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리타>
길게만 느껴졌던 연구소 리노베이션이 드디어 끝났다.
팽팽하게 신경전을 부리던 조각가 심선생은 개관 축하 리셉션에서 장엄하기까지 하게 공중에 매달려있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감격스러워 했다.
조각에 깊은 조예가 없는 나로서도 '꿈2'의 모습은 정말 굉장했다.
시선에 따라 빛이 분산되는 모습이며 공학적인 각도에서 최소의 힘으로 완벽한 안정감을 이끌어낸 와이어작업은 윤 명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중앙현관으로 마무리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기자단은 연신 칼날실장을 인터뷰하기 바빴다.
과학의 공간을 이렇게 리노베이션 하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짧은 공사기간에 비해 그 효과는 대단한 거였다.
각 방송사에서도 취재열기가 뜨거웠다.
사장은 연구소장과 이번 공사의 성공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연구소 직원들과 우리 회사 디자인 팀원들, 취재단들, 기자단까지 리셉션장은 무슨 시상식이나 치른 것처럼 시끌벅적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인데다가 어차피 남아있어도 별 영양가 없는 나같은 말단 디자이너는 조용히 사라져주는게 돕는 거였다.
홀짝 들고 있던 샴페인을 원샷하고 돌아서려는 데 박이삭이 다가왔다.
어차피 사람들의 시각을 의식하는 사람이라 나역시 모른체하고 지나치려는데 그 쪽은 뜻밖에도 내 손목을 잡았다.
"나 좀 보자."
"이거놔, 사람들이 보겠어."
"괜찮아."
눈동자가 타 들어갈 듯 그는 날 바라보았다.
난처한 기분.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그 쪽만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이는게 아니었다.
나역시 회사 사람들을 의식하지 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장과 실장 모두가 있는 자리였기에 서둘러 자리를 뜨고만 싶었다.
"박이삭군, 여기있었나?"
연구소장과 사장이 어느새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나와 그 쪽에게 다가왔다.
사장은 손목을 잡혀있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쳐다봤지만 분위기 파악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그저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을 깬건 오히려 박이삭이었다.
"소장님, 소개하죠. 이쪽은 제 동창 우연우씨입니다. 이번 공사 디자인 팀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 학교에는 인재가 많은 모양이군요."
소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고 그 제서야 나는 손목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창을 이런데서 만나니 반갑겠네. 연우씨."
사장은 한 몫 거들고 싶은지 아주 반가이 그 쪽과 악수를 했다.
"연우랑은 아주 친했습니다. 공사기간중에 밥이라도 한 번 같이 먹어야 하는 건데 서로가 너무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었습니다. 오늘마저 그냥 보내면 제가 너무 친구를 홀대하는거 같아서요.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 붙잡았는데, 함께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소장과 사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며 오랜만에 즐거운 친구들끼리 회포나 실컷 풀으라고 자리를 떴다.
예의 남자들만의 기분나쁜 매너따위는 정말 메스꺼웠지만 구지 이런 일을 변명하는 것이 더 우습다는 걸 나 역시 사회생활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표정관리는 생각보다 잘 안되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쪽은 날 기분 나쁘게 했고 나 자신도 이런 상황에 빠지는게 너무도 열이 받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박이삭, 너 정말.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하는거 정말 역겨워. 난 너 볼일 없어."
이를 악물고 그 쪽에게 으르렁 댔다.
하지만 눈 하나 꼼짝 안하고 그는 내 등을 살짝 밀면서 말했다.
"알았으니까, 일단은 나가자.그럴거지?."
사람들 사이를 뚫고 그 쪽과 입구로 나가던 길에 하필 실장과 윤 명을 마주쳤다.
"어? 우연우씨 어디가요?"
명이는 나와 이삭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길을 막았다. 실장 역시 의외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박이삭은 먼저 악수를 청하며 통성명을 했다.
"박이삭입니다. 반갑군요 이번 공사 너무 훌륭합니다. 저희가 동창인거 모르셨군요. 괜찮으시면 저희랑 식사나 같이 하시죠.?"
실장은 나를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감사하지만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명은 얼굴이 굳어져서 이삭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봤다.
"연우씨 동창이시라구요? 저녁을 사신다니 기꺼이 같이 가죠. 후배누님 제 차 타고 가시죠? 박사님 어디로 가실건가요?
