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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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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5


BY 선물 2003-10-10

<도준 - 2>

도준이 우석의 전화를 받은 것은 선주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계속 되는 전화 벨 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샤워실에서 나와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화기를 들었던 도준은 심상치 않은 우석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수화기를 제대로 고쳐 들었다.
"도준아...만나자." 제법 취한 것 같은 우석의 음성은 왠지 흔들리고 있었다.
" 어디야?"
"아니, 내가 너한테 갈게. 지금 택시를 잡으면 얼마 걸리지 않아 도착 할거야."
"알았어. 내려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해서 와라."
여간해서는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우석이었다. 그래서 도준은 항상 흐트러지지 않고 절제된 모습으로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우석에게서 때로는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기도 했었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였지만 우석과는 달리 도준은 그런 분위기에 흠뻑 젖어 속내를 다 드러 내 놓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앴던 것이다.

 

도준은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칠흙같은 어둠만이 가득하였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진 도준은 긴 한숨을 내 쉬어 본다.
처음 선주를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만남이 오래도록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뜻 밖에 우석과 아련의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면서 네 사람이 어울릴 기회가 많아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도준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옆자리에는 늘 선주가 있었고 어느새 도준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주는 도준의 생일 날 네 사람이 도준의 오피스텔에서 생일 파티를 함께 한 이후로는 가끔씩 예고도 없이 밑반찬 같은 것을 해서 도준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젊은 남녀가 단 둘이서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는다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는 도준은 그녀를 항상 지하 커피 숍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자신의 그런 지나친 조심성이 어쩌면 선주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하였으나 뜻 밖에도 선주는 전혀 그런 내색을 내 비치지 않았고 웃는 얼굴로 도준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래도 미안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런 선주의 방문을 완곡하게 사양하는 뜻을 밝혔지만  오히려 그녀는 자신은 힘들지 않다면서 도준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만 이야기 하며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그런 따뜻하고 밝은 모습의 선주에게 도준도 어느 새 조금씩 이끌려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부터는 도준이 먼저 선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 초청에 마냥 기뻐하는 선주를 보면서 도준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미안함 때문에 선주에게 앞으로는 커피숍에서 전화하지 말고 집으로 직접 찾아 오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선주는 그 뒤로 도준을 자주 찾아 오게 되었다.

 

선주의 몸에서는 늘 바다가 그려지는 그런 향내가 났다. 그 향은 도준을 잠시 취하게도 하고 선주를 여인으로 느끼게끔 이끌기도 했다. 만약 도준이 그 이끌림대로 맥없이 따라가기만 했더라면 또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욕정 앞에서 자신의 뼈아픈 과거를 들여다 보게 된 도준은 멈추어 서야 할 곳을 정확히 지키게 되었고 스스로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수로라도 도준의 손길이 닿게 되면 팽팽하게 긴장하는 선주를 보면서 그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저녁 선주가 무심코 꺼낸 한 마디는 자꾸 도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었다. 도준은 자신이 개발한 야채치즈 라면을 맛있게 끓여 대접하겠다며 부지런히 부엌을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빠, 오빠는 아이들에게 참 좋은 아빠가 되어 줄거예요. 제 아이들도 오빠 같은 아빠를 만나게 되면 좋겠는데..."
잠시 말 끝을 흐리던 선주는 그 말에 스스로 놀랐는지 갑자기 일어서며 "아,아니에요. 별 뜻 없었는걸요. 그냥...오빠 모습이 너무 자상해 보여서...아이 참...내가 왜 그랬지?...어쩜 좋아!"라고 하면서 자신의 발개진 양 볼을 감싸쥐고 허둥거리는 것이었다.

선주의 가족관계와 아버지에 대한 선주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도준은 당혹해 하는 선주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도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선주의 볼만 살짝 꼬집고 말았다.
그리고 "우와! 그 말, 대단한 칭찬인걸! 고마워.그런데 말야, 나도 사실 선주가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싶을만큼 이쁠 때가 많았었어. 이 말도 대단한 칭찬이란 것 알지?" 하면서 도준은 선주의 무안함을 덜어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색함은 지워지지 않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라면을 먹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면발만 부지런히 입으로 옮길 뿐이었다.

