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휴일>
공사의 성공으로 우리 디자인팀에겐 2박 3일의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사장의 경영철학은 그렇게 나름대로 직원들을 밀고 당기는데 선수였다.
모처럼 늘어지게 늦잠이나 자려고 했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한 두 시간이나 일찍 눈이 떠지고 말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이 무리였다.
잠옷바람으로 진한 커피를 마시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 쓸쓸한 기분도 없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아침이 더 무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전 8시 23분 시계의 흔들림을 보고 있었는데 우당탕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방문은 날 기분 나쁘게 했다. 아무 기척없이 그저 찾아온 사람이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작 급한 일이면 메모를 남기거나 더 문을 두드릴 것이다.
두들기고 초인종을 누르더니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단순한 선전방문원은 아닐거 같아 보안경에 눈을 댔다.
명이었다.
놀란 눈으로 문을 연 나를 보고 놀라는 건 그였다.
"연우씨, 아직도 잠옷바람이네요?"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일이라 놀라 운동복을 걸쳐입고 나왔다.
그는 여전히 복도에 서있었다. 하지만 명의 외모도 가히 말끔하지는 않아보였다.
"나 지금 오랜만에 목욕탕 가려고요. 세수도 면도도 안한 거 첨 봤죠? 사우나 좀 하고 때 좀밀면 한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 그 정도면 화장하고 나갈 준비할 시간되죠? 설마 약속있는건 아니죠? 그럼 이따 예쁘게 몸단장하고 다시 올게요."
"저기, 윤 명씨, 윤 명씨, 저기요, 야~~윤 명!!"
목이 터져라 그를 불렀지만 그는 거꾸로 쓴 야구모자 위로 삐죽이 손을 흔들고는 사라져 버렸다.
어의 없게도 난 꼼짝없이 그가 짜놓은 각본을 이행해야하는 처지가 되버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러한 무례한 행동조차 짜증이 안났다.
막상 그와 어디를 갈지 그의 계획이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외출준비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였다.
편하게 입고 가자니 너무 아줌마같고, 그렇다고 정장을 하는거 더 이상한 일이고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면도와 목욕으로 뽀얗게 변한 그의 얼굴이 더 해맑았다.
명은 루스핏되는 청바지 차림에 푸른색의 라인이 들어간 니트셔츠를 몸에 꼭 맞게 입고 있었다.
명은 내가 아직도 운동복 차림인걸 보고 아침과 똑같이 반문했다.
"연우씨, 아직도 운동복 바람이네요?"
"도대체 뭐에요? 전화도 없이 휴일에 불쑥 찾아와서는 어디를 간다는 말도 없이 이렇게 신경쓰이게 하면 어떻해요? 그리고 나 다시는 둘이서 안 만난다고 했던거 잊어 버릴 만큼 머리 나빠요?"
"왜그래요? 화났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약속은 깨라고 있는거 아닌가? 농담이구요, 날씨도 좋은데 놀러가자구요. 여자들은 나이들수록 골다공증 같은 거 조심해야 한다면서요? 집에만있으면 뼈가 약해진데요, 그래서 큰 맘먹고 한 번 바깥바람 쐬이게 해드릴려고 영계선배가 왔는데 그래도 화만 내고 있을거에요?
빨리 내려와요. 알았죠? 썬크릠 바르는거 잊지 말구요, 오늘 햇살이 죽여요."
대답을 듣지 않는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명은 아침부터 언제준비했는지 샌드위치와 보온병에 커피와 바구니 한가득 과일을 뒷자리에 준비해 놓고 언제 다운 받아서 cd를 구웠는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계속 틀어댔다.
"음악 듣는 취향이 나랑 비슷한가봐요? 아니면 늙수그레한 아줌마를 위한 배려인가요? 다운받느라 고생좀 했겠네."
"또 나이 운운하는 거에요? 재미없어요, 차라리 샌드위치 맛이 어떤지나 말해줘요? 맛있어요? 나 아침에 그거 만드느라 꽤 고생했는데"
명이 만든 튜나 샌드위치는 내 입맛에 꼭 맞았다.
내가 먹은 것 중 두 번째로 맛있는 튜나 샌드위치였다.
제일로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는 사람은 전남편이다.
시헌의 레시피는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허니머스터드를 호밀빵에 바르고 기름을 뺀 참치에 레몬후추와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힘줄을 제거한 샐러리를 잘 게 다진후 완전히 익힌 계란을 다져서 로우팻 마요네즈와 버무린후 차게 놔둔 양상치와 슬라이스한 토마토를 키운후 삼각형으로 자른 것이었다.