그 쪽의 눈꼬리가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는 태연했다.
"같이 가신다니 좋군요. 좀 멀지만 제 차를 따라 오시죠."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신경전은 정말로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만들하죠. 난 몸이 안좋아서 그냥 집에 가겠어요."
박이삭은 내 팔을 잡고 에스코트하는 모양으로 서서 명에게 말했다.
"그럴래? 연우야? 옛친구 바래다 주는건 기본 우정이죠. 안 그렇습니까? 반가웠습니다. 가지."
윤 명이 이를 앙 다물며 뒤통수를 태워 먹을 듯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는 건 뻔한 일이었다.
토요일 저녁고속도로는 막힐 게 뻔했고 차라리 더 이상은 볼일도 없는 그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지자고 지어먹었다. 오히려 그게 앞으로 편할 듯했다.
마음을 바꿔서 그 쪽과 연구소 근처 전에 갔던 그 레스토랑으로 갔다.
박이삭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장소가 문제는 아닐거였다.
각자 차를 운전하느라 짧은 시간동안 생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내가 만약 평범한 남의 아내로 그를 마주쳤어도 그가 나에게 이럴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일상적인 결혼 생활에 지루해 하고 있던 주부였다면 닳고 닳은 흔한 얘기들처럼 다시 만난 옛사랑과 불륜관계에 빠졌을까?
어느 쪽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또 ,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가지 정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게 인생이라면 세상에 고민이나 문제가 있을 턱이 없겠지.
생각이 이렇게 치달을 때 즈음에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내 차문을 열어주었다. 왠 쓸데없는 과잉매너, 정말 불편했다.
그 전에 왔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빈자리가 없었다. 이미 리셉션장에서 이것저것 먹거리를 섭렵했기에 그냥 바에 앉았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말이 없었다.
그가 말이 없자 김이 빠진 기분이었다.
홀로서기를 한 이후로 나에게 생긴 고약한 버릇 중에 하나는 지나칠 정도로 나를 무장한다는 거였다.
어느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나만의 장치, 나는 남자에 관해서 만큼은 무관심이라는 단어로 일관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 자신의 여성성을 어필하는 것에 어느 정도 지칠 즈음 내 결혼은 끝이 났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나는 아주 여유있는 모습으로 그런 사람들을 비아냥거렸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나의 정중한 태도에 그들은 내 속을 몰랐지만 돌아서서 생각하면 아주 오만불손한 이혼녀로 기억되었으리라. 그러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했다.
박 이삭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는 지난번 나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했고 이번 역시 그의 방식대로 나를 대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분풀이는 그가 받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 입술과 혀는 한껏 독오른 단어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 말이 없었다.
대개의 여자가 그렇듯이 장기전은 나에게 불리했다.
대리운전이 가능하다는 바텐더의 말에 나는 마가리타를 주문했고 그를 위해서도 뭔가를 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는 그저 물잔의 물만 마시고 있었기에 생각을 접었다.
솔트프로스트한 마가리타잔에 레몬빛 마가리타가 레몬장식과 함께 서브 되어왔다.
독기 오른 나의 혀 끝으로 글라스 가장자리에 소금을 맛본 후 한 모금 칵테일을 머금었다. 꽤나 잘 쉐이크된 맛이었다.
이 레스토랑의 바텐더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주름진 손에 희끗한 머리카락, 그의 경력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마가리타를 이렇게 맛을 낼 수 있는 그도 옛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곧이어 그 쪽은 스카치 더블을 주문하고는 또 이내 말이 없이 앉아있다가 한 손을 오른쪽 허리에 집고는 등을 곧추세우고 짧은 한숨을 쉬고서야 나를 쳐다보았다.
공부만하는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하얀 얼굴과 더불어 검정수트 안에 하얀 셔츠, 그리고 페이즐리 모양의 넥타이가 동시에 출렁거렸다.
"연우, 너 날 아직도 미워하니?"
"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미워하냐니? 난 한 번도 그를 미워한 적이 없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그와의 이별을 생각했을 때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마음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헤어진지가 얼마 안될 때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나 장소, 편지 모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아프긴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약이 되었고 날 오히려 성숙하게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학교다닐 때 사귀던 커플 중에 깨지는 것은 다반사 아닌가. 그의 의외의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다시 바 스툴에 힘을 빼고 눌러 앉아서 카운터 위 가장자리에 팔꿈치를 댄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집사람이...알아 버렸어."
