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한 동안 놀라우리만치 잊고 있었던 그가 회사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할 얘기가 있다는 전남편을 만나는건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차없이는 동네 수퍼도 안가던 그가 서류가방을 메고 꽃다발을 들고 수줍게 웃으면서 나를 보고 서있었다.
퇴근시간이라 건물안의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느닷없는 시헌의 모습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빠, 왠일이야? 연락도 없이. 회사사람들이 보잖아. 빨리 걸어."
"어? 난처하니? 미안해. 그럼 빨리 가자."
시동을 걸며 전남편의 얼굴을 보니 아직도 여자와 만나는게 처음인양 상기되어 있었다.
한 번은 더 만나서 그의 할 얘기를 들어야한다는 하지 못한 밀린 숙제를 하는 마음이었지만. 구지 티 낼 필요는 없을 것같았다.
"차 안가지고 왔나봐?"
"브레이크가 이상해서 정비소 들어갔어. 나 오늘 좀 데려다 줄거지?"
"그 정도야 뭐. 근데 밥은 먹었어? 꽃은 뭐야? 나 줄거야? 참... 같이 살 때도 몇 번 안 사오더니 참 우습네."
시헌은 이내 그말을 들고 슬그머니 뒷자리에 꽃다발을 내려놓는다.
꽃을 사오는 것까지는 헤어진 다음의 변한모습이고, 이내 풀죽어 하는 모습은 예전 나의 기억속의 전남편의 모습이다.
얼마전까지도 꽃을 받아보고싶었건만 내 입에선 장미가시같은 날카로운 억양이 나왔다.
죽을만큼 미워서 헤어졌다면 우리는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겠지만, 죽고싶을 만큼이나 다른 공간의 유리병속에서 살다가 세상으로 나온 우리는 그저 가끔 한 번씩 얼굴을 부딪혀도 싫지 않은 만큼의 뭐라 부르기 어려울 그런 감정이 있었다.
미리 반가워할 수는 없지만 마주치면 어색하지 않을 만큼의 인간적인 거리.
그게 오빠와 나의 안전거리였다.
"밥 안 먹었지?"
"그럼, 지금 일끝나고 나오는데 회사에서 밥먹고 나왔을까봐? 잘됬네. 집에 가서 밥 해먹기도 귀찮았는데 저녁먹을 친구가 생겨서... 참... 나 아버님 만났었어."
"응, 알고 있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널 찾아오시게 해서. 나도 몰랐던 일이었다."
곁눈질로 슬쩍 그를 봤다.
정말 미안해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나마저 미안해지는거 같았다.
"어머님은 괜찮으셔?"
"응, 다행히. 연우, 너 많이 변했다. 이젠 운전도 잘하네?"
"칫"
항상 운전할 때마다 교관처럼 난리를 부리던 그가 나의 운전에 대해서 처음으로 해 준 칭찬이었다, 이런 걸 보고 옛사람들이 격세지감이라 했던걸까?
그의 입에서 나의 운전솜씨에 대해 후하게 점수 매겨진다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무게가 없을 지라도 기분은 가벼워지는 말이었다.
그는 어느새 오랜만에 조수석만이 누리는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도시는 밤이 활동시간이다.
가로등사이로 어느나라보다도 발달된 각종 네온과 전광판 광고들이 화려한 밤은 기분마저 즐겁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오랜만에 운전대를 놓은 그는 말이 없었다.
"밥먹으러 간다."
"음, 뭐먹지?"
난 알고있다. 그는 또 수수께끼를 하고자 하는 것을...
그의 수수께끼는 아이들 방송 '수수깨끼 불루'처럼 몇가지의 힌트를 주고 맞칠 수 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그만의 방식의 수수깨끼였다.
그건 나 아니면 풀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답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며 온 교감신경을 동원하지 않는다거나 그를 만난지 얼마 안되는 사람은 절대 풀 수 없는 그의 식성과 취향을 완벽에 까깝게 이해하고 싶지 않으면 맞출 수 없다.
행여 틀린 답을 말해도 그는 틀렸다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오랫만에 솥뚜껑 삼겹살 먹으러 갈까?"