명은 계란 대신에 마카로니를, 샐러리 대신에 오이피클을 넣었느데 이것도 참맛있었다.
입맛은 이리도 적응을 잘 하나보다.
"어디가요?"
"몰라도 되요. 나 지금 연우씨 납치 하는건데 안 무서워요?"
"왜그래요? 사람 싱겁게."
어색해진 그와 나는 잠깐 아무말 없이 흘러나오는 노래만 듣고 있었다.
"그냥, 이런 말 하니까 너무 이상하다, 그냥 오늘은 나 하는데로 같이 있어줄 수 있죠? 절대 연우씨가 기분 나빠할 일은 안할거에요. 나 믿죠?"
"아뇨, 내가 윤 명씨를 어떻게 믿어요? 어디 가는건지 말하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계속 말안하고 이렇게 달리기만 하면 기분이 점점 나빠질 것 같아요."
차가 요동을 치며 갓길에 급정거했다.
"미쳤어요? 지금?"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잡은 난 소리쳤다.
윤 명은 그저 핸들을 붙잡고 앞만 보고 있었다.
웃음이 거두어진 그의 얼굴을 보자 괜시리 마음이 불편해졌다.
모처럼만의 휴가때 이렇게 스릴이 지나친 모험이 재미있을 만큼 어리지 않아서 인지 제대로 무 자르듯 그의 마음을 떨구지 못한 나의 우유부단함에 점점 열이 나고 있을 즈음 명이는 나즈막히 한 숨을 쉬었다.
"내가 경솔했어요. 미리 연우씨 마음을 물어봤어야 되는 건데, 그냥 내 식대로 한거같안요. 미안해요. 내키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바려다 줄게요. 그럼 되겠어요?"
"윤 명씨 정말 사람 가지가지로 열받게 하네요? 지금 모하는 거에요? 나 같이 혼자인 여자한테는 이렇게 막 대해도 되나요? 아니 다 내 책임이네요. 내가 행실이 바르지 못한가봐요. 이렇게 아무나 날 함부러 대할 여유도 주고.. "
이를 악물고 말하는 나를 쳐다보던 명은 예의 원래의 그의 미소로 돌아가서 낄길거렸다.
난데 없는 그의 손이 나의 얼굴로 다가와 나의 입술을 만졌다.
순간 움찔하는 나에게 돌아온 한마디는
"아이참, 웃지 않을 수가 없네. 뭐에요,?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어요? 상추가 이빨에 낀 것도 몰라요?"
거울을 내려서 보니 대분짝만한 상추조각이 가운데 이빨에 떡하니 붙어있었다.
정말 망신스러운 순간이지만 그래도 그대로 물러날 수 는 없었다.
"대답이나 해요."
"알았어요? 말할게요. 나 지금 강원도 가요. 영월. 가봤어요? 거기가면 좋은 데 있어요. 마음이 편안해 지는... 요즘 연우씨 많이 복잡해 보여서요. 나도 가본지 꽤 됬구요. 그래서 같이 가고 싶었는데 미리 말하고 가자고 하면 안갈 게 뻔하고, 그래서 불쑥 찾아갔던 거에요. 근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요."
"거길 지금간다고요? 하루가 꼬박걸릴텐데요?"
"당연하죠? 하루가 뭐에요. 쉬엄쉬엄 휴게소 들러서 감자랑 우동이랑 오징어랑 사먹고, 운전하다 힘들면 좀 쉬다가 가면 밤이나 되야 갈걸요? 아니 연우씨도 웃긴다.
그럼 모처럼 회사에서 유급휴가 줬는데 2박 3일동안 집에만 있다가 출근할거였어요? 와, 그러고 심심하지도 않아요? 오늘 갔다가 내일 올거에요. 밤에 도착한다는 건 농담이고요.
저녁전에 도착할 수 있어요. 하루 쉬고 출근. 딱 아니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차 돌려요. 빨리. 정말 불쾌하네. 내가 왜 윤 명씨랑 같이 하루를 강원도에서 지낼거라고 생각했어요? 미쳤나봐.
차 돌리지도 말아여, 혼자서 실컷 갔다가 오라구요."
앞뒤를 가릴 기분이 아니었다.
차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나는 걸었다. 어의가 없었다. 황당했다. 처참했다.
