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 - 4>
인사시켜 주겠다던 아가씨는 언제 만나게 해 줄 것이냐며 궁금해 하시는 어머니께 버럭 화를 냈던 것이 내내 우석의 마음에 걸렸다. 때가 되면 어련히 그리 할 것인데 왜 자꾸 다그치시냐며 소리쳤던 것이다. 왜 이렇게 매사에 짜증이 나는지 자기 감정 하나 조절 못하는 자신이 우석은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아련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석은 무언가 해결 되지 못한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마냥 그렇게 하루하루가 힘들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문제를 알고 해답도 알았기 때문에 더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날 무엇이 우석을 그렇게까지 화나게 만들었는지 처음에는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그 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해 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 느껴졌다. 비록 빗나가기는 했을망정 우석이 아련을 향한 손찌검을 시도했던 것 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스스로에게 변명하자면 그 날, 자신을 휘감던 싸늘한 아련의 눈빛이 이상하게도 우석에게는 독기를 품은 것처럼 강렬하게 보였고 톡톡 쏘아 붙이는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롭게 곤두선 우석의 신경 줄을 있는 대로 자극하며 끊어질 듯 팽팽하게 만들었던 까닭이었다고 그렇게 항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나도 뜻 밖인 아련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우석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련을 향해 손을 들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련은 그런 우석을 피해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우석이 그 뒤를 따랐지만 이미 아련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저 격한 감정에 우발적으로 그런 제스처를 했을 뿐 진정으로 아련을 때릴 마음은 결코 없었노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세뇌시키기도 했었다. 물론 진실은 이미 우석의 가슴 속에 부끄러움으로 깊이 새겨진 뒤였지만....
우석은 그 날 이후로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아련과의 일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믿었던 때에 그렇게 화가 났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련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아껴 왔던 우석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아련을 기대하게 되었고 그만큼 노력해 주지 않는 아련에게 어느 새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석은 그런 감정을 겉으로는 표현 못한 채 속으로만 쌓아 갈 뿐이었다.
그런데 우석은 그렇게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 변화들을 반성하던 중 결정적인 자신의 잘못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날 아련에게 그렇게 분노했던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감히'라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늘 우석에게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련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 왔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아랫 사람을 포용해 주는 것 같은 그런 주종 관계로서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 날 결혼 허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도 의당 황송해 하고 감격해야 했을 아련을 기대했는데 감히 그런 모습과는 판이한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우석을 분노케 했던 것이었다. 우석은 그런 자신의 교만함이 부끄러워졌다. 정말로 치졸하고 못난 모습이었다는 뼈아픈 자성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런 모든 원인이 자신임을 알았으면서도 아련에 대한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아련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우석의 이성은 아련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지시했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석은 점점 자신이 싫어졌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며 반듯하게 살아 온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곤두박질치게 만든 것이 아련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에게로 향하여야 할 분노와 부끄러움의 화살을 자꾸만 아련에게로 돌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문제의 원인과 정확한 진단까지 마칠 수 있었던 우석도 결국은 그 모든 혼돈들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는 찾지 못한 채 처방전 하나 내 놓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아련을 저버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의지만큼은 너무도 확고했지만 그 전에 아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제대로 치료되어 그 애틋함이 다시 되살아 나야 한다는 것이 우석에겐 큰 부담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선주 - 6>
아련에게.
혈육처럼 끈끈한 정을 느끼며 마음을 주었던,
내 가장 좋아하던 너에게 왜 지금 이런 심정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어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 정말 사람들이 말하던 억장이 무너진다는 그 말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며칠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단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기도 했었지.
어느 생각의 굽이에서는 분노로 치가 떨리기도 했고 또 어느 굽이에서는 태산같던 미움이 어디론가 다 사그라 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단다.
따지고 보면 내가 무슨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길길이 날 뛸 이유도 없었던 것 같아.
어차피 오빠는 내게 기대를 가질만한 그 어떤 희망을 내 비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걸...
항상 어떤 경계선을 그어 넣고 나를 못 들어 오게 대해 왔을 뿐이었는걸.
그것을 알면서도 내가 오빠와는 상관없이 오빠를 버팀목 삼아 힘을 얻고 싶어 했고 위로를 받고 싶어 했을 뿐이었어.
그러니 오빠가 너에게 마음을 준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어쩜 처음부터 오빤 널 좋아 했던 것 같아. 아니, 분명히 그랬었어.
다만 우석씨 때문에 그 마음을 눌렀을 뿐이지.
그리고 나도 오빠에게 어떤 희망을 가졌던 건 아니야. 언제라도 오빠와 멀어질 마음의 연습도 미리 미리 하고 있었고...
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아니었어.
오빠가 다른 상대를 좋아 한다고 해도 다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 상대가 너라는 것만은 정말 받아 들이기가 힘이 들더라.
널 잃을 마음의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었는데 너무 졸지간에 이렇게 너를 보내게 되고 말았으니 정말 분하고 속상한 마음이다.
너를 이해해 보려고 많이 애썼어.
우석씨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 되어 한없이 힘들었을 때 갑자기 다가온 따뜻함에 네가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아련아.
난 아무리 노력해도 널 이해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수 백번 네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너라면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 밖에 들지를 않아.
왜냐하면 나는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것인 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넌 그 마음을 몰라 준 것 같아. 내 맘을 다 알았다면 절대 날 생각해서라도 그러질 않았겠지.
내게 넌 핏줄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어쩜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인데 내 아픔 같은 게 무슨 소용이겠니?
결국 난 가까운 사람들을 항상 떠나 보내야 하는 운명인가 봐. 그게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받아 들여야겠지.
참, 운명이라고 하니 생각난다.
오빠가 널 운명이라고 하더라.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거겠지. 어쩜 나로 인해 두 사람이 맺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두 사람의 사랑에 내가 그렇게 운명적으로 끼어 들어야 했나 보지.뭐...
널 이해 하진 못 해도 널 미워하진 않고 싶다.
어느 생에선가 네가 큰 덕을 내게 베풀었나? 왜 난 널 미워하지 못하는 거지?
그래도 두 사람의 행복까진 빌어 주고 싶지가 않아. 그러나 나 때문에 운명을 피하려고 하진 말기 바래. 두서가 없지? 그래도 그냥 읽어. 두서 없는 마음 그게 내 맘이니까...
**그리고 이 말은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나 다시 집으로 들어 오려고 해.
아버지가 원하셔.
너도 천천히 그렇게 준비 해.
네게 힘든 이야기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구나.**
선주는 아련에게 줄 편지를 벌써 수 십 통 째 이렇게 썼던 것 같다. 때론 상처를 줄 만한 글을, 때론 체념하는 마음으로 우울증 환자의 글같은 것을 써 내려 갔었다. 하지만 차마 보내지 못하고 계속 휴지통으로 처 넣고 말았다. 오늘도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면서 그 동안 끈질기게 괴롭혀 왔던 미련들을 편지와 함께 다 떠나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와 함께 도준과의 영글지 못한 추억도, 아련과의 솜털같은 따스한 애착도 그렇게 떠나 보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