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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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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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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lex


BY 이마주 2003-09-13

<COMPLEX>

 

그 후로도 그쪽은 현장에서 수시로 마주쳐 졌다.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보기 어려웠던 때와 달리 그는 일부러 내가 일하는 주변에 자주 어른거렸다.

사회적인 이목에 꽤나 신경을 쓰는 이삭의 모습이 짜증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한가지 정말로 다행스러웠던건 한 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그래도 꽤나 능력있고 실력있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물론 지금의 말단 인테리어 디자이너, 말이 디자이너이지 완전 현장 노가다로 정신없는 옛애인을 바라보는 그 쪽의 맘은 어떤지 알 바 아니었지만 who care?

워낙 치밀한 실장과 일하는 탓에 공사는 차질없이 진행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편'에 있었다.

신진 조각가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선을 주제로 작업한다는 조각가 심의 작품을 연구소 입구 중앙에 배치하기로 했었는데 심의 마음이 변해서 원래 우리에게 제공하기로 한 '꿈'이라는 작품을 보다 크게 재배치한 '꿈2'를 제공하기로 한데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이미 벽면에 입체적인 프로젝트를 설치했고 작품의 크기가 1.5배 가까이 커진다면 그 간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만든 컨템포러리하고 이 번 공사의 테마였던 벽이 많이 가려지기 때문이었다.

실장은 화가 나면 오히려 더 가라앉는 사람이었다.

현실적인 사장은 어떻게던 좋은 게 좋은 쪽으로 해결하고 싶어했다.

연구소 쪽에서도 다른 작가가 아닌 심을 지목했었고 계약도 마친 상태인데다가 기간이 얼마남지 않은 우리로서는 다른 조각을 섭외한다는 건 여러 가지 큰 손해를 말하는 거였다.

실장은 이번 연구소 공사에 나름대로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다질 기회로 벽면 프로젝트에 어떤 부분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사장이 긴급으로 제안한 이 회의에 윤 명이나 나나 아무런 발언의 기회조차 주어질 틈이 없이 사장과 실장의 숨막히는 설전이 오갔고 그저 어떻게던 빨리 결과가 나야 나같은 현장 노가다는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운이 빠졌다.

윤 명은 그 틈을 타서 내 옆에 앉아 회의 노트에 우스개 소리를 적어 내려가고 자꾸 나를 쿡쿡 지르고 있었다.

'오늘 정말 이뻐요. 근데 머리 안감아서 모자쓰고 있는거죠?'
'아, 지루하다. 끝나고 맥주한 잔 할까요? 아님 뽀뽀한 번?'
'우연우, 자꾸 버티지 말고 나랑 한 번 사귀어봐요. 나 얼마나 귀여운데.헉'

 명이 귀엽지만 않았다면 이건 엄연히 성희롱이었지만 그의 그런 모습은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실장과 사장의 분위기에 숨막히던 나는 은근히 그와의 장난을 즐기고 있던 차 칼날같은 실장의 질문이 우리 사이에 끼어 들었다.

 

"윤 명씨, 다른 아이디어 있습니까? 심선생 작품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 있습니다."
나와 장난만 치고 있는 명인줄 알았는데 그는 확고한 목소리로 벌떡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 아시다시피 지금 저의 회사의 입장에서 다른 조각가와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큰 무리입니다.

게다가 회사의 사활이 걸린 저희 디자인팀의 벽면 프로젝트를 포기하면 실질적인 이번 기회를 통한 저희 회사의 홍보는 별 의미가 없어지겠죠.

심작가님이 보내온 '꿈2'의 사이즈와 재질에 대해 연구해 보았습니다.  작가가 작품의 크기를 늘린 이유는 나름대로 자신의 작품이 연구소에서 돋보일 거란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 의견은 '꿈2'를 공중에 배치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순간 사장은 얼빠진 얼굴이 되었고 실장의 구각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나는 봤다.
명의 명쾌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연구소의 중앙현관은 강철빔이 이미 여러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을 우리의 시각 위쪽으로 와이어 작업을 하고 추가로 작품과 벽으로 반사되는 일부 조명 작업을 수정해서 낮에는 자연광으로 인해 부감이 강조되고 일몰 후에는 우리 디자인 벽의 프로젝트가 반사하는 굴절과 매치를 이루게 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꿈2'은 많은 유리조각과 가벼운 철 조각이 연합된 작품이어서 시각적으로는 무게가 나갈 듯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작품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연구소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현관에 들어오기 전 부터 작품을 보고 들어오고 막상 중앙현관에서는 벽의 반사를 통해 더욱 다양한 모습의 조각을 감상하게 될겁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꿈2' 일부 외곽 쪽에 대략 4~8개의 와이드 브래킷으로 연결하는 것은 작가와 타협할 부분이지만 그 부분을 위한 설득도 제가 맞겠습니다.

