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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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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4


BY 선물 2003-10-05

<아련 - 2>



어느 날 우석이 책을 한 권 건네면서 읽기를 권하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꽤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에 관한 책이었다. 아련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시집이나 수필집, 아니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을 선물 받았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속내를 감추고 아련은 짐짓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꼭 읽어보겠다고만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두꺼운 책의 무게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석은 그런 아련의 마음은 채 읽지를 못하고 CD 한 장을 선물해도 듣기 어려운 고급 클래식 음반을 선택해서 선물하였다. 평소에는 자신을 푸근하게 이끌어 주고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게끔 배려하는 우석이었지만 자꾸만 그런 일로 자신을 당혹하게 만들다보니 아련은 짓눌리는 듯한 긴장감으로 마음이 굳어만 갔다.



언젠가부터는 우석이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아련에게 건네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마 받기가 부끄러워 한사코 거절하였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 달라는 우석의 설득에 더 이상은 사양하기가 힘들어져서 반 강제적으로 그 돈을 받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럴 때마다 마음은 늘 개운치를 않았다. 생각이 깊어 보이고 늘 신중한 우석의 모습이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언덕처럼 느껴져 든든하기도 하였으나 가끔씩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듯한 낯선 우석의 눈빛을 대할 때면 아련은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 지는 것이었다.



우석은 그 용돈으로 아련에게 발전적인 어떤 배움을 갖기를 원한다는 말도 종종 하였고 또 옷차림이나 다른 차림새에 대해서도 조금씩 관여하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자꾸 그렇게 아련을 변화시키려는 우석의 집요함은 아련을 지치게 만들었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가끔씩 주는 우석의 용돈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런 의외의 수입이 들어올 때면 공교롭게도 꼭 그만큼의 의외의 지출이 발생하게 되어 아련은 우석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못했고 그 때문인지 때로는 우석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까지 느끼게 되고 말았다.



아련은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들과 자신의 궁핍한 현실에 대한 부담감이 겹쳐지면서 아직은 우석과의 결혼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겨를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결혼허락을 받아 냈다는 들뜬 음성의 우석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우석 - 3>



생각보다 부모님의 허락이 쉽게 떨어졌다. 물론 아직 결정적인 최종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만나고 있는 아가씨를 일단은 한 번 보게 해 달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우석에게 반 허락이나 다름없이 받아 들여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 주시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정말 놓치기 아까운 자리라며 우석에게 한 번 만나 보기라도 하라고 신신당부 하신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련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감정을 말씀 드렸고 오히려 먼저 부모님께서 아련을 한 번이라도 만나 주실 것을 간청드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우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소식을 아련에게 전하기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너무나 뜻 밖에도 아련의 반응에서 기쁨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우석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어쩌면 아련이 아직 자신의 말 뜻을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직접 만나서 기쁨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바빠졌고 늦은 시각이기는 하였지만 곧바로 아련을 향해 출발하였다.



집 앞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우석을 만나러 나온 아련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석은 무작정 아련을 차에 태우고 자신이 가끔씩 들렀던 한 호텔의 칵테일 바로 차를 몰았다. 이 감격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호텔로비로 들어서던 우석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환한 샹들리에 불 빛 아래 서 있는 아련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그 날 따라 수척해 보였고 늘 입고 다니던 밤색 스커트는 후줄근하게 보였으며 보푸라기가 일어난 오렌지 색 스웨터는 화려한 호텔 장식들과 대비되어 더더욱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순간 우석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짜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아련의 감정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던 우석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짜증들이 그 순간 하나로 모여 한꺼번에 분출하듯 그렇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나서 우석은 아련을 차로 데리고 갔다.



사실 그동안 우석은 아련을 자신의 격에 맞는 그런 신부감이 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훗 날 결혼을 하게 되면 공부도 더 하게 해 주리라고 마음 먹고 그런 자극을 주기 위해 조금 힘들게 느껴질 만한 책이나 어려운 문화를 접하게 하는 등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아련은 그런 우석의 마음을 전혀 알아 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구태여 무리해서 아련을 바꾸게 하고 싶지는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만을 기대하며 그렇게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도 없게 되었다. 부모님 앞에 데리고 가기에는 아직도 너무 어리게만 보이고 볼품 없는 모습이었다. 착하고 예쁜 그런 모습만으로는 별로 내세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석이었기에 에티켓이나 문학 등의 강좌도 들어 두면 좋을 것이라고 언질해 주었는데 아련은 그 어느 것 하나 따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좀 더 세련되고 이지적인 모습으로 부모님께 선보이고자 했던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외면한 아련이 그 순간 너무도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