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기치 못한 이별>
결정할 일을 미루고 있는 마음의 찜찜함 처럼 난 그 쪽이 적어준 그의 미래의 일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이어리 한편에 꽂아둔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회사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업무의 양은 점점 늘어났고 솔직히 인정하기 싫지만 실무경험의 부족과 창의력의 회전이 둔한 경력부족한 아줌마 디자이너의 심적부담은 미리부터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었다.
정신없이 자재관련 업무에 미치기 직전까지 일속에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실장은 언제부터인가 꽤나 후하게 점수를 주고 있었다.
물론 그건 나의 실력의 향상에 기인한 건 아니었다.
솔희와 실장이 새로운 닭살커플로 연애(?)계에 등극함으로서 이루어진 일종의 측근세력에 대한 배려였다.
그나마 그것이 내 사회생활에 플러스를 주니 친구 잘 둔 덕에 그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일에 몰두할수록 또렸해지는 생각들.
며칠지나지 않으면 박이삭은 미국비행기를 탈테지.
그게 완전한 이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나라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일터였다.
하물며 미국에 가있는 그를 우연히 마주칠 일이란 건 확률 0%에 대한 문제였다.
명이와의 관계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단 날 연인처럼 대하던 그의 행동은 없어졌지만 그는 시간만 나면 고집스러운 아줌마를 어떻게던 웃겨주었다.
그와 다시 같이 일하게 되어서 오히려 맘이 편해진 나른한 오후에 사장은 얼굴이 벌개져서 허등거리며 사무실에 뛰어들어왔다.
"오늘 퇴근 나랑같이 하지들, 거래처에 일이 생겼어. 한일병원 영안실인데, 거 근조 화환좀 배달시키고."
누군가가 누가 일이 나건지를 물었다. 화환에 이름 새기기 위해서라면서...
"응, 거 있잖아. 연구소 사람인데. 참 연우씨, 소식들었나? 그 박박사 있지? 수석말이야. 그사람 사고나서 사망했다더군, 참 안됐네.동창이지? 연우씨는 나랑 같이 가지."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장은 직접 운전을 하며 끝도 없이 나에게 얘기를 해댔지만 나는 들을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코메디인지.
나이가 들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경조사라는 것에 결혼식과 돌 이런거 말고도 환갑이나 고희연 또 장례식에 참여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병원영안실은 발디딜 틈없이 붐볐다. 촉망받는 과학자의 죽음은 국가적인 손실이기라도 한거처럼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던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 곳에 있었다. 급보를 받고 미처 의상을 준비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병원에서는 검은 자켓과 하얀리본을 제공하고 있었다. 사장은 연구소장을 만나기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그의 사진이 보였다. 한 없이 젊디젊은 그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은 내가 잘 아는 사진이었다.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이었다.
그의 똑부러지는 얼굴위로 검은 리본이 양쪽으로 아주 똑같은 비율로 나뉘어져 드리워져 있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나는 어디로 가서 서야할지를 정하지 못다.
순간 그의 부모님이 뒤를 돌아보았다.
미쳐 피할 여유도 없이 나는 적나라하게 그의 부모님의 눈과 마주치고야 말았다.
그의 사진아래 국화 한송이를 놓치고 못하고 얼굴을 돌려 나가려 했다.
"연우, 왔구나."
소매부리를 붙잡은 건 이삭의 어머니였다.
누구보다 나와 그 쪽의 만남을 못마땅해 했던 분이었다. 꽤 오랜 시간만에 얘기치 못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그의 어머니는 돌아서는 나를 붙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이삭이 잘가라고 기도해 주고 가야지. 응?"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중요치 않았다.
단 한가지 지나간 나의 첫사랑에게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난 그가 사랑한다고 말한 그 순간 이래 이제는 어떤 것도 새로이 시작되지 못할 우리의 관계에서 그를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원하고 있었다.
기독교식으로 치뤄지는 추모예배가 준비되고 있었고 그의 아버님은 말을 잊은채 그저 서 계셨다.
꽃 한송이를 그의 영정아래 놓았다.
그의 젊은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우야, 사랑해.'
그의 목소리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박사가 아닌 나와 청춘의 열병을 앓았던 그 시절의 목소리로 귓가에 맴돌았다.
