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OM>
징크스였을까?
그 쪽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배가 아팠다.
매일 아침마다 시계처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나에게 늦음 밤의 배앓이는 힘들기 짝이 없었다.
데낄라탓도 있었겠지만 불편한 마음이 나를 문을 열기가 무섭게 화장실로 향하게 했다.
한 참을 변기와 씨름한 후에 간신히 전화벨 소리를 들은 것은 전자렌지에 핫팩을 데울 때였다.
"연우야, 왜 이렇게 전화늦게 받아, 암튼 알아줘야돼. 있지,있지? 나 그 남자에 대해 기억 나는게 하나있어서 말이야.
있지 그 사람 어깨에 문신이 있었어. 뭐 큰 건 아니고 愛이라고 쓴 작은 문신이야."
"愛? 그 남자 너무 이상한 남자 아니니? 야야 잊어 버려라. 그런 남자들 조직이나 뭐 그런 걸 수도 있잖아."
"너는. 하필 나쁜 쪽으로 상상하니? 글구 또 하나 있어, 아, 좀 말하기 뭐하지만 할 때 말이야. 그 남자가 갑자기 사투리로, 암튼 웃지마, 이런 말도 했어."
"어떤 말?"
"갑자기 표준말 쓰던 그 사람이 이러는거야, '쥑인데이, 너도 좋나?' 이러더라고."
나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 가며 웃었다. 이건 완전 미스테리 블랙 코미디였다.
솔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게 미안하긴 했지만 사투리를 처음엔 쓰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관계 도중에만 그런 어투를 쓴다는거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알어, 웃어라 웃어. 이 나쁜 기집애야. 그치만 머리에서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아... 나도 미친거 같아.
너도 공사완공하고 이제야 좀 편할텐데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암튼 심각해 나는."
"아직 연락은 없지?"
"연락은...이름도 모르는데.. 아, 죽고잡다. 그래도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싶어. 엥. 우울하다 끊자."
사실 걱정이 더 많이 앞섰다.
솔희같은 아이가 오히려 마음이 약한 법인데 이 일로 상처를 깊게 남길까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딱히 문신이 있고 결정적 순간에 사투리를 쓰는 샤프한 월급장이인 남자를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진짜 인연이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믿는 것만이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뚱딴지 같은 기억을 뒤로하고 생업전선으로 가는 아침마다, 참 산다는 것이 묘한 일이라는 생각에 마시고 있던 커피머그가 수줍은 아가씨 같은 피치오렌지컬러의 스커트에 과감히 떨어졌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꽃무늬가 치마에 생기며뜨거운 커피에 데인 허벅지는 쓰라렵기 그지없었다.
아침부터 볼상사나운 모양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려니 정말 산다는게 뭔지하는 중얼거림이 나왔다.
하지만 어쩌랴.
작업복으로도 갈아입고 일해야 하는게 월급장이의 현실인 것은...
허겁지겁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으니 솔희의 문자 메시지가 와있었다.
'속보!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음.^^, 오늘 오후에 만나자고 함, 연우야 만세.'
얼얼한 허벅지의 통증은 사랑하는 친구의 감격어린 메시지로 한결 기분을 상큼하게 했다.
나역시 그 남자가 궁굼해졌다.
'너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다니?'
문자를 보내자마자 솔희의 거의 속기사 수준의 문자메세지가 번개마냥 순식간에 내 엘씨디 화면을 꽉 채웠다.
'말마, 그날 내 핸백에서 명함 가져갔고 그간 바빠서 연락못했다고 저녁 근사한 대서 먹자고함 왕 로맨틱가이'
'솔희 너 오늘 또 그사람이랑 불타는 밤 보내면 절교야, 이번엔 실수하지마,암튼 추카추카'
'당군, 밤에 보고하겠음'
아침에 엎지른 커피로 카페인의 부족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러 갔다.