"...?"
"너를 아직도 내가 생각한다는 걸 말이야. 놀라지도 않는구나."
기분은 이미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느닷없이 내 인생의 갑작스런 등장 이후로 그 쪽은 날 아주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아내의 얘기는 또 무슨 일인지 짜증스러운 감정이 먼저 일었다.
"산다는게 다 그런 건가봐, 너를 다시 만나게 되고 또 예기치 못한 일에 와이프가 걸려 들고... 네가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더구나. 이건 아내의 생각이지만... 기억하니 내 석사논문?"
물론 나는 그의 논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용을 기억한다는게 아니라 그가 맨 마지막 장에 썼던 내용을 기억한다는 거였다.
감사의 글에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단 두 줄 나에 대한 얘기가 나와 있었다.
'힘든 시간 중에 나를 쉬게 해 준 내 사랑하는 연인이자 미래의 아내 우연우와 이 논문의 마지막을 함께 합니다."
나는 그가 논문 후기 중에 이 부분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걸 기억해냈다.
아내가 알아 버렸다는 건 그 논문을 봤다는 얘기일거였다.
눈만 깜박거리며 그 당시를 회상하는 나를 보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도 기억하고 있구나. 마지막 페이지 말이야. 연구소에서 늦게 들어갔던 날 아이엄마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테이블 위에는 나의 그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고 딸은 이미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 없이 집안의 분위기는 정말 불길했지.
아내는 그러더군. 사랑하는 여자를 왜 안 붙잡았냐구...? 사랑하는 여자를 잡지 않은 남자를 여지껏 하늘처럼 생각한 자신은 뭐냐구... 물론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나도 나의 일상에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솔직히 널 보기 전까지 넌... 그저 남 몰래 빠져드는 나만의 연우일뿐 현실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 날 나도 더 이상은 그렇게 살기가 싫다고 말했어. 아직도 그 여잘 사랑한다고 말이야. 아내는 울더군. 와이프는 현실적인 사람이고 똑똑한 여자야.
절대 손해보는 인생은 안 살 사람이지.
나보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서 대답을 못했다.
아내의 말대로 나는 왜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냈을까? 새삼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내가 너라면 어땠을까 ... 난 너였다면 많이 미워했을 것 같더라. 아닌가?"
술맛이 썼다. 칵테일이 아니라 차라리 데낄라로 바꾸는게 더 나을 듯 싶었다.
시간이 지난 일을 다시금 돌아본다는게 참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지만 그 일 들 자체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거였기에 원하지 않는 이런 만남과 결과들도 부유하는 미생물들처럼 현재의 모습에 들러붙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먼지였다면 정전기 방지제를 뿌려서라도 멀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과거의 첫사랑은 그저 첫사랑이면 되는 것을 예전의 그 때처럼 우리는 즉흥적인 기분이 드는 삼십대가 아닐런지.
"너, 이삭이 너말이야. 우리가 어릴 때도 넌 지금 같았던거 같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미 마음속에 답을 가지고서는 나한테 되묻고는 했던 거. 달라진게 없구나. 하긴 성격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변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일거야.
와이프 일은... 암튼 안됐구나. 그림같은 가족이었을텐데.
구지 이런 식으로 일이 풀렸다는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만. 있잖니?
나는 네가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거 솔직히 안좋아.
내 마음은 전에도 말한거라고 생각하는데...
너도 아마 나를 사랑하는거 라기 보다 그저 우리가 어렸을 때 훨씬 생기있고 신선하고 용기있고 좋았던 그 때를 단순히 그리워 하는 걸지도 몰라.
그 매개체가 과거의 첫사랑이었던 나인거고 말이야.
하지만 그 쪽도 이젠 알고 있잖아? 자꾸 같은 말하는 거 같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거 말이야.
오히려 현재의 그 쪽이나 나나 서로를 부담 주는 존재로 다시 재회한거 뿐인거야. 안그래?"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여자들이 다 너처럼 말을 잘하는거 아니라는 거 난 아내와 살면서 느꼈었지.
어느 정도 난 너의 그런 스타일 자체를 사랑했었는지 모르겠다.
아이엄마는 다소곳한 사람이지. 별로 유머스럽지는 못했어.
