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은 이혼 후 당장 장미와 함께 생계를 꾸려가야했다.
전세집을 처분한 후 엄마 혼자 살던 단칸방 친정집에 들어가 엄마와 한방에서 지내며 직장을 구하러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이력서를 산뜻하게 만들어 수십장을 유명 대기업에서부터 조그마한 중소기업까지 다 돌려봤지만 어느 곳에서도 면접오라는 소식 한통 오지 않았다.
그래도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의 수재였던 그녀였기에 처음엔 어디든 취직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경제침체로 회사마다 구조조정 바람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아무리 명문대 출신이라해도 아이가 있는 이혼녀에게 일자리를 내줄 그런 회사는 없었다.
정말 어쩌다가 조그만 회사로부터 면접을 오라해서 가보면 모두들 "남편은 뭐하는데요?"라고 물었고, "이혼했다"고 하면 "왜 이혼했냐"를 물었다.
이혼한 여자한테는 뭔가가 문제가 있다는 그런 눈초리였다.
주부사원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가보았다.
대개는 급여가 생활비에 훨씬 못미치거나 미연의 성격하고는 너무 맞지 않는 외판업이었다.
나중에는 출판사의 번역일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간신히 일을 하나 얻어와 일주일을 꼬박 밤을 새다시피 번역을 해서 갖다주었다.
그런데 과장이라는 사람은 그 책의 출간이 취소되었다며 번역료를 주지 않았다.
그가 자기를 속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 번역료를 포기하고 말았다.
세 달을 그렇게 돌아다녀 본 끝에 미연은 실망 정도가 아니라 절망을 느꼈다.
학교 다니다 결혼하여 살림만 한 것이 인생경험의 전부였던 그녀는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자부심, 자만심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남편이 자신에게 서운하게 대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진하고 실감나게 '왜소한 자신'을 느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다.
미연은 일주일 정도를 문밖 출입도 하지 않고 집에 쳐박혀 있었다.
그동안 돌아다니느라 너무나 지쳤고 우울해져서 꼼짝도 하기가 싫었다.
낮인데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런 저런 상념에 몸만 뒤척였다.
전화가 울렸다.
미연의 엄마가 "자니?"하고 수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미연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아들었다.
미래였다.
미래는 미연의 고등학교 동창으로서 아주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음악을 좋아했던 두 친구는 고교시절 방과 후면 음악실에 남아 미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함께 부르며 놀곤 했었다.
미래는 졸업후 성학과로 진학하였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바쁜 가수 생활에 쫓겨 연애할 틈도 없이 지내다 보니 미연이 학부형이 되는 동안 그녀는 노처녀가 되어있었다.
미래는 미연의 집에서 가까운 H대학 앞에 클럽을 새로 차렸다며 놀러오라고 했다.
미연은 그날 저녁 가보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미연이 찾아간 클럽의 이름은 친구 자신의 이름을 딴 "미래클럽"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가 제법 널찍하였고 앞쪽으로는 라이브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극장처럼 조명이 줄지어 무대를 향해 비추고 있었고 홀에는 둥근 테이블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어 디너쇼를 하는 레스토랑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피아노 연주자가 열중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미연이 무대 가까운 쪽으로 안내되어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미래가 나타나 반가운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미연아, 정말 오랫만이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연락도 못했어."
"나두 바빴는 걸."
"그래? 어떻게 지냈는데? 남편께선 잘 계셔?"
"나 이혼했어."
"뭐?"
미래는 깜짝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야?"
"응."
"어쩐지 너네 집에 전화가 안되더라니... 친정집에 전화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침 네가 있길래 그냥 다니러 간 줄 알았어. 너, 친정으로 쫓겨난거야?"
"그래, 쫓겨났다. 어쩔래?"
"에이, 내가 그동안 좀 안돌봐줬다고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미래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로부터 나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특유의 농담을 구사한다.
헌데 그녀의 농담은 상황에 안맞는 것 같아도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원채 후덕한 성격을 가지기도 했고, 목소리도 그런 성격을 보여주듯 굵고 푸근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나 좀 잘 돌봐주지 뭐했어?"하고 미연이 맞장구를 친다.
"그래, 이제라도 내 너를 돌봐줄테니 내게로 와. 자, 어떻게 해줄까?"
"나 일자리 구해줘."
"너 일자리 구하고 다녀?"
"응. 그런데 일할 데가 하나도 없어. 벌써 네달째야. 친정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데...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우리 엄마가 무슨 돈이 있다고 나 먹여 살리겠어? 오히려 내가 돈을 벌어다 드려야 할 판인데."
"어쩌니? 좀 더 알아봐. 운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설마 너같이 똑똑한 여자가 일할 데가 없겠니?"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더 이상은 알아보러 다니고 싶지도 않아.
있지...사람들이 나를 무슨 깨진 타일조각 대하듯 하더라. 자기네들은 반짝거리는 새 타일이라서 서로 예쁘게 아귀 맞춰놨는데, 어디서 더러운 조각이 들어와서 한자리 내놓으라는 거냐는 그런 투야. 나는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 데 사람들은 '너 왜 이혼했니?' 그런게 더 중요하구, '이혼한 여자 뭔가 문제있지' 그런 눈초리고...후후...어쩌면 일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받아줄 마음이 없나봐."
"저런..."
"나, 그래서 그냥 아무데서나 일단 일하려고 해. 반듯한 직장 얻어보겠다고 그러고 다니면서 그런 눈길 더이상 받기 싫어. 그냥 아무거나 할래. 되도록이면 사람들하고 안부딪히고 어디 쳐박혀서 하는 그런 거...근로직이든 노가다든 다 좋아."
미래는 미연의 얘기에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노가다? 니가 그런 일을 하겠다고? 어디 가서 그런 일을 한단 말야?"
"....여기서 일하면 안될까?"
"여기?"하는 미래의 얼굴이 이젠 아예 일그러졌다.
"아까 들어오다 보니까 종업원 구한다고 써있던데?"
"그건 웨이터랑 주방보조랑 그런 거 구하는 거야."
"주방?"
"그래, 주방 보조. 설겆이 하고 쓰레기 치우고 그런 거 하는거."
"나 그거 하면 안돼?"
미연은 실실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자꾸만 하였다.
"너 미쳤니? 농담이지?"
"아냐, 농담은? 나 여기서 일하게 해줘, 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얘가 왜 이래? 참내...그래, 해봐, 네가 그런 일이 얼마나 힘든 건지 몰라서 그러나 본데...함 해봐라 그럼."
"그래? 그럼 나 얼마나 줄건데?"
미연은 또 웃으면서 농담처럼 물어본다.
"아이, 너 나를 뭘로 보고 그래? 나 이래뵈도 밀리언셀러 가수야. 달라는대로 다 줄테니 걱정마."
"좋아 그럼 너만 믿는다."
"너 정말 주방에서 일하려구?"
미래는 눈을 껌뻑거리며 더이상 얘기가 이런식으로 나가서는 안되겠다 싶어 "너... 그냥 내가 몇달치 생활비 줄테니까 그동안 직장 더 알아봐, 그러지 말구."하고 제안을 했다.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미연을 보면서 미래는 '그동안 얘가 에지간히 상처받았나보다' 싶어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일단은 미연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그냥 나와서 일하는데, 그대신 그냥 몸만 왔다갔다 해. 일하지 말구, 응? 내가 월급 줄테니까."
"알았어, 고마와."
미연은 그 다음날 부터 미래클럽에 나와 일을 시작하였다.
미래가 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주겠다고 했지만 부득부득 주방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미래와 아무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공짜로 월급을 받아가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