비쥬얼로 미리 작업을 하고 실질 연결부위에 들어가는 하드웨어들을 직접 보여줄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윤 명의 얼굴에서 정말 똑 소리나는 눈빛이 반짝였다.
난 왜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분명하고, 발생한 문제까지 핸드링할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에 그의 나이를 뛰어넘어서 정말 일 잘하는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은근히 충격을 받았다.
따지기 좋아하는 실장은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사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좋아.'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얼떨결에 졸졸 실장의 뒤를 따라 나오던 나를  향해 칼날은 바람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우연우씨, 뭐 느낀 것 없습니까?"
"네? 아, 저어..."
"음... 컨템포러리한 디자인을 좋아하면서 우연우씨 자신은 너무 진부한 것 아닙니까? 좀 더 크리에이티브해지세요."

정작 자신도 뾰족한 대안을 내세우지 못해놓고 나보러 그런 말을 하다니 어의가 없었다.

물론 아직 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모욕까지 받으며 하는 직장생활 때려치고 싶어졌다.

솔직히 이런 순간에는 살림만 하던 그 때가 살짝 그리운 것은 사실이었다.
뒤따라 나오던 명은 예의 그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살짝 팔꿈치를 건드렸다.
"맥주?"
"그래 좋아, 오늘 한 번 마셔보자. 하지만! 내가 윤 명씨와 술마시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오케이?"
"뭐라쿠요? 나 영어 몰라요!!!"

 

홍대앞까지 구지 차를 운전하고 오던 윤 명은 차안에서도 운전보다는 나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자주 오던 곳이었는데 그 간 홍대 주변 분위기도 은근히 많이 바뀌어 있었다.
명은 오늘 하루에 무슨 결말을 낼 듯하게 자신에게 완전히 맞기라고를 연발하며 내 손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린 남자와 손을 잡고 걷는 내자신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오늘은 별 다른 생각없이 그저 스트레스나 확 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와 들어간 곳은 온통 이제는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LP레코드 판으로 도배질한 클럽였다. 도저히 인테리어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클럽은 더욱이 어울리지앟게 이름이 'neo'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대개의 우리 나라 인테리어에서 쉽게 저지르는 조명에 대한 실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누가 그 클럽 안에 들어와도 이쁘게 보이도록 주인의 세심한 배려인 듯 벽, 천장은 물론 바닥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조명은 기분을 좀 더 느긋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종,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누구하나 남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자신들의 이야기와 춤에 몰두해 있었다.

두리번 거리며 촌티를 내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거 같았다.

"후배누나, 그만 좀 두리번거려요. 시작은 역시 코로나 좋죠?'
라임과 함께 코로나 한병씩을 들고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한 동안 싱글거리며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윤 명은 어설프게 의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바짝 그의 스툴을 끌어당겼다.
"연우씨, 이런데 불편해요?"
"아니, 별로. 그냥 분위기가 색달라서... 왜 아직도 내가 두리번 거렸어요?"
"아니요, 그냥 물어봤어요. 기분 좋아서요. 드디어 내 데이트 신청을 다 받아주고. 그러니까 사람은 오래살아야하나봐요..

일 많이 힘들죠? 실장님이 기분 나쁘게 대하는거 알아요. 그치만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천재성 있는 사람 은근히 재순거 알죠?

가끔 이런대 와서 풀어버리면 그만이에요. 그래도 난 실장님한테 많이 배워요. 이런 말하면 웃기지만 난 그런 사람이 더 일하기 편해요. 쿨하잖아요."
"쿨하긴 뭐가 쿨해요? 정말 짜증나고 열받고, 이게 다 실력이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지만 정말 가끔은 그만두고 싶어요. 윤 명씨는 그럴 때 없어요?"
"있죠. 직장생활하면서 그런 마음 안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저 때를 기다리고 경력을 쌓고 한마디로 내공의 힘을 쌓는거죠. 이제 우리 회사얘기 그만해요. 어떻게 해서 만난 자리인데 그런데다가 시간을 써요. 아 정말 좋다. 연우씨 참 편해요. 그래서 좋아요. 그리구 그거 알아요? 내게 연우씨 외모중에 어디 제일 좋아하는 줄?"
"징그럽게 무슨 소리에요? 한 번 얘기나 해봐요."
"화내면 안되요, 나 정말 좋아해서 그런거니깐. ..음.. 똥배요!!"
어의없게도 나의 콤플렉스를 명은 들멱였다.