난 나름대로 이혼녀라는 낙인이 쉬운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남보다 더 단정하게 생활했다.
그 날 한 번 맥주를 마셨다고 해서 이 자식 나를 이렇게 막 대해서 된다고 생각했던가 싶어 억울했다.
혼자인 여자는 사람도 아닌가. 이렇게 남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아도 된다고 생각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운동화 소리가 먼지와 함께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명이는 숨을 몰아쉬고는 길을 가로막고서서 아까보다 훨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 연우씨, 한 가지만 물어볼께요. 지금 이런 행동은 나를 남자로 본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어요?"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야 ! 너 지금 사람 희롱하니? 저리 비켜, 나쁜 놈"
채 돌아서기도 전에 그가 내 팔을 낚아챘다.
"나랑 어디 가는게 그렇게 겁나요? 왜요? 내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서요? 나한테 그 날 그랬잖아요. 나 벗은 거 봐도 남자로 안보인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까지 화를 내죠? 이러는거 내가 남자로 느껴져서인가요?
아님 그놈의 말끝마다 같다부치는 이혼녀의 자격지심이에요? 그렇다면 보내줄게요.
앞으로는 회사동료가 아니라 남자로 연우씨 앞에 설 수 있다는게 되니까 나로서도 더 좋다구요."
오기가 생겼다.
내가 그를 그저 동료로만 생각한다는 걸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여태까지 나에게 보여준 그의 태도로 보아 날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의 무서운 맛을 보여줄테다.
"오케이. 좋아요. 어디 가볼데 까지 갑시다.가자구요, 가!!"
내 발로 박차고 나왔던 차에 다시 내발로 들어가 앉았다.
그도 곧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에서 내린 그는 수퍼안으로 사라졌다.
돌아서는 그는 입에 답배를 물고는 계단에 걸터앉아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아무리 스트레스가 많고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전혀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 최소한 내가 봐온 일년이 다되는 시간동안 그는 그랬다.
갑자기 그를 내가 너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사람좋기만 하던 명도 담배를 피우는구나...
뭐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낯설은 그의 모습에 광분했던 내 분노도 무겁게 내려 앉았다.
한 참을 그러던 그가 차로 돌아왔을 때 '훅'하고 연기냄새가 났다. 답답한 공기 때문에 나는 창을 열고 백미러만 바라보고 있었다.
"냄새나서 그러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요, 이런게 징크슨가봐요. 영월에 갈때는 꼭 담배 피울일이 생겨요."
"원래 담배피워요?"
"아니요. 예전에 영월에 갈 때 한 번, 몇 년지나 지금 한 번. 이번이 두 번째네요. 담배 피우는 것도 자전거랑 똑같은 가봐요. 한 번 배우면 안 잊혀지는거 뭐 그런거 있잖아요.
담배 피우는 남자 싫어하죠?"
"싫어한다기보다..., 기호품이니까요...전남편도 담배를 피웠어요."
"그래요?"
명은 운전을 잘했다.
채 밤이 되기전에 우리는 영월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던 그는 오늘은 그곳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아침에 일찍 가요. 그게 더 좋아요.배 안고파요?"
명은 그 곳을 다 알고있는 듯 했다.
조용한 마을의 식당을 찾아 들어가 앉았다. 여행을 온 듯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명이 아니야? 아구 이젠 어른이 다됐네"
"안녕하셨어요? 여전하시네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그럼그럼. 여행왔어? 다음에 올 땐 꼭 장가가서 오겠다더니, 아이구 반가워라, 색시 어서와요."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대하듯 내 손을 잡고 어쩔 쭐 몰라하셨다.
난색을 보이는 나에게 명이는 눈을 찡긋할뿐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은채 그저 '네네'만 하고 서있었다.
불편한 마음에서였을까?
난 푸짐하게 차려진 시골밥상을 놓고도 영 손이 가지 않았다.
명도 구지 권하지 않고 열심히 밥만 먹어댔다.
식사를 끝내고도 명은 한참이나 그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고서야 자리를 떳다.
밖으로 나온 그는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별이나 실컷봐요. 우리가 사는덴 이런 별들 보기 어렵잖아요."
"여기 잘 알아요?"
"대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내내 여기 있었어요. 이 식당에서 밥도 많이 얻어먹었죠. 그 때 방학이 끝나고 집으로 가면서 아주머니한테 나중에 여기 올 때는 꼭 색시랑 올거라고 그랬거든요. 아마 그 말을 기억하고 계셨나봐요. 아무말 안해줘서 고마워요."
