다.
그 눈썹을 한쪽만 스윽 높이 올리고선 내 옆구리를 툭한 번 건디리더니 말한다.
"오빠, 웅주아저씨가 없으니 집에서 혼자 자기 무섭지 않아?"
"무섭긴, 너 군대 갔다온 사람한테 지금 장난하냐? 형이 없어서 허전하지 않아, 이렇게 물어보는 거야.이런 때는."
순간 질끈 눈을 감았다 뜬 그애가 예전의 그 날 처럼 다시 날 빤히 쳐다본다.
"오빠?"
"응?"
"귀좀 줘봐."
"귀? 아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은이는 내 귀를 잡아당겨서 자기의 입가로 가져갔다.
"있잖아, 이따가, 일 끝나면, 음, 있잖아, 나 집구경 한 번만 시켜주면 안돼?"
난 배꼽을 쥐고 웃으며 말했다.
"야? 그게 뭔 비밀이라고 간지럽게 속삭이냐? 그래.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난 다시 카운터의 컴으로 돌아갔고 아주 잠깐 얼굴이 빨게진 미은이도 총총히 주방쪽으로 사라졌다.
유난히 마지막 손님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면서 진을 빼고는 갔다.
대충청소를 마치고 미은이를 찾았지만 그애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웨이터형에게 물어보니 시간이 끝나자마자 가버렸다고 했다.
전화를 해볼까?
-어머머머, 미안해서 어쩌지? 미은이는 지금 전화 못받는데..
메세지의 인사말이 흘러나온다.
자기가 먼저 나보고 놀러오고 싶다고 하더니 그냥 간건가?
하긴 일끝나고 머무르다 가기엔 늦은 시간이다.
뭔지 모를 아쉬움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몇번 쓰러내리게 만든다.
웅주형과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본 적도 처음이고, 미은이처럼 귀여운 아이를 알게 된 것도 처음인데 지금 그 둘 모두가 곁에 없었다.
알람을 작동하고 불을 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집에는 언제나 날 설레게 하는 책들과, 시내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진 정겨운 창문만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더이상의 조명은 필요없을 것 같다.
허물벗는 뱀마냥 되는 대로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김이 샤워실 가득 피어올랐다.
처음에 이 집에 와서 혼자 이빨 닦다가 울었던 날이 희미하게 되살아 났다.
그 날 형을 안 만났더라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웅주형은 나와 함께 살게되면서 무던히도 아버지와 날 엮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나 모르게 형이 아버지를 만났다는 걸 알았을때 난 처음으로 형에게 대들었었다
내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악을 쓰던 나에게 형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인생은 혼자서 살수는 없는기라, 가족하고도 못사는 놈이 남들하고는 잘 살거같나? 느그 아버질 위한게 아이라 병근이 니 자신을 위해서 함 생각해봐라. 사람 인 자가 와 그래 생겼는지 잘 생각해라 이말이다. 내가 느그 아버지를 만난 건 너에게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주십사하고 부탁하러간기라. 느그 아버지가 와 허락했는지 아나? 그 답은 니가 시간이 지나면 잘 알기다."
그랬다.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래전 분노와 상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던 나는 이제서야 사람다운 시각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에 관한 생각은 이 정도로 그치기로 했다. 평생을 두고 생각해도 머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이것은 엄마에 관한 기억의 포로이기에..
휴대전화의 메시지 불빛이 어둠속에서도 파란 빛을 띄며 반짝인다.
미은이가 죽어도 핸드폰을 함께 해야한다고 해고 지난 주에 같은 모델로 산 전화기이다.
'오빠, 나 지금 문앞이야. 어딨어?'
놀라서 창문아래 입구를 굽어보았다.
미은이가 층게에 아주 조그마하게 쪼그려 앉아있었다.
"미은아?"
돌아보는 그 애의 눈에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한가득 고여있었고, 손에는 작은 케익이 들려져 있었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몰라.."
뾰로통한 얼굴로 미은이가 화를 낸다.
어느 날인가부터 난 이 애가 나에게 화나있는 것을 보면 한 없이 행복해지곤 했다.
여자라고 하기엔 넘 어리고 그렇다고 아이라 하기엔 너무나 예쁜 미은이.
난 양손을 그애의 겨드랑이에 넣고는 '영차'하고 미은이를 일으켰다.
"들어가자."
발소리를 쿵쿵내며 자신이 화난 것을 시위하듯 묵묵히 따라 오던 미은이가 특유의 '어머머머'를 터트린 것은 역시 거실전체를 어둠속에서도 환하게 밝혀주듯 야경을 비취는 창문을 보고서 였다.
"역시 웅주아저씨는 멋있는 사람이야. 그치 오빠?"