화를 내자니 더 창피하고 .. 아직까지는 그리 아줌마스럽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나잇살인지 운동부족인지 결혼해서 가장 살이 많이 붙은 부분은 치명적이게도 중부지방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바지 속으로 블라우스나 셔츠를 넣어서 입기보다는 살짝 허리선과 힙라인이 커버되는 오버 블라우스를 즐겨 입게 되었다.

하필 그런 부분을 가장 예쁘게 본다는 그런 그의 태도가 날 웃음 짓게 했다.

 

명이는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은 얼굴이었다.

밝고 맑고 유머감각있고 정말 친동생처럼 푸근한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사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모호한 상태였지만 그가 조금만 더 남성으로 다가왔다면 난 한없이 그에게 기대있었을 지도 모를 일 이었다.

여러 병의 코로나를 비우고 우리는 제법 취해있었다.

혼자가 된 후로 나는 술이 많이 늘었다.

혼자가 싫어서도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고 그러다 보니 술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젊고 재치있는 명과의 시간은 다시 어린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한동안 배꼽잡게 우스개 소리를 하더니 윤 명은 다시금 손을 덥석 잡았다.

아무 말없이 나의 손을 그의 입술에 가져가서 그는 아주 부드럽게 손 바닥과 손목의 경계에 입 맞췄다.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그가 곧 예의 그의 맑은 미소를 나에게 보냈고 나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갑자기 진지해 진건 오히려 명이었다.

"연우씨.. 내가 이러는 거 싫죠? 내가 어려서요? 아님 내가 총각이어서요? 아니에요.

차라리 말하지 말아요. 말 안해도 알거 같아요. 이런 얘기들 신물나게 영화에도 책에도 드라마에도 나오니까... 이젠 유행이라면서요? 난 사실 괴롭지는 않아요.

우린 시작을 안했으니까. 근데요. 멈추기가 싫어요. 내가 연우씨한테 갖는 이런 마음을요.

사실 맘만 먹었으면 후배누나 말처럼 내 또래 결혼 한 번 안해본 이쁜 아가씨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연우씨만 그러지 나 잘생겼다고 하는 사람 많아요. 어 웃지마요. 진짜라니까. 나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연우씨밖에 없어요.

솔직히 우리가 사랑하게 되면 내가 조금 손해난다고 생각할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아마 부모님들도 많이 고민하시겠죠. 나이는 상관없지만 이혼녀기 때문에요.

하지만 아마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으실 것도 난 알아요.

우리 부모님 날 믿으니까요. 난 넘 아는게 많아 탈이에요.

근데 그냥 끝까지 가고 싶어요. 내 맘이 평생 안 변할 거 같거든요? 이상하죠?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라고들 말하지만... 어 그거 누구 노래더라?'
"봄여름가을겨울."
"맞아요. 사계절. 흠. 근데요. 나도 변하겠지만 우리가 만약 시작하게 된다면 만약에 말이에요. 인상쓰지마세요. 만약에요, 시작한다면 난 안 변할 자신이 있거든요.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말장난 같네요. 막상 말하고 보니까, 그래도 맘이 그래요."
"명씨. 맞아요. 아마 우리가 시작하면 많은 일들이 생길 거에요.

그리고 내가 이혼녀고 더 나이가 많고 그래서 나랑 명씨랑은 한 번도 줄 긋기 안해 봤어요. 나요? 내 입장에서는 정말 따봉이죠.

나도 명이씨 잘생긴거 알고 재미있는거 알고 실력도 나보다 훨씬 나은 것도 알아요.

막말로 이혼한 여자한테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쵸?

막연히 나도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을 수 도 있을지도요.

명씨처럼 싱그러운 사람이랑 사랑을 하면 어떨까 하는... 근데 그게요. 쉽지가 않네요.

명씨한테도 쉽게 안되는 것처럼 나한테도 그래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명씨가 남자로 안보여요. 그럼 대답이 되나? "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윤 명은 벌떡 일어났다.

주저함도 없이 그는 카키색 셔츠를 벗어 버리고 내 앞에 섰다.