"..."
"그럼 파스타 먹으러 갈까?"
"..."
"날씨도 꾸물거리는데 복지리나 먹으러 갈까?"
"그럴까? 너 그거 먹고싶구나? 그래 그럼."
마음속에 이미 메뉴는 복지리로 정해져 있어도 내가 그걸 맞출 때까지는 결코 o인지x인지 알 수 없으며 내가 그 마음속을 맞춘다고 하여도 그건 그의 의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다고 그는 스스로 믿어버렸다.
그의 이런 속성을 모르는 사람은 뭘 먹자고 해도 웃는 낯을 하고 있는 그를 성격 좋다고들 했지만.
매일을 이런 일을 겪는 나에게는 지독히도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취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나는 그의 그런 일방적인 수수께끼는 더 이상 풀어낼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남자는 자존심을 지켜줘야하고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면 아내는 애교를 부리면서 가장의 의견을 세워줘야 집안이 잘된다는 그런 얘기를 지켜야 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시달릴 필요가 전혀 없는 나였다.
나는 이혼녀니까!
"아니야. 나 갑자기 장어구이 먹고싶어. 잘하는 집있거든. 저녁은 오빠가 사, 내가 집에까지 데려다 줄께 "
"그래, 난 뭐 아무래도 괜찮아."
사실 딱히 머릿속에 장어구이를 잘하는 집은 얼른 떠오르지 않앗지만 모처럼 기분전환도 할겸 강화로 빠지기로 했다.
국경일 전날인지라 고속도로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대략 강화로 접어들어 눈동자를 최대한 빨리 돌리면서 장어전문이라고 쓰여진 식당중에 가장 깨끗해 보이는 집으로 들어섰다.
강화는 많은 연인들이 들르는 곳이었다. 저녁의 식당은 꽤나 붐볐다.
퓨전스타일 재패니즈 레스토랑,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분위기지만 왠지 한 상 가득 리얼하게 보여지는 장어구이식당보다는 얘기하기가 한결 나을 듯했다.
음식점인데도 불구하고 '퓨전우나기'는 벽과 천장이 온통 검정색 잉크빛이었다.
테이블위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덕트가 그 큰 입을 벌리고 드리워져 있었고, 의자도 바닥도 온통 검정빛으로 칠해져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들의 유니폼도 역시 검은색 일색이어서 자칫 그들은 움직인다기 보다는 제자리에서 얼굴만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곧 불이 일고 갖은 양념으로 마사지를 한 장어들이 불위에 올려졌다.
하얀 그릇들이 서빙되어 오고 잠시 음식이 구어지는 동안 우리는 그 식당안을 생각없이 두리번거렸다.
"저기 아줌마 아저씨 보여? 왜 꼭 불륜인 사람은 저렇게 티가 날까?"
시헌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훓어봤다.
남자는 여자들처럼 슬쩍 보거나 안 본척하거나를 잘 못하는 유전자를 타고난 듯 너무도 티가 나게 쳐다봤다.
하지만 뭐 누구나가 쳐다볼 수 박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게. 아주 좋아 죽는다."
그들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서로 장어를 먹여주고 있었다.
대머리가 살짝 벗겨진 아저씨는 팔을 여자의 의자뒤로 두른후 열심히 장어를 받아먹으며 왼손으로는 부지런히 짧은 치마속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주름살을 애써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진한 아이라인과 긁어내면 2cm는 족히 긁어져 나올 듯한 메이크업, 골프셔츠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줌마는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남자쪽으로 가슴을 디밀고 있었다.
"정말 재밌는 세상이야, 저사람들도 젊었을 때는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거라고 생각했겠지? 하긴 남말도 아니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관계라고 볼까?"
"당연히 부부로 보지."
무덤덤한 얼굴로 그는 말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미 헤어진지가 일년이 넘어가는데 우리를 아직도 부부로 볼까 궁굼해졌다.
종업원이 왔을때 나는 기여이 질문을 던졌다.
"저기요, 우리 어떤 사이로 보여요?"
우리 둘을 바라보던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음 연인같은 부부, 맞나요?"