"그래, 맞아. 뭐 마실 것 줄까?"
미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창문가로 다가가 바닥에 앉았다.
푸르스름한 밤의 여명이 미은이의 얼굴을 신비롭게 비취고 있었다.
길고 예쁜 눈썹이 날 보고 환하게 웃는 듯 하다.
"오빠, 오늘은 우리가 사귄지 29일 되는 날이야. 몰랐지?"
"30이면 30일이지, 29일은 뭐야?"
"병근오빤, 참.. 특이하자나, 남들처럼 흔한 기념일은 싫단 말이야."
빨간 리본으로 묶여져 있던 케익을 풀었다. 하얀 크림으로 "Today is the day."라는 문구가 써있었다.
"오늘이 그날이라니? 29일째? 귀엽다."
말없이 미은이는 29개의 초를 꽂았다. 우리는 함께 불을 부치고 하나,둘,셋이라는 소리와 함께 불을 껐다. 순식간에 환해졌던 거실은 다시금 거리의 불빛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불을 켜려고 일어나려는 나의 손을 미은이가 잡았다.
엉거주춤 그 애에게 손을 잡힌채 잠시 미은이가 나를 바로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너무도 커서 미은이의 귀에도 들릴 듯 온 방안을 꽉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불조차 켜지않은 거실인데 미은이의 두 눈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차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데 나의 몸은 벌써 반응하고 있었다.
두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오고 아래쪽의 주책없는 녀석은 눈치도 없이 바지를 뚫고나올 듯 날 무안하게 하고 있었다.
아마 청바지를 입지 않았다면 미은이가 알아챘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고있을때 미은이가 일어났다.
한 뼘정도나 키가 작은 미은이가 내 왼손을 잡은채 날 올려다 봤다.
"병근 오빠, 지금 무슨 생각해?"
생각? 생각이라니. 내머리속에는 미은이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 애의 빨간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고있었기에 미은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빠도 나랑 똑같은 생각해?"
이번엔 오른손으로 미은이는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에의 볼을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이 기분.
어느새 미은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길다란 눈썹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는다. 내 입술이 그 애의 입술에 닿는 순간까지는 과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을 지나 마주 닿아진그애의 입술은 너무도 연약해서 내가 거칠게 입을 맞춘다면 그대로 지워져버릴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입맞춤은 멈추어 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느낌을 이제서야 난 느끼게 된 걸까? 이 세상 어떤 달콤한 과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은이의 입술은 강렬했다.
"오빠, 잠깐만"
환상의 시간을 멈추게 한 건 미은이가 다급하게 내뱉은 그 한 마디였다. 눈을 뜨고 미은이를 봄과 동시에 내 스스로도 당황한건 어느 새 내 손이 미은이의 가슴을 더듬고 있어서였다.
"미,미안해. 정말 미안해."
놀란 표정으로 바르르떨고있는 미은이를 나는 가슴에 당겨안았다.
아무에게도 배우지않았음에도 내 육체의 시계는 익숙한 것처럼 미은이를 대하고 있었던 거였다.
부끄러웠다.
최소한 나 자신에게 아니, 내가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 이 조그만 꼬마를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거 였는데..
내 품에 안겨 미은이는 한 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모기만한 소리로 미은이는 나에게 속삭였다.
"있잖아, 오빠, 더 이상은 아직 좀 무섭다, 그치? "
"그래, 그 말이 맞아,미은아 , 우리 나갈까?"
나는 촛불이 꺼진 케익과 칵테일 재료를 가지고 옥상문을 열었다.
와인박스 몇 개를 조그마한 간이 테이블로 급조하고 우리는 모여앉아서 다시금 케익에 불을 붙였다.
"미은아? "
"응?"
"나 하고싶은 말 있엇는데 들어줄거지?"
이번에도 미은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널 만나기 이전에는 난 웃을일이 별로없었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웃을 줄이나 알았나 하고 느꼈을때가 많았지. 근데 널 만나고서는 좀 쑥스럽지만 나 행복하다. 고마워 미은아. 그리고 한가지 더."
"뭔대?"
"니 말이 맞았어. 널 알지도 않고 널 사랑하지않게 될거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냐고 했지? 그래, 내가 틀렸어. 난 이제 널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미은아, 사랑해."
미은이는 웃었다. 어둠을 환히 밝혀줄 정도로.
"거봐,거봐, 오빠 내말이 맞지?호호호"
우린 두 손을 잡고 다시 촛불을 껐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아이처럼 살짝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훨씬 가슴설레는 첫 키스였다.
이세상에 태어나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는게 이리도 행복한 줄 몰랐다.
그렇게,
따뜻한 미은이의 손과 밤하늘에 보이는 별과 그리고 사랑만이 가득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