그제서야 나는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저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그 쪽을 다시 만나 생각지도 못하는 이별로 나에게 이러는 그가 미웠다. 차라리 바람으로만 그의 소식을 전해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삭아, 잘가. 너무 니가 일찍 가니까 난 할말이 없어, 미안해. 그래도 날 기억해줘서 고마웠어"
한동안 기도를 해주고 일어나 돌아서니 여자아이를 업은 상복을 입은 여자가 아이를 추스려 업으면서 있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은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아내일거였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나는 단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그녀에게는 죄인인 듯 했다.
여자의 본능은 거의 들어맞는다, 아마 그녀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연우야, 어떻게 왔어?"
어깨를 툭치는 건 또다른 동문이었다.
"어, 그래.."
동창 몇몇은 이미 장례준비며 여러가지를 돕느라 와있었다. 여자 동창들은 보이지 않았다.
동창회 부고는 인터넷에 올렸지만 내일이나 되어야 많은 사람들이 알게될 터였다.
"아, 너네 회사에서 이삭이네 연구소 공사했다며? 그래서 소식이 빨랐구나? 그래도 니가 올 줄은 몰랐다."
이미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부담없이 말을 해주었다.
"이삭이..어떻게 된거야?"
사장이 차안에서 그의 사고 경위를 얘기한 것 같기도 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하나의 해프닝 같기만 한 터였다.
학생회장이던넌 영철이가 가장 먼저 소식을 들었다고했다.
집으로 사고통고가 갔고 그 어머니가 가장친한 친구인 그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정말 어의없었다. 아무리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리 죽기엔 너무 젊지 않냐? 어머님이 전화가 왔더라. 채 전화를 끊기도 전에 쓰러지셔서 놀라서 집으로 쫓아갔지. 이삭이 부모님 차로 모시고 여기 병원에 왔는데 그 땐 이미 늦었어. 시신 확인하는데 정말 상상을 초월하더라구. 거의 만신창이가 됬더라.
사고는 고속도로에서 났는데 그 놈이 왜 경인고속도로를 달렸는지 이해가 안가? 연구소는 경기도
고 집은 강남인 녀석이 왜 인천까지 가려고 했는지.. 암튼 경찰말로는 트럭이 과적차량으로 목재실고 달리다가 안전장치가 풀려서 트럭 뒤를 타라가던 박박사 차위로 떨어지면서 그트럭이랑 충돌했는데 지붕위로 떨어진 목재가 뚥고 들어가 운전하던 이삭이를 덮치고 또 곧이어서 트럭 뒤로 부닺히면서 에어백도 소용없이 완전 아작이 났다나봐.. 그 녀석 그래도 동기중에 자랑이었는데 사는게 이런거냐?,
괴롭다."
영철이는 꺼이꺼이 대며 울었다.
다른 친구들도 한결같이 삶이 주는 허무함에 창창한 친구의 죽음앞에 망연자실이었다.
나는 더 이상 울 수도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나를 보러 인천으로 오는거였을 거였다. 그 날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내가 그리우면 내가 사는 인천으로 달려온다고 했었다.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믿고있었다.
그도 나도, 우리를 옭아 매었던건 젊은시절의 자존심과 열정일뿐이라고 생각했고, 각자의 삶의 행로가 더 이상 같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그도 빨리 깨달을 것이라고 믿고있었다.
그런 그가 날 보러 오던 길에 사고가 났던거라면..
아무리 다른 일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동기들 말처럼 그가 그 시간에 그 길을 갈리가 없었던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정말 경인고속도로에서 였어?"
한 동안 말이없던 내 물음에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영철이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럼 혹시, 이삭이 너 만나러..?"
모두들 형사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기억의 편린들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위에 놓였던 핸드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먼저갈게."
"연우야, 연우야. 야! 우연우. 그건 우연일거야. 연우야..."
다리가 휘청거려 뛸 수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병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나는 기억이 없었다.
세상은 어느 외국 팝가수(아마 레드핫 칠리 페퍼스의 제퍼?)의 뮤직 비디오처럼 360도 이상의 멑티버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부딫히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서라운드 시스템의 오디오처럼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했다.
'연우야.'
'우연우. 사랑해. 난 내 처음을 준 여자랑 결혼할거야.'
'아내는 영리한 여자지, 너 왜 이혼했니?'
'후회하니?'
' 그래 우리 헤어지자. 각자 갈길 가자구.'
' 나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줄래? 부모님 우리가 이해해야지 어떻게 하니?'
' 니가 그리워. 귀여운 연우 연우야...'
"나 너 미워할거야. 그렇게 가는게 어딨어? 박 이삭!! 가지마..가지마...."
숨을 더 이상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신차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