"그래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당연한 대답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장어는 어서빨리 먹어달라고 온몸을 불사르며 철판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음식점 특유의 고소한 소스에 찍어먹는 장어는 정말 기분좋았다.
종이로 만든 버티칼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돌아다니면서 버티칼을 살짝 열어놓았다.
평범하기만 했던 그 집의 창 밖으로는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현관과 주변의 강화유리 바닥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치 마이클 잭슨의 오래된 뮤직비디오에서 보는 것같이 어떤 일정한 순서에 의해서 바닥들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비는 음악이 되는 듯했다.
"아이디어좋은데? 나는 왜 저런 창의력이 없는 줄 몰라."
"일하는거 정말 좋아하는 거 같아. 생기있어보여, 피곤해보이기도 하고."
"그래? 그런거 같아. 내가 생각해도.. 있지, 지난번부터 하고 싶었던 얘기하려고 온 거 아니야? 나 지금 들을 기분됬는데"
그는 장어를 채 먹지 못하고 다시 그릇에 내려놓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내 싱긋 한번 웃었다.
"뭐 다른 거 아니고 생각많이 했는데 우리 다시 사귀면 안될까? 잠깐. 아무말하지 말고 내 말 먼저 들어줘. 당장 뭐 어떻게 하자는거 아니야. 니가 그랬지? 결혼을 결정했을 때보다 더 신중하게 이혼을 생각하자고 했던거 말이야.
그래 내가 너의 이혼 제의에 동의했던거 나도 그게 우리를 위한 최악의 조건중에 가장 옳은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어느정도 방황도 하고 현실을 인정하기까지 꽤 걸렸어.
너도 그럴거야. 지금 다시 합치자는건 아니고 그냥 처음에 우리가 만날 때처럼 한 번 다시 만나보는거 어떠니? 어차피 헤어졌는데 만나보고 다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오빠, 우리가 연애 몇 년 결혼 몇 년 다 지나오고 헤어졌는데 다시 사귄다고 해서 달라질까?
모르겠어. 우린 또 외로워질꺼야. 뭐 안 외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 오빠도 잘 알잖아, 우리는 참고 살았다면 계속 살았을 거야, 보편적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크게 벗어날 것도 크게 부족한 것도 없었다고 회상할 수 있겠지만 후...
당신과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난 더 마음이 아팠어, 그건 당신에 대한 미안함, 나자신에 데한 관대함.
뭐 그런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솔직히 또 다시 내가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살고 싶지는 않을 거같아.
심지어 과거에 결혼했던 사람과 함께라면 새로운 결혼생활을 기대하는건 더 어렵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연애를 한다고 해도 별반 새로울 것은 없을거 같지 않아?"
"여보, 아니 연우야. 네가 바라는 거 어떤 거니? 넌 어떤게 새로운 거니? 결국 너나 나나 누군가를 만나서 새로움을 느낀다면 그건 다른 새로운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일뿐 아닐까? 아무리 너랑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도 나처럼 밥먹고 화장실가고, 면도하고, 그런 기본적인 건 사람이라면 다 같지 않을까? 너 내가 너 사랑하는거 싫은거니?"
사랑을 받는 것은 싫지 않을 뿐 아니라 기분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주는 대상이 더 이상 내인생을 함께 가기로 한 사람이 아닐 때는 그 사랑이라는 단어자체가 불안정한 단어가 되어 버리는 걸 그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우리는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행복한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을 거쳐, 결혼을 하루하루 이어나가다 결국 차가운 얼음같은 '단절'이라는 외로움에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 벽을 깨고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그 간 잡고 있었던 손을 놓은채 각자의 새로운 길로 단지 한 걸음을 떼고는 그는 나보고 자꾸 '뒤를 돌아봐라'얘기한다.
그저 한 걸음만 다시 오면 돤다고, 다시 손을 잡지 않더라고 마주보고 있자고 하는 것이다.
때로 다시 그 길을 간다면...하고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오래된 소장품 비디오 처럼 그 일은 선뜻 일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영화처럼 끝내 버리지는 않아도 다시 보지는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