그런 면으로 너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지.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아주 힘들더군.
우린 할 얘기가 별로 없었어. 너랑 함께 했던 것처럼 인생이나, 음악, 영화 그런게 아니어도 그저 의미없이 오가는 얘기들...
모두 허공으로 '퍽'하고 건조하게 사라져 가곤 했지, 아마 그 때부터 였던 거 같아.
네가 그리웠던 건. 연우 너 그 때 생각나니?
나 학교연구실에서 밤새울 때 너 놀러 와서 우리 그날 얘기 많이 했던거, 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추운 학교옥상에서 키스할때 너의 입술이 차가웠던거...
그런게 그 때부터 생생하게 떠오르고 그리워졌던가봐.
하긴 나도 안다. 너는 다시 날 사랑하진 않을거라는 것도.
아무리 내가 잡으려고 해도 넌 너무 멀리 있다는 것도.
이젠 성공이라 말하면 넌 또 날 속물공부벌레라고 매도하겠지만 부모님이나 내 자신이나 아내가 원하는 것만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
'try to remember'가 흘러나왔다.
아무 말 없는 나와는 아랑곳없이 그는 혼자서 스카치를 오더했다.
독주를 마시면 빨리 취할까 싶어 바꿔 마시던 데낄라는 벌써 여러잔 목젖을 흘러갔지만 나는 아무렇지가 않았다.
화장실을 자주 가고 싶긴 했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알아서 얘기를 끊고 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을 멀리서부터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거야?"
"옛날에는 정장이 살 떨리게 싫다더니 이젠 정장입은 니모습이 멋지다. "
"아이고. 고맙네요."
그는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일일이 필체좋은 그 쪽이 핸드라이팅으로 써놓은 이메일 주소 , 낯선 외국 주소 전화번호. 뭐 그런거였다.
"나 다음달 말에 미국으로 간다.
그 때 즈음이면 아이엄마랑도 모든 일들이 정리될거야. 아내가 내 마음을 알고난 후부터 우리는 준비에 들어갔고 지금은 딸아이 양육문제랑 간단한 서류문제만 남았어.
우린 합의이혼하기로 했다.
이 주소는 내가 가게 될 연구소 주소야.
언제던 연우 네가 와주기만 한다면. 물론 필요한 건 내가 알아서 준비할거고. 이 것마저 버리지는 말아줘."
"이삭씨 왜그래? 그런 경솔한 결정 내리는거 분명 후회할거야.
아이는 어떻게 하고?
그리고 나보러 미국으로 오라고? 지금 제정신이야?
이혼하는거 그렇게 쉬운거 아냐.
분명 후회할거야."
"넌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말이니?"
대답하기가 싫었다, 할 말도 없었다.
난 사실 가끔은 결혼했을 때의 생활이 그립기도 했지만 현재 내 일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한없이 좋았다.
남편에 대한 생각을 하면 솔직히 아직까지는 마음이 아파왔다.
사랑하는 마음이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았으므로 그런 이유에서인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거나 남자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나도 이혼한 하면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즐길거라 생각했지만 혼자가 되어 새로운 이성관계를 시작한다는 건 처음보다 몇배의 망설임을 주는 일이었고 쉽사리 잘 맞는 상대가 나타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 쪽은 말머리를 찾지 못하고 마가리타잔과 데킬라잔을 번갈아 만지던 나의 손을 감싸쥐었다.
땀이 배어 나온 내 손을 잡고 그는 왼손으로 내 가방을 열어 주소가 적힌 종이를 넣었다.
뭐라던 이삭에게 말을 해야 했지만 사랑도 설레임도 아닌 이 마음을 표현하긴 어려웠다.
난 이미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사랑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의 인생에 나로 인해 새로운 선택권을 부여한 거 같아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있지. 정말 기분이 그렇다. 난 안가, 알지?"
"그래..알아, 안다. 그래도 연우야, 내가 말했지?
언제고 네가 원하는 때가 아주 잠깐이라도 생기면 그 땐 망설이지 말고 나있는 데로 와.
그래줄꺼지?"
"휴~~"
늘어지는 나의 한 숨소리와 그의 낮은 목소리는 순간 아주 비슷한 소리를 내는거 같았다.
그래 한 달만 있으면 그 쪽은 이 땅에 없으리라.
그 한 달만큼은 잔인하게 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낄라를 단 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