"왜 여기 그렇게 오래 있었어요?"
"얘기 하자면 길어요.. 우습네요. 그래도 연우씨랑 여길 오긴 왔네요, 꼭 잡아먹을 듯이 그러더니 이제 기분 많이 풀렸어요?"
"아뇨. 그냥 에너지 낭비하기가 싫어서요. 다음은 뭐죠?"
"에너지 낭비라,, 그럼 에너지 아끼는 차원에서 빨리 잠이나 자야겠네요."
명은 산장을 예약해 놓았다.
이미 여름도 지나고 단풍놀이할 시즌도 아니고 영월은 그리 붐비는 관광지도 아니기에 산장은 비어있었다.
막상 잔뜩 으름장을 놓고 여기까지 왔지만 낯선 장소에 그와 함께 있는다는게 영 어색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정신만 똑바로차리면 된다는 말을 나즈막히 내뱉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장으로 들어갔다.
명은 차 트렁크에서 한 짐가득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자, 옷벗어요?"
"뭐요?"
"정말 자꾸 왜그래요? 괜히 딴 마음들게.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나 싫다는 여자한테 에너지 낭비하느 사람아니에요. 난 연우씨랑 여기 올려고 혼자서 꽤나 준비했어요. 어차피 납치아닌 납치할거였으니까 미리 연우씨 것도 가져온거에요. 청바지 불편하잖아요. 이거 갈아입으고요, 이층에 방있어요."
그가 내민 봉투를 낙아채고 쿵쾅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모자가 달린 핑크색 운동복, 따뜻한 면 양말 2켤레, 베이비 로션한병, 인디케이터가 달린 오랄비칫솔하나, 치약, 미용비누, 헤어브러시,목욕용 수건, 세수수건. 머릿결을 보호하는 투인원샴푸, 여성용 메리아스와 귀여운 테디베어 팬티까지.. 펼쳐놓고 화를 내야할지, 웃어야 할지 난감했다.
막상 옷까지 갈아입고 보니 편하긴 편했다. 아래층에서는 커피냄새가 올라왔다.
"어? 벌써 갈아입었어요? 와 내가 골랐지만 진짜 운동복 이쁘다. 맘에 들어요?"
간이 식탁에는 과일과 커피가 촛불과 함께 놓여져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뭐하다니요. 연우씨 안보여요? 이제 그만 화내요. 그냥 차나 마시자구요."
도대체 이 남자의 마음은 어떤걸까?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는 시간동안 그는 나를 생각했을거고 전에 말했던 것처럼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도 나도 힘들거였다.
이젠 그의 말을 들어봐야할 것 같았다.
"명씨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아름다운 청춘을 밑빠진 독에 붓는 거 같은 일이라구요."
그도 머그컵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말없는 시간이 지나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생각 많이 했어요. 내일 여기서 돌아가면...연우씨 그만 좋아할거에요. 예전에 여기 왔을때도 난 한가지 결심을 했었죠. 그리고 그 결심을 계속 지키고 있어요. 아, 쑥스럽다. 있잖아요. 영월은 나한테 그런 곳이에요.
마음을 괴롭게하는 일들을 보내 버리는 그런 곳 , 누구나 계기가 필요하잖아요.
새로운 마음이 되려면은요. 이번에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면 말하기가 좀 그러지만 아무래도 연우씨 사랑하게 될거같아서요. 아직 좋아하는 마음일 때 여기서 끝내려구요.
오해는 말아요, 연우씨 나이나 상황 때문이 그래서가 아니에요.
전에 말한 것처럼 부모님도 절 이기시질 못해요. 단 한 사람 연우씨가 힘들어 할거같아서요. 더욱이 날 원하지도 않고요. 그리고 날 남자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니까.
모르겠어요. 만약 연우씨를 사랑하게 되면 나도 다른 남자들처럼 연우씨와 결혼을 생각하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연우씨가 더 많이 괴로울거 같아요.나 아직은 별로겠지만 알고보면 좋은 남자거든요. 근데요 막상 이제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만 좋아하려고 생각하니까 연우씨한테 매일 장난만치고 정작 내 진짜 마음은 보여준 적
이 없는거 같았어요.
한 번은 꼭 내가 정말 연우씨 많이 좋아한거 말해주고싶어서... 본의 아니게 연우씨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지만 . 에이 말하니까 더 이상한거 같아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명이란 사람은 참 투명한 사람같았다.