"남자로 안보인다는 건 너무 한거아닌가? 봐요. 나 옷입은 것보다 벗은 게 더 멋진거 몰랐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생각보다 탄탄하게 다져진 건강한 몸이 정말 멋있었다.

하지만 돌발적인 그의 모습에 난 얼굴이 붉어지기 보다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도 나도 그냥 웃고 말았다.

다시 옷을 걸치며 그는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에이, 알았어요. 알았어. 역시 아줌마는 아줌아에요. 웃는 걸 보니, 재미 없다고요."
"미안해요. 우와 정말 몸매 죽인다. 매일 운동하나봐요? 배에 王자 만들려면 꽤 오래 운동해야한다던대?"
"그만 놀리라니까요. 술이나 마시자고요."

그렇게 시간 속으로 우리는 묻어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놀랄 일이 준다는 의미도 있던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남자의 벗은 몸을 수영장에서 봐도 시선 둘데가 없었는데 젊은 남자의 적나라한 근육을 봐도 여유롭게 웃을 수 있는건 역시 아줌마로 내 위치가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아줌마는 아줌마다.

 

클럽에서 나와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더 이상 뱃 속에 뭔가를 채워 넣기는 그도 나도 지쳐있었다.

길거리에 넘쳐 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도 그저 그들처럼 웃으며 걸어 다닐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관심있어하지 않고 명도 나와 둘만의 대화에 충실했다.

극구 집에 바래다 준다는 그를 만류하고 혼자서 택시를 잡아탔다.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만의 세상으로 다시 나는 가고 있는거였다.

그 지독한 외로움은 일로도, 오늘처럼 이런 시간 속에서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가방 속에 던져 놔뒀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음성메세지가 꽤나 많이 녹음되어있었다.
'나 솔희. 너 어디야? 전화좀 받아라.'
'야 너 지금 뭐하냐? 나한테 전화 좀해.'
'솔흰데,나중에 내 메시지 들으면 전화해. 알았지? 나 오늘 어떤 남자 만났는데 거의 죽음이야, 그냥 보기만해도 간다 가.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께. 기분 짱이야.'
'음...난데 나 집 앞이다. 할 얘기 오늘 하려고..집 앞에서 기다릴께.'
남편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의 목소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던 내 얘기는 그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택시는 내릴까 말까를 고민할 틈도 없이 어느새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주차장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도 그의 차도 보이질 않았다.

기다리겠다던 그가 없으니 느껴지는 이 실망감은 또 뭔지.

철이 들고서 내 기억의 대부분을 함께 한 사람.

그와 내가 부부였다는 건 이렇게 지금까지도 나를 옭아매는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그리워지는 기억들이다.

그의 흔적은 대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다.
'늦는구나.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프시다고 전화가 와서 그냥 간다. 밥 잘 챙겨 먹어.'

보리고개도 아닌데 언제나 나의 밥을 걱정하는 그 전남편이란 사람은...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메세지는 한 참 동안이나 날 서성이게 했다.

알면서도 찾아가지 말아야 하는 건지... 혹 내가 가서 더 우스워지는 건 아닌지...

그 생각에 옷을 벗지도 않고 수십 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불안해졌다.

휴대폰이 울리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당신이에요?"
"어? 당신?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나예요. 명이요. 기다리는 전화있었어요?'
"아니에요."
"잘 들어갔나 해서 전화했는데 나 말고도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 또 있나봐요? 와. 무너진다. 총각가슴. 그래도 잘 들어간거 같네요. 됬어요. 잘자구요. 내가 아침에 데리러 갈께요. 어차피 현장갔다가 출근해야 하니까 그 때 회사에서 연우씨 차 가져오면 될 거같아서요.'
"고마워요. 잠깐만요. 술먹고 지금 차 가져가고 있어요?'
"아니요. 친구놈 불렀어요. 그녀석이 대리운전 해주고 있어요. 와, 기분 좋다. 내 걱정도 다 해주고. 그럼 잘자요."
'네, 명씨도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먼저 전화를 걸 수는 더욱이 없었다. 남편은 끝내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관계라는 건 이렇게 사람구실을 못하게 했다 .

어떤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건 일종의 상실감이 교차하기 마련이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노인이 병환중이라면 오히려 찾아가기 쉬었을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전남편의 부모님, 전 시부모님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가지고 전 며느리라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디까지가 옳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답이 없는 고민속에 불면의 밤이 길어질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