대다수의 직원들은 아메리칸스타일의 원두커피를 엄청스런 컵에 따라 마시지만 난 내 고유한 전통적인 다방커피 내지는 자판기 스타일의 커피를 고수했다.
먼저 인스탄트커피를 티스푼으로 하나반, 뜨거운 물을 부어 살짝 저은후 설탕 듬뿍 두 티스푼 ,프림 역시 두 티스푼.
혹자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설탕이나 프림에 커피를 살짝 타든지, 그냥 설탕통에 커피를 말아먹으라고 야유했지만 이게 어디 일이년 인에 박힌 맛이랴.
난 나만의 맞춤커피를 마신다는 자부심으로 느긋하게 아침이른 시간의 사무실안에서의 여유를 그제서야 만끽했다.
"오늘 컨셉은 믹스매치입니까?"
실장은 레몬엘로우의 블라우스와 카고팬츠를 입은 나를 보며 물었다.
아침에 스커트랑 입었을 땐 내가 봐도 정말 공주같더만 지금의 모습은 사실 남이 볼까 두려운게 사실이었다.
"아, 그게 저.."
"뭐, 그런대로 신선하군요, 그런 시행착오를 자꾸해야 창의력도 느는 거겠죠.'
칼날은 날 보고 웃으며 커피를 가지고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
입사이래로 실장이 나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준건 처음이었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을 때도 그는 내게 그저 '많이 늘었군요, 더 열심히 하십시요'라는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그런 실장이 나의 이 모습을 보고 새롭다며 웃는다는건 직장생활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걸 의미했다.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편해졌다.
하루종일 불편한 코디네이션 때문에 집으로만 가고 싶었던 나로서는 벽에 걸린 시계바늘이 더디가는 것만 같았다.
칼퇴근 하는건 늘 윤 명의 몫이엇지만 오늘따라 그는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지 갈 생각을 안했다.
제일 먼저 일어나기엔 눈치보이고, 하지만 이미 엉덩이는 반쯤 의자에서 들려져있었다. 선뜻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용기를 내야지, 마음을 굳히고 인사를 하려고 입을 반쯤 열었을 때 실장은 날 불러세웠다.
"우연우씨 나 잠깐 봅시다."
퇴근시간에 날 불러세우는 칼날. 정말 진상덩어리지만 애써 웃는 얼굴로 다시 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거지.
"음. 우연우씨는 삼십대 여성이니까 몇가지 질문좀 하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아요?"
"그럼요, 그럼요."
"대개의 삼십대 여성은 뭔가를 초이스할 때 로맨틱한 컨셉입니까? 보다 현실적인 컨셉입니까?"
"예? 그건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만 뭐 새로운 프로젝트라면 제가 보고서를 작성할까요?"
"아 그런건 아니고. 연우씨 같으면 어느정도 알긴하기만 만난 기간이 얼마되지 않는 남성에게 무슨 선물을 받으면 좋겠습니까?"
이건 영 평소의 실장이 아니었다.
그가 이런 얘기를 물어본 적도 없거니와 이렇게 은밀하게 사무실에 사람을 따로 불러서 여성의 취향을 물어보는건 단 한가지 여자에게 선물을 하겠다는 뜻 아닌가?
또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 졌다.
"실장님, 그러니까 여자분께 어떤 선물이 좋을까 물어보시는거군요, 그렇게 쉽게 얘기하시지... 뭐니뭐니해도 처음 선물로는 예쁜 꽃이 좋지않을까요?
부담도 적고 여자를 배려하는 이미지를 주고, 섬세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뭐 암튼 실장님이 그렇게 고민하실 정도인거 보니 엄청 세련되신 분인거 같네요."
실장은 눈썹이 올라가긴 했지만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다.
아니,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 그 정도 여자얘기에 얼굴이 붉어지면 연애는 어떻게 하려는지.