그런 그가 마치 그림 속의 그림자 같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가슴앓이가 느껴졌다.
"있잖아요. 그렇게 결심하고 이런 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말 만하면 잘 끝날 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중이에요. 근데요.. 아 이렇게 떨리지? 여기 있잖아요. 여기요."
그는 명치 근처의 가슴을 동그랗게 주먹을 쥔 손으로 쾅쾅 두드렸다.
"이상하게 여기가요, 롤러코스터 타봤죠? 아니다, 자이로 드롭이라고 하나? 왜 의자에 앉아서 높은데 올라가서는 순식간에 떨어지는거요.
그거 탔을 때 처럼 철렁하고 내려앉는거 알아요. 지금도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꼭 여기에 서늘한 해파리가 지나가는 것처럼요. 쓰라립고 짜릿하고 많이 아파요. 너무 많이 아파요. 바보 같이요."
그는 의자에서 벌떡일어나 창문을 열어졌혔다.
"아, 공기좋다. 여기 공기 좋지요?"
밤이라서 그랬을까??
한 사람에게 이런 고백을 듣는 건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일 때 보다 더 비참했다.
차라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달려가 나를 붙잡으라고, 나와 함께 현실의 벽을 뛰어넘자고, 남자가 여자가 될 수도 있고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비행기 폭격이 나는 우리의 만남보다도 더 이해하기 어렵고 끔찍한 일들도 많은데 사랑이 있는 우리가 뭘 뭣하느냐고 소리라도 쳐볼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맞아요, 누군가를 많이 생각하다보면 그 사람이랑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을때 너무 아파요. 똑같은 건 아니지만 나도 그렇게 가슴이 생인손을 앓는 것처럼 어떻게 해도 다 아픈 때가 있었죠. 실은 나도 잘모르겠어요.
그런 가슴앓이도 항상 똑같이 아프지는 않아요. 시간이 약이라는 거 처럼 .
하긴 그 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잊혀지지는 않더라도 처음처럼 날 지배하지는 못하는 거 같아요.
명씨가 내린 선택이 아마 10년 후엔 아니 그 보다 훨씬 빨리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겠죠..
그래도 가끔은 영월에 올 때나 아님 삶이 지쳐 외로울 때 한 번쯤 생각나는 여자중에 나란 사람도 있을 수 있을지 몰라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명은 창문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누른채 앞뒤로 몸을 흔들며 도리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한 없이 애처러웠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나도 이 순간 만큼은 그에게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알기에 아주 오랫동안 그 의자만이 내 자리에 전부인 것처럼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혼녀가 멋진 새로운 사랑을 찾기란 미국에서 보신탕집을 찾는 것 만큼 드문일이었다.
세상은 온통 열혈 페미니스트나 능력있는 싱글들을 최고의 럭셔리 펄슨으로 숭배했지만 사실 혼자된다는게 광고속 여자들처럼 누구나 넉넉한 경제력과 미끈한 미모와 배경, 실력
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기에 소수의 왕족이혼녀를 제외한다면 나같은 평범한 이혼녀의 삶은 더우기 새로운 사랑은 되려 더 초라하기 일쑤였다.
그런 내게 명이 같은 남자가 있다는건 행운일지 몰랐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이 남자는 내 마지막 양심의 일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가 오늘 그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면...
과거의 일들은 추억이라 할 수 있지만 거기엔 반드시 잊고싶은 기억과 간직하고 싶은 순간으로 나뉘는건 아닐까?
나의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은 단편소설이나 짧은 시처럼 너무나 아쉬움을 남긴채 기억되었지만 오히려 기억조차 하기 싫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혹은 눈을 질끈 감아도 잔상이 남는 거였다.
그런 그에게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라고 할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아이. 이런 분위기 너무 무겁다. 그쵸? 내일이면 다시 돌아가야하는데 시간이 아까워요. 그런 무거운 표정 짓지 말아요. 정말 이혼한 여자같아요. 우리 좀 걸을까요?"
그는 포라포리스 담요들 들고는 나와 그의 어깨에 같이 둘렀다.
"따뜻하죠? 나 이렇게 담요 둘둘 말고 다니는거 좋아해요. 그거 알아요? 나 같은 사람이 바람둥이 기질많은 거? 아주 나이스하잖아요, 연우씨한테 많이 보채지도 않고."
"정말 그렇네요. 같이 담요를 뒤집어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네여, 거부감이 없다는건 명씨가 선수라서 그런건가?"
