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 같은 미소로 친구들은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엔 진수 또한 느긋하게 앉아 그녀를 반겼다.
[야, 진수 야가 니한테 프로포즈했다가 보기좋게 채있다믄서?]
재란이 앉기도 전에 대단한 뉴스라도 되는 듯 영태가 말했다.
즉각, 그녀의 눈이 은숙에게 향했다.
...이 눔의 가시나가...
[야, 째리 보지마라, 내가 안 그랫다]
[내가 그랬다, 와?]
심통스럼 목소리로 자수한 건 진수였다.
뜻하지 않은 고백이었다. 자존심 강한 진수가...
[야, 웬만하믄 진수 맘 쫌 받아주지 와. 재란이 니도 애인이 없다 아이가]
잔을 건네며 종수가 거들었다.
[야야, 가슴속에 딴 머슴아 품고 있는 가시나는 내가 싫다. 치울란다]
[믄 소리고? 그라믄 재란이 야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가? 누고?]
금세친구들의 시선이 재란에게 꽂혔다.
당황한 재란이 진수를 건너다 보았다.
심술맞은 입가와 재미있어 하는 눈빛.
..가시나, 니도 함 뽁여봐라....하는 표정이었다.
[가시나, 뜸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봐라]
이건 복수다. 곱게 넘어갈 진수가 아니다 했다.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복수하냐? 그런다고 내가 불것이라 생각했다면...!]
재란은 술잔을 비웠다.
은숙은 방관자의 자세로 가만히 앉아 술잔으로 입을 가린 채 재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야, 참말이가?]
[참말은 무슨 참말! 진수가 괜히 헛소리하는거다. 야, 술이나 마셔라. 2차는 내가 쏜다]
친구들에게 대뜸 언성을 높이며 재란은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눈으로 진수를 째려 보았다.
모른 척 은숙과 건배하는 진수...
[야, 치사하다 치사해]
노래방으로 들어서면서 재란은 진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했다.
[흥. 치사도 하겠다]
받아 치는 진수가 재란은 얄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야, 니 오늘 티나게 허전해 보인다는 거 아냐? 약한 모습 보이지 마라. 세상이 뒤집혀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고 외치던 이 재란이 아이가? 힘내라]
쿵쾅거리는 음악속을 뚫고 은숙이 귀에 대고 외쳤다.
[노래나 한 곡 해봐라. 오랜만에 <아침 이슬> 함 듣자]
아침 이슬...
그가, 채 영이 즐겨하던 노래였다.
그가 좋아하던 거라는데...뭔들 안 좋겠는가!
참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
울릉도의 여름밤은 서늘했다.
한낮의 파도 소리와는 또다르게 들리는 파도 소리...
재란은 옷깃을 괜스레 한번 여몄다.
다시 또 현실이다.
영태는 희정의 손을 잡고,
종수는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각자 사라졌다.
재란과 은숙, 진수는 다리 난간에 앉아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에 잠시 머리를 식혔다.
[야, 그 여자 어떠터노?]
기다렸다는 듯 은숙이 물었다.
[그 여자?...아, 윤 소라씨 말이가? 근데 어떻긴 뭐가?]
[니가 보기엔 어떠냐구]
[내가 보는게 뭐 중요하노? 내가 결혼하나? 뭐...내 스타일은 아이다. 소라씬 하나에서 열까지 도시 그 자체더라. 뭐라고 해야하나...인간미가 쫌 없다고 해야 하나...나쁜 여자로는 안 보이데]
[너그 삼촌은 뭐라카더노?]
[그걸 내가 우예 아노? 할아버지한테도 말을 잘 않는 사람인데...내가 보기엔 쫌 냉정한 스타일의 삼촌하고 소라씨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니 부모님은 뭐라 카시더노?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나?]
[야, 온지 며칠됐다고...! 가만, 니 와 자꾸 꼬치꼬치 캐 묻노? 니 진짜로 우리 삼촌한테 마음 있나? 야야, 일찌감치 때리챠라. 천년이 지나도 삼촌하고 니하고는 안된다]
[야! 니 삼촌, 나도 싫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기다. 낯선 여자가 이동네에 들어왔는데, 그것도 동네 명물인 채 영을 찾아왔는데 니 같음 안 궁금하겠냐?]
[...그런가?]
[이 눔의 머슴아가. 물어보믄 대답이나 잘 할 것이지...]
[이 놈의 가시나가! 아예 갖고 놀아라, 놀아!]
[야, 그 여자는 니 삼촌하고 결혼할 마음이 있는갑든데... 니 삼촌하고 그 여자 분위기는 어떠터노?]
[나야 모르지...근데 삼촌하고 그 여자가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삼촌이 소라씨더러 될수있는 한 빨리 가라고 하는 것 같더라. 어째보믄 소라씨한테 별 마음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야, 원채 속을 안 보이는 사람아이가. 소라씨집에선 삼촌을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는갑더라]
[쪼잔한 니같은 남자나 출세때문에 자신을 팔지, 니 삼촌은 그럴 사람이 아이다]
[뭐, 쪼잔한? 이 가시나가!]
