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 - 6>
아련의 마음은 마치 안개 속을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도준의 오피스텔로 들어 오는 것도 망설이고 있고 따로 방을 얻는 것도 힘들어 했다. 도준은 그렇게 모호한 채로 아련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아련을 무조건 차에 태워 아련의 시골집으로 차를 향했던 것이다.
그 곳에서 도준을 본 아련의 어머니는 아무래도 자신을 우석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깍듯이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그러자 당황한 아련이 어머니 손을 잡아 끌듯이 나가더니 그간의 일을 나름대로 놀라시지 않게 설명해 드리는 것 같았다. 다시 도준 앞에 나타난 아련의 어머니는 뭔가 놀라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도준을 민망한 듯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얘를 다 이해해 줘요. 불쌍한 아이랍니다. 부모만 잘 만났으면 훨훨 날았을텐데... 어쨌든 그 동안의 일 다 잊고 거둬 주세요."
도준은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아련의 어머니 손길에 딸을 향한 걱정의 마음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 끼쳐 드릴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준은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이 한마디 만을 전해 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련은 시골에 다녀온 뒤로도 여전히 마음의 방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선주가 도준을 찾아와서 훗날 자신을 원망하지 않도록 아련과의 관계를 두 사람의 감정대로 진행 시키라는 말을 하고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련은 그 때 어느 정도 선주에게 가져 왔던 마음의 부담을 많이 던 것처럼 보였었다. 아련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에 도준의 머리 속에는 또 한 사람 우석의 존재가 떠 올랐다. 아련이 우석으로부터 마음을 정리했다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확실한 매듭을 아직 짓지 못했음이 숙제처럼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 숙제를 아련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 힘들 것으로 생각 되어 도준은 자신이 그 매듭을 대신 지어 줄 마음을 먹었다.
도준은 우석에게 해 줄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무엇보다 아련과의 결혼에 대한 말을 꺼내기가 참 난감하게 생각되었다. 우석이 아닌 자신이 아련과 결혼해야 하는 이유. 아니, 결혼해야 하는 이유라기보다는 사랑으로 맺어져야 하는 이유를 근사하게 납득이 가게끔 설명하고 싶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우석에게 해 줄 말을 일목요연하게 머리 속에 정리한 뒤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우석은 도준의 만나자는 요청에 바로 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약속 장소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은 때에 우석이 반가운 얼굴을 하며 나타났다. 도준은 굳게 먹었던 마음과는 달리 제법 긴장이 느껴져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려 보았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를 절감하면서...
"야, 정말 오랜만이다. 한 번 연락 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영 쉽질 않네. 그래. 어떻게 잘 지내고 있니?"
환한 얼굴로 반가움을 전하는 우석은 그러나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있었니? 안색은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맥주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 동안 도준은 자신이 준비해 온 말들을 떠 올려 보았지만 자꾸만 생각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는 거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것 같구나. 네가 그러니까 꼭 해야 할 이야기라는 것이 뭔 지 더더욱 궁금해지는 걸."
"원, 자식도 급하기는....천천히 얘기 하자."
그러나 우석보다 도준의 눈빛이 더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오피스텔을 다녀 간 뒤로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다."
"그래, 내가 먼저 널 불러서 이런 저런 설명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좀 바빴다. 몸도 마음도... 실은 뭐 특별한 것도 없고, 그저 그 날 얘기한 대로 아련이랑 좀 갈등이 있었을 뿐이야."
"그럼 지금은?"
도준의 눈길이 매우 집요해 졌지만 우석은 미처 알아 차리지를 못했다.
"뭐라고 설명할 것도 없어. 별 변화는 없거든...내 생각이 정리 되는 대로 다시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해야지. 좀 오래 끌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네 생각을 정리한다고? 무슨 생각이지?"
"내게도 잘못이 없진 않았거든. 어쨌든 곧 잘 될 거야. 그렇게 걱정해 주는 걸 보니 역시 넌 내 친구란 생각이 든다. 고맙다. 도준아."
우석의 말에 도준은 더 이상 자신이 할 말을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다급한 마음이 되었다.
"네 생각이란 게 뭔 지 그거나 얘기해 보라구!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하지 말고...정확하게, 확실하게 그렇게 말해 보라구!"
도준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만다.
"야! 깜짝 놀랬잖아. 그리고 아무리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해도 내 개인적인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거란 생각이 들지 않니? "
"더 이상은 네 문제만이 아니라서 하는 말이야. 이젠 내 문제이기도 하니까...그래서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고..."
"네 문제?'
"그래, 우리 결혼하기로 했다."
도준은 조목 조목 순서대로 할 말을 준비해 왔지만 자꾸 엉망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결론을 꺼내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말에 우석은 잠시 당황하는 빛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더니 이내 처음의 환한 낯빛으로 돌아 갔다.
"뭐? 결혼? 이야, 축하한다. 그래도 선주씨랑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야, 임마, 그 말 할려고 와 놓고선 왜 그렇게 쓸 데 없이 빙빙 돌리고 그랬니? 사람 민망하게 만들어 놓고...그래,날짜는 잡았니?"
우석은 정말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정말 기쁜 얼굴로 도준을 축하하고 있었다.
"우석아,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제대로 끝까지 들어 줘."
"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니?"
그렇게 물어 보는 우석의 마음에도 어느 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찾아 드는 것 같았다.
"선주씨랑 결혼 하는 게 아니다. 아련씨랑 결혼 하는 거야."