"참 이상해요. 연우씨가 이혼한거 말이에요. 내가 보기엔 살림도 잘하고 남편 사랑도 많이 받았을거 같은데. 그냥 궁굼해서요, 이런 거물어보는 거 실례죠? 대답하지 말아요."
"아니에요. 뭐 별다를 것도 없으니까. 우리 성격차이로 협의이혼을 했죠. 아주 쉽게... 남편은 좋은 사람이에요. 뭐 꼬박꼬박 월급봉투가져다 주고, 날 사랑한다는 표현도 자주해줬고, 집안일도 많이 도와줬어요. 누가 봐도 이혼할 이유가 없는 부부였죠...
근데 정작 나는 그런 결혼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잘 이해가 안되요. 내가 결혼을 안해봐서 그런가봐요. 성격차이는 누구나 있는거 아니에요?"
"맞아요, 누구나 같은 사람이 없죠, 아마 이혼했다는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나보러 배불러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았을거에요.
어느 날 문득 아마 토요일 밤이었는데 결혼한지 3년 정도 지났을 때에요.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나는 그 옆에서 과일을 깍고 있었어요. 그림상으로는 평온한 모습.
근데요,난 너무 소름이끼치는 거에요.
우리는 지난 주에도 ,또 지난 주에도. 일년 전에도 . 이년 전에도 그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죠. 가끔 나랑 눈이 마주치면 남편은 '사렁해'하며 날 도닥거려주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어
떤 대화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하지 못한거에요.
남편도 나도 서로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함께 얘기 할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만 몰랐을뿐 너무도 달랐거든요.
아마 이혼 안했으면 우린 오늘도 그러고 있었겠죠. 영원히 변하지 않을 박물관 전시그림처럼..
그러고도 난 모든 게 내 책임인거 같았어요.
그래서 이년 동안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죠. 같이 살사춤도 배우러 다니고,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러다니고 근데 결국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우리는 앉아있는 거 같이 느껴졌어요.
사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요.
우린 분명 사랑했고 서로에게 충실하게 살았지만 그런 거 알지 모르겠는데 남편과 15분 이상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얘기 할 수 없었어요. 마치 고양이랑 개처럼말이에요.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해도 개는 멍멍이고 고양이는 야옹이잖아요.
외국어처럼 서로 알아듣지 못하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결국 난 외로움에 지고 말았어요.그래서 우린 이혼했죠. 나 너무 말이 많은 거 같아요.. 총각 앞에서."
담요를 두른건지 그이 팔이 내 어깨를 감싼 건지 따땃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묵묵히 발끝을 보고 걷고 있었다.
"아이를 가져보지 그랬어요? 왜 흔히들 그러잖아요. 부부의 활력소는 아이들이라고... 아닌가요?"
"우린 정말 너무 아이를 원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그렇게 원한 거 같지는 않아요. 암튼 그는 아이를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우리 나라 불임부부가 7명중 한쌍 이라는거 원인이 없는.. 처음 일년은
신혼이기에 일부러 안가졌고 그 다음 부던 그저 생기길 기다리고 또 그 다음해엔 불임크리닉에 돈 많이 쏟아붓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묵계에 가까운 그저 기다림.. 암튼 그랬어요. 정말 화가 날만큼 기다림은 피를 말렸죠."
"입양... 그런 건 싫었나요?"
"어후, 사람들은 참 이상해요. 아이가 없다고 하면 아주 아무렇지 않게들 '입양하면 되지뭐' 그러죠. 자기들은 자기 피섞인 아이들 키우고 막상 누구누구가 입양했다면 뒤에서 별별 소리를 다 하면서 아주 쉽게 마치 밥없으면 빵먹으면되지 뭐 이런 식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 나 솔직히 열받아요. 또 입양을 했다쳐요,
그러다 어른이 되서 자기 생모 찾으러 간다면 그 땐 어떻게 해요?
내가 만들지 않았는데 진심으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지도 않잖아요.모르겠어요. "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마치 입양된 사람처럼 말하네요. 너무 확신하는거 아니에요?"
"그래요. 나 입양되었으니까."
천천히 걸어가던 나의발걸음은 돌부리에 걸린 것도 아닌데 앞으로 고꾸러 질뻔했다.
그는 양손으로 나의 팔을 잡아 중심잡는 걸 도와주었다.
"놀랬어요? 똑바로 서요. 나 이 얘기 연우씨한테 처음 하는거에요. 거짓말 같죠?"