진수가 은숙의 머리를 한방 쥐어박았고 맞고 있을 은숙이 아닌 까닭에 두 사람은 가벼이 서로를 쥐어 박기 시작했다.
잘 나가다가도 항상 싸움(?)으로 번지는 두 친구를 보며 재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저 털파리는 어디 내놔도 걱정이 안된다. 무인도에 던져놔도 잘먹고 잘살 가시나다]
잠온다고 먼저 들어가는 은숙의 뒷모습을 보며 진수가 한 마디 했다.
[그게 은숙이 장점아이가]
[...그 놈...어떤 놈이고?]
무심히 물어오는 말에 재란은 피식 웃었다.
[그 놈?...나한테 희망같은 사람이야. 언젠간 나를 봐주겠지...하는 마음으로 늘 나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고 좀 더 나은,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어. 너 그거 아냐? 그냥 연모할때는 ... 가슴이 아픈줄 몰랐는데 사랑이란 걸 알게 되었을때부턴 가슴앓이가 시작되더라]
[그럼 때려치워라]
[... ...]
...그럴수 있음 좋겠다 나도...
[진수 넌...편안해 보인다?]
[헛소리 하지마라. 친구 하나를 잃느냐, 사랑을 잃느냐...생각해봤는데, 밉더라도 니를 계속 보는 게 났지싶다는 생각을 했다아이가. 사랑으로서 니는 내한테 해준게 없지만 친구로선 니는 내한테 해준게 많다 아이가. 보답을 해야지뭐...]
[진수야...]
[가시나, 감동하지 마라. 여차하믄 변하는게 내 맘이다. 방심하지 마라. 가자마]
일어서다 말고 진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저 쪽에 오는 차는 우리집 차 같은데? 삼촌이 인자 오나?]
철렁하는 가슴으로 재란은 다가오는 차를 보았다.
가야하는데...가야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그들 앞에서 멈추었다.
[삼촌 인자 오나?...저, 괜찮습니까?]
[덕분에요]
나긋나긋한 여자의 대답이 있었다.
무심코 눈을 들었다.
그의 눈이 곧바고 시야에 박혔다.
여기서 뭐하냐는 눈빛이었다.
재란은 얼른 눈을 피했다.
[나 먼저 간다, 진수야]
[같이 가자. 집이 조긴데 걷지 뭐...삼촌 먼저 가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발길을 돌렸다.
*
그렇게 재란은 밤을 꼬박 셌다.
새벽이 되어도 재란은 이불속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조깅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가 나와 있으리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그를 보면...
묻고 싶어질 것이다.
그 여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분명 묻고 싶어질텐데...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그를 보면 그 말들이 속에서 쏟아져 나올것만 같았다.
그러나 묻고 싶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도서관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니 요즘 와카노? 조깅도 빼먹고. 도서관 끝날때되믄 니 엄마더러 마중오라 그러고...니, 솔직히 지금 영이 오빠를 피하는거제? 맞제?]
[...커피나 한 잔 주라]
며칠만에 보건소를 찾았다.
[자, 마시라. 뜨거븐거 마시고 속이나 홀라당 다타뿌라]
[가시나, 심보는...]
[니 지금 제정신이가? 영이 오빠는 분며이 니한테 마음이 있는데 니가 피하믄 우야노? 그 여자는 빵빵한 집안과 출세라는 명분을 갖고 영이 오빠를 유혹하고 있는데 니는 뒷짐지고 보고만 있나? 멀거니 앉아서 오빠를 뺏길기가? 용기있는 자가 미인, 미남을 얻는다고 안카나. 먼저 쟁취하는 사람이 이기는거 아이가]
[...쟁취한다고...온전한 사랑이 되겠나]
[그라믄! 오기를 기다리나?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당당한 여자다. 그라고 방송국 후계자 자리라믄 어떤 남자고 탐난다카이. 오빠를 믿는지는 몰라도 그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이다. 니가 지금 이러고 있을 상황이가?]
[...오빠한테 선택권을 주고 싶다]
[선택권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내 마음이 어떻다는 거 오빠는 알거다. 그 여자의 마음도...고민된다면...그건 오빠가 해결해야지 안되겠나. 억지로 내게 오게 한다면 언젠간...둘다 후회를 할거다. 그래서 난 오빠한테 선택권을 준다는거다]
[그래서 안 오믄? 또 긴긴 가슴앓이 할라고? 그때가서도 선택권이 어쩌고 저쩌고 할기가? 니 청춘을 채 영한테 다 바치고 말기가?]
[소리좀 낮춰라. 아예 마이크에 대고 떠들지 그러냐?]
[미친년!...헛똑똑이!...]
커피를 마시며 재란은 웃었다.
자조적인, 아픔이 묻어 있는 미소다.
밤새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도박인 셈이다.
그녀 자신을 걸고 하는...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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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 답글 올려 주신 분들,
aglala님, 애수님, 하늘바라기님...
보고 계신가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aglala님은 참 오랜만이죠? 변함없는 인사에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그 말밖에 드릴 게 없네요. *^^*