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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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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사랑하세요


BY 이윤하 2005-11-17

출장에서 돌아온 수아는 전화녹음기를 켜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수십 통의 전화 중에 성호의 전화가 반이 넘었다.

수아는 성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무덤덤한 자신의 마음이 놀라웠다.

마음을 준 기간이 짧아서 일까 성호에 대한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날 자신이 울고불고 이성을 잃지만 않았어도 다시 친구처럼 지내도 상관없을 마음이었다.

무거운 숙제 하나를 해결한 듯 마음이 가벼웠다.

수아는 일이 재미있었고, 새롭게 알아가는 공부도 재미있었고, 가끔 인간적으로 변신하는 진영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빠르게 정리되는 감정이 좀 헤프다 싶긴 했지만 뒷통수를 친 성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성호처럼 이렇게 쉽게 잊혀지면 좋으련만 담아둔 시간이 너무 길어서지 '그'는 좀처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일본에 있을 '그'가 떠올랐다.

돌아온다는 소문만 무성한 채 정확한 소식은 수아에게 들어오지 않았다.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석 달 간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친구며 가족까지 못 만나 본 수아였다.

잦은 출장과 시험 준비로 수아의 몸은 따로 다이어트 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절되고 있었다.

진영은 언제나 냉소적이었지만 가끔 수아와 사적인 얘기를 나눌 정도까지는 되었다.

부산 송도 바닷가에서 있었던 대화에 대해서는 그 날 이후론 꺼내지 않았다.

 

시험은 일요일에 치뤄졌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응시하는 시험같았다.

수아가 배정받은 학교 말고도 몇 군데가 응시장이었고, 수아가 시험보는 곳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금융권에 있는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백 문제를 백 분 동안, 2교시에 걸쳐 치뤄졌다.

수아는 문제가 어려운 것을 떠나서 문제를 읽다가 지칠 판이었다.

두 번 검토할 시간도 없었다.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시험을 마치고 학교 정문을 나서는 데 누가 등을 친다.

"어머 이사님, 웬일이세요?"

"잘 봤어요?"

"모르겠어요...문제 읽다 지쳤어요. 문제 푸는 연습을 많이 할 걸 그랬나봐요."

"한 번에 붙어야지 두 번 공부는 힘들어서 못합니다."

"처음에야 모르고 봤지만 저도 두 번은 하기 싫은 걸요. 떨어지면 그냥 포기해 주세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다시는 책도 보기 싫었다.

"점심 먹으러 갑시다."

진영은 대답없이 길 가에 주차해 놓은 차를 향했다.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마시며 진영이 말을 꺼냈다.

"이수아씨."

"예, 이사님."

"부산 근무 가능합니까?"

"네? 출장 말씀이세요?"

"아니요, 부산에 사무실을 내기로 결정했어요. 무리입니까?"

사무실에 여직원도 아니고 이사의 수행비서로 채용된 수아였다.

이사가 간다면 당연히 따라가야 하겠지만 낯선 지방에서 그것도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가서 몇 년이 될 지도 모르는데 어떡해야 하는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거절하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이수아씨가 힘들다고 하면 그냥 서울에서 근무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나로서는 이제 업무파악이 되고 알아서 내 일을 도와주는 이수아씨가 가줬으면 하는 생각이지만 결정은 이수아씨가 하는 거니까 잘 생각하고 답을 줬으면 합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직장인이 개인적인 자잘한 문제로 회사의 사활이 걸린 문제에 지장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해 본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필요하다시면 가야겠지요. 언제 내려가는 건가요?"

"이번 달 말까지..."

아파트가 문제였다.

비워두고 가자니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이 못쓰게 된다는 말이 있어서 걱정이었다.

전세를 주려면 짐을 다 빼내야 하는데...혼자 사는 집이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라 짐이 많은 터였다.