 

도준은 선주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돌아 오는 길에 자신의 감정을 정리 하여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정말 오빠 같은 모습으로 여동생 대하듯 선주를 대했지만 가끔씩은 여인으로 보였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선주가 편안하게 느껴지면서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도준이 선주에 대해 갖고 있는 여러 감정 중에 결혼을 생각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음도 분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선주가 무심코 내 뱉았던 한마디는 이제 도준에게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도준은 저만치서 멈춰 선 택시의 불빛을 보고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역시 우석이 택시에서 내리고 있었다. 조금은 술에서 깨어난 듯 비틀거리지 않고 곧게 걸음을 내 딛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야,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거니? 정말 괜찮은거야? 약이라도 사 와야 하는 것 아닐까?"  도준은 애가 탔다. 하지만 걱정으로 애태우는 도준에게 우석은 그냥 빨리 들어 가서 쉬고 싶다는 말만 하였다. 도준의 방에 들어선  우석은 쇼파에 깊숙히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거야?"
"안 좋은 일? 음....그런 건 없어. 아니지, 오히려 좋은 일만 있었지. 부모님이 아련이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지."
"그런데... 지금 왜 이러는거야? 정신 차리고 제대로 말해."
"정신? 모르겠다. 도준아, 술이나 한 잔 줄래?"
"나, 집에 술 안 둔다는 것 너도 알잖아."
"음...맞다. 그랬지. 그럼 커피라도 한 잔 주라, 야, 대접이 너무 시원찮다. 이러면 나 그냥 간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너답지 않게 오늘 별스럽네. "
도준은 자꾸만 마음이 급하다. 그리고 많이 궁금해진다.
커피를 식혀 한 모금씩 마시던 우석의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을 도준은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우석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실은 오늘 아련이와 만나서 기쁨을 나누려고 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아련이는 별로 기뻐보이질 않았어. 근데 나중엔 나조차도 기쁘질 않고 화가 나는거야. 너도 잘 알지?  내가 아련이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내가 얼마나 마음을 주었는지....하지만 그것도 다 순간인 것 같더라. 사실 난 나름대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어. 늘 바른 생각으로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어. 사랑도 마찬가지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람만 보고 사랑하리라 생각했고 그 사랑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어. 그런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나 봐. 아련이는 아니었나 봐. 사랑을 위해 노력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 내게서 받으려고만 했지,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어떤 노력도 하질 않았던거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말이지. 그럼 그게 뭐야? 난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녔던거야? 그렇게 받기만 하는 사랑을 원한다면 그런 사랑 난 이 쯤에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정말 괴롭다..."


우석은 목이 메이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런 우석을 바라보는 도준의 마음은 착잡해진다. 그동안 도준이 보아 왔던 우석은 정말 한 치의 빈 틈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그런 완벽에 가까운 대단한 친구였다. 한 지방 대학의 학장으로 계시다가 퇴임하신 아버지와 유명 화랑을 경영하시는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다복하게 살아 온 우석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도 뛰어나게 잘 했지만 무엇보다 무난하고 올곧은 성격으로 친구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친구였었다. 다만 어떤 부족함이나 어려움도 모른 채 늘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만 자랐던 것이 가끔은 그를 답답한 모습으로 느껴지게 만들 때도 있기는 했다.

 

아련과의 사랑이 그래서 도준에게는 의외였었다.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는 그녀였지만 우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쉽게 그녀를 선택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석은 아무 거리낌없이 그녀를 선택했고 정말로 많은 차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다. 한결같은 우석의 사랑에 도준은 어떤 존경심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곁에서 지켜 보기만 해도 설레이고 행복해 보이던 사랑이 이제 갈등을 하고 생채기가 나려고 하는 것이다. 도준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을 몰라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 듬던 우석이 갑자기 일어선다.
"왜? 그냥 앉아 있지 그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아니, 됐어. 휴...미안하다. 도준아...이런 꼴 같지도 않은 모습이나 보이고 말이야." 우석은 깊이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넌 그게 늘 내 맘에 안 들었어.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뭔가 답답하면 서로 털어 놓고 아픔을 나누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넌 그런 모습 안 보이려고 너무 벽을 두껍게 쌓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겠어. 도무지 혼자 견딜 수가 없었어. 정말 너무 답답했거든...누구한테라도 하소연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는데 네가 생각 나더라. 그런데 도준아, 이런 것도 다 부질 없는 것 같아.오히려 더 답답해 지는 것만 같아. 미안하다. 마음이 좀 정리 되면 그 때 다시 만나 이야기 하자. 나... 간다."
우석은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들킨 것이 싫었는지 자신의 차로 바래다 주겠다는 도준을 막무가내로 뿌리치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휑하니 오피스텔을 빠져 나갔다. 도준은 그런 그의 뒷 모습을 보며 언제나처럼 평행선 같은 거리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