우석은 도준의 말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 구석에서 막연하게 느껴지던 불안감이 드디어 쿵 소리를 내며 자신을 마구 흔드는 것만 같았다.
"우석이, 너 조금 전에도 네 맘이 정리 되는 대로 아련씨와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을 했었지?"
"잠깐..." 우석은 도준의 말을 가로 막았다.
"나 지금 네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 오질 않거든... 우선 한 가지만 분명하게 말해 줘. 네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그래. 분명히 들어 둬. 나 김 도준이 이 아련씨랑 결혼한..."
도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석의 주먹이 도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 가게 주인이 달려 와서 두 사람을 제지하였다.
"아니, 점잖게 생기신 분들이 남의 영업장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당장 나가 주세요. 무슨 일인 진 모르지만 나가서 해결 하시라구요."
도준이 잠시 얼떨떨해져 있는 사이에 우석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도준은 그제서야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뒤로 하면서 쫒기듯 우석을 따라 나갔다.
"어디 가서 내 얘기 다 듣고 가라."
"아련일 만나야겠어!"
우석은 자르듯 단호한 어투이다.
"나랑 먼저 이야기 끝내고 난 뒤에 아련씰 만나라고..."
"너랑 할 이야긴 없다. "
"야! 신 우석! 먼저 네 자신이 아련씨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돌아 보란 말이야! 넌 그 동안 아련씨를 사랑했던 게 아니야. 네가 사랑한 건 네 자신일 뿐이었어. 넌 그걸 모르겠니?"
"네 맘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 난 못 참는다. 지금 네가 내겐 아주 몹쓸 인간으로 밖에 보이질 않으니까..."
"그래도 진실을 알아야 해. 넌 너 때문에 괴로와 하며 고통 속에 쓰러진 아련씨 조차 외면했어. 내가 아련씨 힘들어 한다는 전화를 했을 때 넌 바쁘단 핑계만 대고 걱정하지도 않았던 놈이야. 그 때 네가 말했지? 넌 주기만 하는 사랑같은 건 싫다고....포기 하고 싶다고...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일 뿐이지. 네 만족을 위한... 그 뿐만 아니잖아. 기본적으로 네 바탕에 깔려 있는 진실을 보라구! 제발 네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아련씨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네 말 잘 안 들린다고 그랬지? 그리고 네 멋대로 함부로 말 하지 말라고도 했지? 좋아. 하나만 물어 보자. 어쨌든 네가 왜 선주씨가 아닌 아련이랑 결혼한다는 건지...난 도무지 그 말이 이해되질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생긴 거니?"
"선주는 처음부터 결혼을 생각했던 여자가 아니었어. 아련씨랑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만... 이번에 네 일로 괴로워 하던 아련씨를 위로하다가 ... 그렇게 되었다. 물론 내 맘 속에서 아련씨를 향했던 마음은 처음부터 존재 했던 거고..."
"허 참, 네가 처음부터 아련일 좋아 했다구? 그래서 여태껏 노리고 있다가 잠깐의 틈을 타서 이렇게 된 거란 말이지? 너,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하지만 우린 아직 헤어지지도 않았어. 네 맘과 아련이 맘은 다를 거야. 네가 아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걸 거야. 난 지금 당장 아련일 만나서 오해를 풀어 주고 다시 예전으로 되돌릴 거다. 알았니? 우린 끝나지 않았다구!"
우석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려는 듯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신 우석, 이미 늦었어. 네가 말하는 예전으로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단 말이야."
그 순간 또 다시 우석의 몸이 움찔거리며 도준에게로 주먹을 향한다.하지만 우석의 주먹은 도준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우석이 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보길 바라겠어. 아련씨가 너랑 결혼하면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를...너는 머리로 사랑을 하지. 그리고 틀을 만들어 그 속에 가두려고 하지. 하지만 아련씬 그걸 힘들어 해. 아니, 힘들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벗어나고 싶어 하고 도망가고 싶어 해. 넌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 노력이 아련씨를 더 죄고 마는 걸.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노력하려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야. 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아련씨로 만족해야 했었어.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아야 했었다구. 넌 아직까지도 네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지, 아련씨 아픔 따윈 안중에도 없었잖아? 그렇게 아련씨는 팽개치고 있다가 네가 해결되면 그대로 따라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게 사랑이냐? 그러고서도 네 입에서 사랑을 지껄일 수 있는 거냐구!"
어느 새 도준의 얼굴은 점점 분노로 달아 오르고 있었다.
"그럼 한 달도 안 돼서 남의 여자 가로 채서 결혼까지 하려는 네 사랑이란 건 도대체 뭐지?"
"난 아련씨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나를 버릴 수 있어. 너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해. 내 사랑의 길은 아련씨에게로 향해 있지만 네 사랑의 길은 아마도 너 자신에게로 나 있을걸? 지금도 네가 나보다 아련씨를 더 행복하게 해 주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너에게 보낼 거야. 그리고 그 확신만 있었다면 억지로라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아련씨에 대한 사랑을 눌렀을 거야. 그게 내 사랑이야. 하지만 너에겐 그 확신이 없어. 그리고 분명히 밝혀 두지만 아련씨에 대한 사랑을 끄집어 낸 것도 너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그 다음이었어. 그 전에는 너와 아련씨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 난 내 눈 앞에 아련씨가 존재해 준다는 것 그 자체 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사람이야. 알겠니?"
그제서야 도준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우석은 그 말을 듣는 듯, 안 듣는 듯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한 곳 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