"이수아씨가 가기로 한다면 근처 오피스텔에 계약을 할겁니다. 풀옵션 되어있는 곳이니 다른 가구나 전자제품은 따로 챙길 필요 없어요. 서울과 부산 일이 비슷하게 진행될 수도 있으니 아파트는 걱정하지 말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서울에 올라 올거니까."


수아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한 말이었다.

 

부산 전근을 앞두고 수아는 분주했다.

부모님을 찾아뵈었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났다.

냉장고 정리며 밀린 빨래, 밀린 고지서들 해결하기...

풀옵션 오피스텔이라  간단히 준비해서 떠난다 해도 싸야 할 짐이 만만치 않았다.

-30년 세월...느느니 나이와 짐 뿐이네...

한 동안 돌보지 못할 집 구석 구석을 살피며 꼭 긴 여행을 떠날 때 당부와 잔소리로 모자라 떠나서 까지 전화를 하던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거실 콘솔 위를 닦던 수아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찍었던 사진을 바라보았다.

볼살이 적당히 통통하고 눈빛이 또렷한 상큼한 커트머리의 수아가 있었다.

늘 보던 사진이라 수아는 아직도 자신의 모습이 사진의 모습과 같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수아의 얼굴은 볼살도 통통하지 않았고 커트머리도 아니었다.

다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또렷한 눈망울...그 눈에 새로운 사랑이 자리잡으려 한다는 것을 수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부산에서의 일은 생각했던 것 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뚜렷한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객의 방문과 상담이 하루에도 몇 건씩 진행되었다.

수아와 진영은 일주일에 한 두번은 서울과 다른 지역의 강의와 상담때문에 출장을 다녀야 했지만 한달 여간 주춤했던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나날이었다.

게다가 수아에게는 합격의 호재까지 겹쳤다.


강의를 마치면 수강생들의 소개로 한 두건씩 상담이 들어왔기 때문에 진영과 수아는 개인적인 일이나 생각 등을 할 겨를이 없었다.

화성에 있는 연수원이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에게 모처럼 주말의 여유가 찾아왔다.


"그동안 정신없이 일했는데 하루 푹 쉽시다."

수아는 혼자서 밀린 일들을 정리하며 오후를 맞았다.

그동안 다섯 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잠도 오지 않았다.

수아는 오랜만에 영화라도 볼 심산으로 오피스텔을 나섰다.

높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남포동에 도착해서야 수아는 자갈치 시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갈치 시장...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 한 달 전 부산에 머룰렀던 적이 있었다.

수아는 무작정 기차에 올라타 부산으로 내려왔다.

뭘 어쩌자는 심산은 아니었다.

지금 못보면 영영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수아를 이 곳까지 이끈 것이다.

보헤미안 같던 '그'...학교 다닐 때도 그 흔한 지각이나 규칙을 어기는 법인 없었던 수아에게 '그'의 분방한 스타일은 동경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의 자유로운 생각과 말 들...첫 눈에 반해버리지 않았다면 수아는 이토록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첫 눈에 빠져버린 사랑...운명이라 믿고 싶었던 사람...술기운에 용감해 진 수아가 선배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마치 삼촌한테 시집갈꺼라고 땡깡부리는 일곱살 조카를 바라보듯 장난스럽게 수아의 볼 살을 가볍게 쥐고는 흔들었던 사람...


동문회 첫 MT에서 수영을 못하던 수아는 남자 선배들의 장난으로 물에 던져졌고, 물공포증이 있던 수아는 얕은 수심에도 불구하고 허우적 대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허벅지까지 오지 않는 물에서 허우적 대는 수아를 단순히 미끄러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고 수아는 그 때 도착한 '그'의 도움으로 겨우 물에서 건져졌다.

공포스러웠던 잠시의 사고로 수아는 탈진했고 무릎에 그녀의 머리를 얹고 '그'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다.