담요를 넙적한 바위에 펼치고는 날 억지로 앉히고 그는 또 담배를 피워물었다.
"내가 처음 영월에 왔을 때 그 때 처음 알았어요. 내가 입양된거요. 우리 부모님이 말해주신거 아니었는데 그렇게 알게되었어요. 나 대학 갔다고 아버지는 이사를 가셨죠.
이제 성인이니까 한 번 제 뜻대로 살아보라고 이제 부터는 두 분이 다시 신혼으로 돌아가신다고,아주 예쁜 아파트로 이사가셨거든요.
부모님은 아직도 정말 신혼 같아요...혼자살 게 되니까 솔직히 신나기도 하고 엄마랑 떨어져 산다는거 싫기도 하고 그 때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될 때 즈음이었는데 이사짐 싸러 원래 살던 집에 가서 부모님들 일도와드렸어요.
창고에서 두 분이 연애할 때 쓴 편지들이 나왔죠. 제가 읽어보고 싶다니까 두 분도 장난스럽게 앞으로 연애하는데 도움이 될거라고 하면서 엄마 아빠가 서로얼마나 사랑했는지 보고 배우라고해서 정말 그 오래된 편지들을 읽기시작했죠.
근데 이제부터가 정말 영화같아요, 편지를 반 정도 읽고 나서 새 봉투를 집어
들었는데 그건 아빠나 엄마의 필체가 아닌 서류봉투에 부모님 이름이 써있는거에요. 왠지 그 때부터 가슴이 우당쾅쾅거리고 기분이 이상했어요.
안에 든걸 꺼냈는데 거긴 어느 입양단체에서 보내온 저의 신상명세서였어요. 그리고 간단한 편지가 타이프 쳐있었죠. 지난 번 서류에서 부족한 서류가 있으니 동사무소에
들러서 서류 가지고와야 최종적으로 입양서류가 완결된다구요...
그 때 기분은 아직도 생생해요."
담배는 어느새 그의 손가락마저 태워 버릴 듯 꽁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채 그 불똥이 떨어지기도 전에 새 담배를 피워물었다.
"나 계속 얘기 하고싶어요. 들어줄거죠?"
다른 선택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떨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정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거에요. 서있지 못할 만큼. 그리고 삼킬 수 없는 뭔가가 가슴에서 솟구쳤고 전 그렇게 정신을 잃었어요.
눈을 떠보니 전 병실에 누어있었고 엄마가 너무 울어도 눈이 떠지지 않을 만큼 부은 얼굴로 제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 순간에 나도 한참을 울었어요. 나중엔 너무 엉엉대고 울어서 병원에서 진정제를 주사할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말이 안나왔거든요. 부모님도 덩달아 말이 없으셨죠.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어요, 엄마는 울며 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좀 달랐어요.
뭐 물어보고싶은 거 없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그건 생부모를 알고싶으냐는 의미였다는 걸 알았죠. 근데 전 그럴 마음이 없었어요.
어차피 생부모는 그렇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테니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건 원하지 않았아요. 단지 한가지는 정말 알고싶었어요."
"그게 뭐였는데요?"
"엄마랑 아빠가 정말 나를 사랑한거냐고요... 왜 그런거 많잖아요, 남의 자식이라 입양된 아이를 혼 한 번 못내고 기르는 사람들. 근데 정말 우리 부모님은 친부모님 같았어요. 나 어릴때 맞기도 많이 맞았구요. 엄마랑 신경전도 많이 했고, 아버지도 정말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사람은 한 솥밥 먹으면 그렇게 되나봐요, 누가 봐도 난 엄마랑 아빠랑 딱 반씩 붕어빵이거든요. 근데 내 친부모가 아니라는게 오히려 이상했죠."
"그 분들은 뭐라시던가요?"
바보스럽게도 나는 이런 걸 물어보고 있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절대 그사람의 속을 알 수 없는게 진실에 가까웠다, 이해하려고 노력할뿐.
"부모님이요? 아버지가 우시는 거 그 때 처음 봤어요. 아주 낮은 목소리도 그러셨죠. '명아, 난 네가 어디서 시작된 생명인지는 아무 관심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애비의 마음 여기 심장에서 하루에도 수백번씩 내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피가 용솟음 치는 거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니가 이렇게 일을 알게되는거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알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넌 내 아들이다, 아버지가 너한테 줄 수 잇는게 뭐가 있을 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내가 죽어도 아깝지 않은 건 네엄마랑 너밖에 없다, 그럼 답이 되겠냐.'