개인적으로는 정말 실장이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오랜 세월 노총각으로 궅어진 날카로운 면이 조금은 안정되고 부드러워 질까해서였다.
"그래요, 선물을 고르는데 그 여성과 비슷한 연배인거 같아서 조언을 구하는 거였습니다. 말나온 김에 꽃좀 골라주면 더 좋겠군요."
"그럼요, 당연히 제가 적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래야죠. 꽃집은 제가 잘하는데 아는데 거기로 가시죠?"
'bloom'은 저녁시간이면 더 바빠지는 꽃집이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꽃집이름을 땄다는 이곳은 부부가 운영을 하는 곳이었다.
남편은 한국사람이고 아내는 미국인이었다.
그 들은 뉴욕에서 주인아저씨가 꽃가게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손님과 점원으로 만났고 함께 한국으로 왔다.
둘의 모습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는 미국아줌마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면 어느새 그저 푸근한 꽃집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솔희와 나는 우연히 이 작은 꽃가게를 발견하고는 이내 단골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정말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들이 그들의 농장에서 직접 재배 되었고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그들의 꽃 포장방식이다. 일종의 프리스타일이라고 해야하나?
우리가 유명 꽃집에서나 보는 만들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저 심플함으로 간단히 화병에 꼿거나 하면 그자체로 아트가 되는 정말 멋진 포장이었다.
"왔나? 오랜만이데이. 친구는 어디 가고? 누고? 남자친구고?"
주인아저씨는 무둑뚝한 말투로 나와 칼날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니에요, 우리 회사 실장님인데 꽃을 선물하신다고 해서 이리로 모셔왔어요. 잘 해주셔야 되요."
아줌마는 풍성한 꽃만큼이나 풍성한 몸매를 흔들며 웃으며 장미를 권했다.
"누가 모라케도 여자는 장미를 젤로 친다 아닙니꺼. "
실장은 진지한 얼굴로 여러 장미를 보고 있었다.
그는 흑장미를 들고는 나에게 어떻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대개 여자들은 장미를 선물받으면 드라이 플라워하길 좋아하거든요? 흑장미도 아름답긴 하지만 드라이를 하면 너무 검어지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서 저는 핑크계열이 오래두고 보기엔 더 예쁜거 같아요. 말리면 색이 더 선명해지거든요."
"하고마, 이제 아가씨도 꽃장사 다됬데이. 아재요. 맘에 드는교?"
"좋다아님니꺼"
"손님도 경상도인가보네, 어딩교? "
"부산임더"
"보소, 이 손님 덤 많이 주그래."
놀라서 쳐다보는 나에게 칼날은 그저 살짝 어깨를 들었다 내렸다.
저 예리한얼굴에 어찌 저런 사투리가.
대개 사람들은 사투리 고치기가 어렵다는데 표준말을 구사하는 그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보니 정말 정이 더 떨어졌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독하다 독해.
장미한송이를 그는 내개 쥐어주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 걱정마세요, 나이 먹는게 좋을 땐 이럴 때인거같아요, 함부러 남 얘기안하는거 같은... 맞죠?"
"고맙군요. 그럼 나중에 사무실에서 봅시다. 휴가 잘 보내요."
칼날은 한다발의 장미를 보기좋게 들고 흥이 나서 걸어갔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저렇게 달라지기 나름이지..
한편으로 보기가 좋았다.
남자로부터 꽃선물 받아 본 거 꽤나 오래전에 본 흑백영화처럼 아련한 추억이 된거같았다. 내가 연애를 하던 그 땐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저렇게 100송이나 되는 커다란 장미를 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화병에 꽂고 또 시간이 지나면 가지런히 해서 창가에서 말리고 두고두고 그 걸 받은 날을 기억하며 행복해 하곤 했던거 같았다.
비록 실장에게서 입막음의 표시로 받은 한송이의 장미지만 사랑스런 향기에 마냥 취해 가는거같아 마음이 생기 있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