겨우 눈을 뜬 수아 앞에 조금은 이국적인 느낌의 '그'의 얼굴이 있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 어깨에 닿을 듯 말듯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는 '그'를 본 순간, 물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깊은 심연속으로 쭈욱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보기 위해 학교를 다녔고, 동문회 모임을 나갔다.

군입대를 하기 전 날,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송별회에 나온 '그'를 보고 마음이 덜컹 내려앉아 화장실에서 한 없이 울었던 수아...그녀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던 '그'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잠시 부산에 머무른 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아는 무작정 기차에 올라 탄 것이다.

부산이라는 전화를 받은 '그'는 좀 놀란 표정으로 수아를 만나러 나왔다.

자유로운 잠시의 휴식을 방해받은 자의 약간은 귀찮은 표정...그는 수아를 데리고 자갈치 시장을 돌아다녔다.

"난 바다 보고 싶어요..."

"그럴 시간은 안되잖아. 바로 올라가야지."

철저하게 그녀의 다가섬을 막아섰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그'가 마시던 술을 홀짝 홀짝 마신 수아는 이내 눈물을 흘렸다.

"형...난 지금도 형을 사랑해요..."

예전 그 날처럼 장난스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고백을 들은 듯 '그'가 말했다.

"난 니 눈에 보이는 그대로...아직은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처지야. 그만 돌아가라."

수아는 그 날 '그'와 헤어진 후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두 번째 '그'에게 거절당한 그 날 밤, 보이는 약국마다 들어가 수면제를 사 모았다.

여관에서 이틀 치 방 값을 지불하고 수아는 약을 먹었다.

죽기 전에 누구에게도 발견되고 싶지 않았다.

 

이틀 후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수아는 여관 방에서 눈을 떴다.

서울로 올라 오는 기차에서 몇 번을 토하면서 깨어난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런 바보같은 짓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수아는 버스를 타고 태종대로 향했다.

예전에 가족과 함께 왔던 태종대는 해운대와는 다른 느낌의 바다였다.

한 도시에서 동해와 남해를 동시에 보는 느낌이랄까...가을 태종대는 운치가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이미지만 떠오를 뿐,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문득 '그'를 한 번도 눈앞에서 자세히 쳐다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수아...첫 눈에 반한 사람이었고...어려운 사람이었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며 태종대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아니 수아씨 아닙니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있었다. 진영의 친구들이었다.

-아니 아저씨들이 떼지어서 여기까지 웬일이시데?

"어머, 안녕하셨어요?"

"아니 청승맞게 왜 혼자 다닙니꺼. 진영이는 같이 안왔습니꺼?"

"네,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이라 바람쐬러 나왔어요."

"아 거 나쁜 넘이네. 그렇게 수아씨를 부려먹고 쉬는 날 부산 구경을 혼자 하게 한단 말이에요?"

"이사님도 쉬셔야지요. 휴일까지 상사가 직원을 챙길 수는 없잖아요."

"이러지 말고 우리랑 저녁 먹으러 가입시더. 우리 저녁 먹으러 안왔습니꺼. 진영이도 부르고."

"아니 저, 전 그냥 오늘 혼자 있고 싶은데..."

수아가 말꼬리를 흐리며 손사래를 쳤다.

"사람이 휴일에는 먹고 놀아야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아입니꺼. 잔말 말고 같이 가입시더."

 

진영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태종대에서 수아를 만났다는 녀석들의 전화였다. 오후 다섯시...

이 시간에 혼자 태종대를 걷다가 친구들 눈에 띄었을 수아를 생각하니 이유없는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청승은...그 녀석들은 왜 따라 나선거야.

수아의 거절못하는 성격을 몰랐을 진영이 아니지만 그래서 수아가 헤퍼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명랑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수아는 낯선 이 곳에서도 이외로 진영에게 먼저 식사를 하자거나, 어디를 구경가자는 등의 부탁을 하지 못했다.

겉으로만 활발해 보였지 잘 살펴보면 미련할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