그러고는 소리없이 많이 우셨어요. 엄마는 거의 숨도 못쉬셨죠, 엄마를 침대에 누이고 아버지한테 다녀오겠다고 했죠. 아버지는 어렵게 그러라고 허락하셨죠.
그러고는 여기 영월로 왔어요."
"왜 하필 ..영월이었어요?"
"여기오면 사람이 별로 없을 거 같에서요. 안추워요? 들어가죠."
명은 산장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그 나머지를 들려주었다.
"처음엔 정말 뭘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아까 그 식당에서 돈 안 받고 일할테니 밥하고 재워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줬죠. 방학내내 여기서 멍하니 있기도 하고 일도하고 술도 먹고..그냥 맘속을 내 버려 뒀던거 같아요, 그리고 한가지 결심했죠.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을 꼭 안아드려야겠다고요. 원래부터 난 그
분들 아들이었잖아요. 아무것도 달라지는 걸 없다는 걸 깨달을떄즈음 방학이 끝나갔죠. 다시는 방황안하고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결심한건 지금까지 변함이 없어요."
"그런 큰 일을 겪었을때 여기로 와서 그런 결심을 했다는건 정말 공감이 되면서도 할 말을 없게하네요. 하지만 이번에 여기까지 와서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다는 건 어째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거 같아서 내가 더 부담스러운거 같에요."
"그렇다면.."
명은 현관의 입구에서 손잡이를 잡은 채 나를 내려다 보았다.
"연우씨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럽다면 한 번만 나에게 허락해줄 수 있어요?"
"뭘...?"
눈깜짝할 사이에 명은 날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아주 격렬하게 마치 원래부터 이 시간 즈음이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게 당연한 것처럼 아주 오래 롱테이크한 영화의 한 장면같이 점점 줌인되어 입술에 모든 시선이 고정되는 것같이, 그는 그의 감칠맛나는 속살로 나를 감지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담배를 피웠던 그의 입에서 나는 담배냄새는 아주 달았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그런 그를 밀쳐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두르고 있던 담요를 불편스레 잡고있던 나는 그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 입술에서 전해지는 신호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서 더욱 가깝게 그를 느끼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줌마이기에 몸이 원하는 것에 다가 갈수록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즐겼던 터였다.
결혼생활은 평범한 여자를 남자를 아는 여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기에.
한참을 키스에 열중하던 명이 이마를 마주댄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은 안되는 거죠?"
얼얼해진 입술근육을 좌우로 오므리며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린던 나에게 명은 이내 그의 큰 웃음으로 내 어깨를 건드리며 웃었다.
"나 나쁘진 않았죠?"
"음...너무 좋았어요. 그치만 내 타잎은 아니에요."
"알았어요, 근데 솔직히 나 더 이상은 약속 못하겠어요. 마음은 멋진 남자로 연우씨 곱게 잘 자게 해주고 싶은데, 또 모르죠. 이성은 야성을 이기기 어려울 수 도 있으니까 꼭 문 잠그고 자요. 문 열고 자면 연우씨도 나랑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어흥' 해 버릴거에요."
하루를 넘기는 것이 그리도 긴 시간일 수 도 있다는게 새삼스러웠다.
막상 방으로 들어와서 나는 문을 잠그고 자지 않았다.
뒤척거리고 있을 때, 명의 발소리가 가까이 들렸고 난 직감적으로 그가 방문앞에 서있다는걸 알았지만, 그는 내 방문 앞에 한참을 서있다가 문 손잡이를 잡아보지도 않은 채 그냥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우리의 하룻밤은 그렇게 끝나가고 새로운 아침 청령포로 갔다.
명은 내 손을 꼭 잡고 나룻배안에 앉아서 그저 물위에 반사되는 햇살을 먹고 있었다.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로 그는 온 몸으로 그러고 있던거다.
청령포는 고요했지만 외롭지 않았다.
배를 건너와 자갈깔린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나와는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입체감 있어 보였다.
햇살을 먹어서였을까?
한 참을 우리는 그 곳에 머물렀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이 순간의 작은 호흡들이 다시는 이곳에 머물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윤 명과 나의 사랑에 도달해보지도 못한 애련한 순간은 거기서 그렇게 다시는 찾을 수 없는 햇살이 되어 우리의 어깨 너머로 사라져갔다.
아쉬움조차도 남길 수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